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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8화 (2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8화

10. 변방의 일(3)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야.”

“소관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자네가 아니라 내가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는 말이었네.”

부사 장필무가 답했다.

그는 등받이에 늘어져 있었으며 두 손은 깍지를 낀 채였다. 그리고 가당찮다는 표정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 바로 아래에 있는 판관이 죽거나 다친다면 경력에 누가 돼. 자네라고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알고 있기 때문에 허락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무턱대고 강부터 넘어간 것이 아니라요.”

“당연히 무턱대고 강을 넘으면 안 되지. 나에게 허락을 맡으려고 했다는 것을 빚이라도 지운 것처럼 생각하는 건가?”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안 돼.”

장필무의 입장은 단호했다.

“자네 말처럼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미안하지만 나는 그 가능성을 감수할 생각이 없네. 적어도 내 임기가 다할 때까지는, 회령에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한다는 게 방침이야.”

“부사께서 있는 둥 없는 둥 지내신다면 회령은 부사가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차라리 자리가 공석이라면 다른 사람이 부임해올 것을 기대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미안하군.”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장필무는 입을 열지도 않았다.

“원하신다면 계속 안위나 신경 쓰십시오. 하지만 이건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고작 당하관 자리에서 보신을 생각하는 건 본인의 그릇이 여기까지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더 높이 올라갈 자신이 없으니 지금 자리나 지키려 든다는 지적이었다.

장필무는 답하지 않았다.

기다린다고 대답이 돌아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장필무가 있는 대청에서 물러났다.

“이보게, 판관.”

장필무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자네는 내 허락도 맡지 않고 강을 넘어간 거야. 그리고 좋은 결과가 있다면, 장계는 내가 올리도록 하지. 그래도 된다면 김자강을 찾아가게.”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나에게 책임을 최대한 전가시키겠다. 그리고 공훈이 생긴다면 본인이 차지하겠다. 그 뜻이었다.

뻔뻔한 제안이었으나 장필무 딴에는 어렵사리 내건 조건이었다.

이제 관문을 갓 넘어서 판관에 제수된 자. 경력이라곤 하나 없으며,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딴 곳에 자원한 배짱뿐.

그 배짱이나마 거짓이 아니라면 부당한 조건도 받아들이겠지. 원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좋습니다.”

장필무는 감흥이 있었다는 듯, 흠. 하고는 말했다.

“가게. 해가 떨어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람을 보내지. 들것에 실려와도 살아서 돌아오게. 그렇지 않으면 실종으로 처리될 테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 * *

그리고 나는 여기에 왔다.

두만강 너머에.

김자강과 그의 부족민들은 외부인을 반기지 않았다. 강 반대편에서 오는 손님들이란 항상 까탈스러웠다.

그러나 상대는 회령의 판관. 싫어도 방문을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김자강은 나와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 족장의 거처로 초대했다.

“회령에 새 판관이 찾아왔다는 말은 전해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어리군. 조선 조정도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새파란 애송이를 판관직에 제수하다니 말이야.”

김자강이 말했다.

그는 능숙하게 조선어를 구사했으며, 덕분에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조선의 조정까지 생각해주시다니, 보기보다 아량이 넓으시군요. 어찌 그런 분께서 불미스러운 일을 마주하고도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김자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주위에는 무장한 여진족들이 흉흉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었다. 족장의 거처는 넓었으며 족히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하고도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배짱, 그리고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안팎에 위치한 석탈리와 그의 전사들이었다.

“억지를 부리시는 것은 자유지요. 하지만 제가 족장이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 내가 자네 의향대로 놀아주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아니요……. 한심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뭐라?”

김자강이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분명 회령에서는 도적질이 발생했고, 범인은 족장의 영역을 지나갔습니다. 그걸 몰랐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로서는 족장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군요.”

“…….”

“물론 수하 중에 범인이 있어서 놈을 비호하고자 억지를 부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이라면 부족 내에 범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셈이지요. 어느 쪽입니까? 누가 범인입니까?”

김자강으로선 어느 쪽이든 곤란했다.

수하 중 하나가 범인임을 시인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받거나.

자존심 강한 그에게 후자는 용납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판관의 의심대로 수하 중 하나가 범인이기도 했고 말이다.

호발도.

조선인들의 여진족에 대한 편견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멍청하고 야만적인 놈이었다.

근래 들어 일대의 여진족 모두가 식량난을 겪게 됐다. 봄은 가혹한 계절이었으며 하루에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사치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 호발도가 강 너머를 보고 말았다.

조선인들은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광경을 본 멍청하고 야만적인 호발도가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이를 김자강이 알게 된 것은 부족 전체가 떠들썩해진 뒤였다. 강은 이미 건넌 뒤였고 김자강이 취할 태도는 정해져 있었다.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철회해야겠군. 애송이인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혀가 날카로워. 하지만 판관, 이건 알아야 하네. 자네는 우리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당당한 것은 간이 큰 덕인가?”

“제 몸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조선 조정이 백배 천배로 갚아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족장은 조선의 손 안에 있으니까요.”

김자강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이 되어서야 던지듯 말했다.

“좋아. 그냥 물러가지는 않을 생각이로군.”

“저를 물러가게 할 방도가 있습니다. 어려운 방도도 아니지요.”

“뭔가?”

“생산적인 대화입니다.”

“생산적인 대화라…….”

김자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위의 여진족들에게 무어라 말했다.

석탈리의 통역에 따르면 자리를 비우라는 명령이었다. 과연 그 말대로, 주위의 장정들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수십 명의 사내들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공간이 빠르게 식었다. 김자강은 앉아있는 것이 불편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는 게 뭐냐?”

김자강이 물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합니다.”

“내 약속은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부하를 통제하지 못하는 족장의 약속만큼 공허한 것은 없지요.”

-쾅!

김자강은 여진어로 한 차례 지껄였다.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아 욕인 모양이었다.

“새파란 네놈에게서 모욕이나 들으려고 자리를 내어준 게 아니다!”

“저는 족장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러려고 꺼낸 말도 아니고요. 현실을 직시하셔야 됩니다. 족장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데 독자적인 행동이라니요.”

“…….”

“조선을 도발했다간 부족의 존속을 시험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독단적으로 저지르는 것은 둘 중 하나지요. 족장에 대한 도전! ……아니면 도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족장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지.”

김자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쾌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호발도는 지능과 이성을 용력과 맞바꾼 자였고 부족에서 제일가는 전사였다. 그리고 멍청하고 힘만 센 여느 놈들이 다 그렇듯이, 놈은 오직 힘만을 척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호발도는 김자강을 족장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력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놈에게 족장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는 것, 부족을 존속시키고 번창시키는 것, 타 부족과의 유기적이고 복잡한 관계, 조선과의 줄타기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이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면, 놈은 원하는 바를 쉽게 이뤄낼 거다. 대신 부족의 명운은 풍전등화가 되겠지.

김자강이라고 이를 모르지는 않는다. 호발도는 숙청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놈이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쉽게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의 용력은 일대에서 손꼽힐 정도고 부하도 있다.

칼을 들이댔다간 수십 명의 전사가 죽고 다치겠지. 부족의 무력은 크게 손상될 터이며…… 상처 입은 짐승은 여진족 질서에선 최우선 사냥감이었다.

“굉장히 고민되는군. 자네에게 기회를 줘야 할지, 주지 말아야 할지.”

“신용이란 시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김자강이 말을 이었다.

“어디 가서 내가 한 말을 퍼뜨리지 말게.”

“알겠습니다.”

“자네의 의심이 옳아. 내 수하 중에 범인이 있지.”

“누굽니까.”

“그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네. 이자는 무척이나 강력한 전사이며, 놈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특히 나의 피는 말이야.”

자신은 무엇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차도살인을 원하시는 겁니까?”

“자네에게 의향이 있다면.”

“물론 있지요. 그 대신 자리는 족장께서 만들어주셔야겠습니다.”

“……좋아.”

김자강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와 석탈리뿐. 석탈리가 입을 열었다.

“잘 풀리나 싶었더니 일이 커졌군요. 혹시나 김자강이 기만하려는 것일까 의심스럽습니다.”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요?”

“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족장은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게 될 테고, 이전처럼 수하가 회령에 잠입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지요.”

“음.”

“하지만 확인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도 속아주는 것과, 모르는 사이에 당하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요.”

“맞습니다. 제가 확인해보도록 하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와 석탈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상황파악은 끝났다.

누가 범인이며, 그와 김자강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증은 없었지만 정보를 알아온 석탈리가 신뢰성을 보장했다. 김자강은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적을 떠넘겼을 뿐.

나쁘게 말하면 대신 손을 써주게 된 셈이지만, 좋게 말하면 윈-윈이다. 김자강의 적은 내가 처벌해야 할 범인이기도 했으니까.

부족민이 찾아왔다.

“연회가 마련되었으니, 방문하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은 외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즐비한 탁자와 그 위에 놓인 음식들. 회장의 한중간에는 고기가 쇠꼬챙이에 꽂힌 채 익어가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미 부족민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연회를 기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부족원들 대다수가 굶는데 이만한 규모의 연회라니. 김자강이 정말로 호발도를 죽이고 싶은 모양이군요.”

석탈리가 턱짓했다.

그 끝에는 산만한 사내가 김자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족민들의 우려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김자강이야 함정을 파기 위해서라지만 맞은편의 호발도라는 자는……, 확실히 머리 좋아 보이는 인상은 아니로군.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석탈리가 물었다.

내가 죽여야 할 호발도는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게다가 놈에게는 부하도 있었다. 과연 놈들을 피해 없이 제거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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