내가 왜 이순신이죠? 29화
10. 변방의 일(4)
연회가 이어질 동안.
한 여진족 사내가 다가와 말했다.
“족장께서 판관을 찾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그러자 석탈리가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 있다고. 나는 곧 찾아가겠다며 여진족 사내를 먼저 보냈다.
“무엇입니까?”
“저쪽 덩치 큰 친구가 호발도인 모양인데, 보아하니 머리 굴리는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군요.”
“동감합니다. 혹시……, 호발도를 이용해 자중지란을 일으키자는 겁니까?”
“알고 계시군요. 어떻습니까? 족장이 연회를 이용해 너를 제거하려 든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석탈리가 태연하게 권했다.
나에게도 생각해둔 방법이 있지만, 그의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자중지란을 일으켜서 몇 남지 않은 여진족들을 우리가 정리한다. 약간의 수고만 들여 강 너머의 골칫덩이를 깔끔하게 쓸어버릴 수 있었다.
나를 탐탁치 않아하는 부사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겠지. 내가 겉보기와는 달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나의 방식이 아니다.
“저는 이번 사건의 정황을 밝혀낸 뒤, 원인을 제거하고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방지하고자 나섰습니다. 이 목표를 완수할 방도가 이미 있다면, 굳이 자중지란을 유도해 모두를 죽이고 싶지는 않군요.”
“김자강과 그의 부족, 그리고 호발도가 모두 죽는 것만큼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더욱이, 판관께서는 김자강이 괘씸하지도 않으십니까? 감히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고 정적의 제거를 떠넘겼잖습니까.”
“호발도는 공통의 적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게다가 김자강은 저에게 사실관계를 밝히고 일을 맡긴 겁니다. 배신은 하고 싶지 않군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석탈리는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김자강을 찾았다. 그는 맞은편에 호발도를 세워둔 채 여진어로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호발도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대화였는지 녀석은 희희낙락 웃고 있었다.
김자강은 호발도를 소개하듯 말했다.
“내가 ‘아까 전에’ 말했던 그 친구가 바로 이 친구네. 호발도. 족장의 지위를 넘기겠다고 말해주니 좋다고 침이나 흘려대는군.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야.”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겁니까?”
“판관. 조선어를 익힐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호발도 같은 덜떨어진 놈에게 호감을 갖진 않아.”
김자강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주지시켜 주는 말이네만, 나는 내 옆에 있는 멍청이가 살아있는 꼴은 더 보고 싶지 않아. 일을 잘 해결해주면 나 역시 최대한 판관의 일을 잘 해결해주지.”
“그 약속, 지키셔야 될 겁니다.”
“물론. 이제 이놈과 함께 죽어주어야 할 다른 멍청이들도 소개해 줘야겠군. 이상한 착각은 하지 말게. 전부 호발도의 부하들이니까. 제 주인이 칼 맞는 걸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
손을 쓸 때 같이 쓰라는 뜻이었다.
김자강은 호발도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석탈리는 그것이 판관에게 부하들을 소개하라는 뜻임과, 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어조임을 알려주었다.
과연 호발도는 주변을 돌아다니더니 자기처럼 무식하게 생긴 친구들을 몇 데려왔다. 그리고 여진어로 무어라 지껄였다.
“혹시나 힘 쓸 일이 있다면 이 사람들에게 말해보라고 합니다. 정당한 보수만 약속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해줄 거라는군요.”
“소개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덕분에 고생을 덜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호발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의 고생 말이다.
눈앞의 사내들은 만족한 듯 웃으며 흩어졌다. 호발도 역시 과장 섞인 자랑이나 다름없는 소개를 읊은 뒤 물러났다.
이제 석탈리만 곁에 남게 됐다.
“얼굴들은 다 익혀두셨지요?”
“물론입니다.”
“사람들에게 시켜서 하나씩 맡게 해주십시오.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령에서 좋은 술과 고기로 거창하게 연회를 열어줄 터이니, 지금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주세요.”
취권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취하고도 잘 싸울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일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며, 취했다는 변명은 가납될 수 없었다.
“녀석들도 최소한의 판단력은 있습니다.”
“다행이로군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회장의 분위기는 이미 들떠 있었다.
여진족 부족민들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음을 알았는지, 바닥난 식량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신나게 술과 고기를 탐하고 있었다.
호발도 역시 제 부하들과 함께 모여 나무대접을 연신 기울이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큼지막한 고기를 쥔 채로 말이다.
놈의 등판에 칼을 꽂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군요.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사실, 당당하게 호발도를 찾아가서 회령에서의 약탈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반성하고 있지는 않느냐고요.”
그러자 석탈리가 답했다.
“판관이 좋은 분이시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만은 안 됩니다. 특히 지금처럼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을 마주하고 있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음.”
“그리고 이 동네의 사람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인두겁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여기 두만강 너머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쓴 짐승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곳이지요.”
석탈리는 연회장으로 나아가, 술이 담긴 나무대접을 두 개 가져왔다.
그리고 나에게 하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한 잔 정도는 들어두는 편이 좋겠군요.”
제정신으로는 내키지 않는다면 술김으로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술대접을 받아들었다. 뭐, 석탈리의 의도대로 술김으로 일을 저지르기에는 도움이 안 되는 술이었다.
고작 짐승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었으니까. 도수가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석탈리의 의견은 내가 가진 어설픈 동정을 잠시 꺾어두기에는 충분했다.
연회가 말미에 이르렀을 무렵.
여진족 부족민 대다수가 풀밭을 이불삼아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단체로 시끄럽게 코를 골아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잘도 잘 수 있다니, 과연 인간의 한계란 어디까지인가.
어쨌거나,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호발도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고, 그의 부하들도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석탈리와 그의 부하들은 멀쩡했다.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몇 잔은 기울였는지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해 내 편 모두가 적기가 찾아왔음을 알았다는 듯 바쁘게 시선을 나누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몸이 되었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건가?
나는 석탈리와 함께 호발도를 찾았다.
“다시 한 번, 차기 족장의 자리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부족의 역사가 새로 쓰이게 되겠군요.”
석탈리가 통역해주자 호발도는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만취해서 더 술을 마실 여력도 없는데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석탈리를 향해 말했다.
“잠시 시선을 끌어주시겠습니까?”
“직접 하시렵니까?”
칼질을.
“예.”
내키지는 않는다.
단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신립에게 무술을 배웠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전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베어야만 한다면, 살기등등한 적병보단 거나하게 취한 표적이 첫 경험으로는 훨씬 나았다.
석탈리는 나의 각오를 느꼈는지 손끝으로 자신의 목 옆을 그으며 말했다.
“약점은 여기입니다.”
경동맥. 뇌로 피를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한 혈관. 2치(6cm) 길이만 칼이 들어가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에 석탈리가 여진어로 무어라 말했다.
호발도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발을 옮기는 석탈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놈의 부하 몇이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주변에는 석탈리의 부하들이 포진해 있었다. 뒤는 믿고 맡긴다. 나는 환도의 비녀장을 풀었다.
-잘각.
-스릉.
금속성 마찰음에 호발도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의 칼이 훨씬 빨랐다.
-스카각!
뼈 긁는 소리와 함께 호발도가 목을 짚었다. 그리고 고목 같은 커다란 몸뚱이가 비틀거렸다. 심장 박동에 맞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잠깐이었다. 곳곳에서 단말마가 있었고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졌다.
“으!”
호발도의 단말마는 그것이었다.
취기 섞인 분노와 긴장에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서, 놈은 끝까지 상처 입은 목을 부여쥔 채 죽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뒤늦게 부족민 일부가 일어나 소란을 일으켰으나,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김자강이 나타나 한 마디 외침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계획된 것이니 다들 물러가라는군요. 그리고 취기 따위로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는 말라고 합니다.”
석탈리의 통역이었다.
과연 김자강의 말에 여진족 부족민들은 주저하며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태반은 여전히 땅에 누운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참으로 태평한 인간들이었다.
일이 끝나자 김자강이 다가왔다. 그리고 발끝으로 호발도의 머리를 툭툭 치고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끝내버렸군. 최고의 전사도 술은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더니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골칫덩이 하나를 끝낼 수 있었네. 소를 훔쳐갔던 범인이 맞으니, 놈의 부하들과 함께 머리를 베어가 부사에게 바치면 포상이 있을 걸세.”
“이제 약속을 해주시지요.”
“물론. 앞으로 내 수하 중 하나가 버릇없이 또 강을 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약조해주지. 이게 아직도 부족을 지배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족장의 공허한 약속처럼 들리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맡긴다라…….”
김자강은 가당찮다는 듯 웃고는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시뻘건 피에 젖은 주머니였다. 그의 손도, 보아하니 허리춤의 곡도까지도 말이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 피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구를 죽인 걸까? ……아마도 화근이겠지. 이 자리에서 죽은 자들의 아내, 그리고 자식들.
“소 한 마리 값은 하고도 남을 거야. 이 정도면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지 않나? 범인은 잡았고, 처벌했고, 약탈한 소의 배상도 받아냈으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쿱쿱한 술이나마 한 대접 마셔두길 잘 했다. 단단히 각오한 일이었지만 첫 살인은 성취감보다는 불쾌감을 가져다주었으며, 김자강이 건네는 피 값은 이를 한층 더 심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런 나를 대신해 석탈리가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김자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썩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는군. 처음으로 칼을 써본 건가?”
나는 답하지 않았다.
“조선은 친절해서 심약한 사람도 잘 살아갈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문제야. 심약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각오란 게 없지. 그리고 각오 없는 자는 위기 앞에서는 얼어붙은 피식자가 되기 마련이야.”
“…….”
“나나 자네나 서로에게 더 볼일은 없는 모양이니, 이만 돌아가게. 이 난장판의 뒷정리를 거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물론 그래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발을 돌렸다.
뒷맛은 썼다. 그러나 오늘의 사건은 변방의 금방 잊힐 작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손의 떨림이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