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7화
10. 변방의 일(2)
“저는 항상 북방의 음식이 제 입에 맞지 않다고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마주하고 있는 음식들은……, 음. 덕분에 식견이 넓어지게 됐군요.”
나는 석탈리의 초청에 응해 그의 저택에 방문했다.
이제 내 앞에 저녁밥이 놓였다. 그리고 메뉴 하나하나가 음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 기준을 시험하고 있었다.
피를 빼지 않고 그대로 찐 고기는 오히려 양반이었다. 관아에서 내주던 음식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 외의 음식이 문제였다.
먼저 곡식에 산사나무 열매를 담아 만든 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말린 느릅나무 열매로 끓인 국. 비눗물처럼 쓰고 미끌거렸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여진족 음식이 조선 사람인 나에게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또 매일 먹을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메인 메뉴가 선을 넘었다.
커다란 나무대접에 놓인 시뻘건 밥. 덜 익혀 딱딱한 쌀밥에 개의 생피와 부추, 마늘을 말아놓았다. 끈적끈적하게 떠오른 기포가 터질 때마다 역한 냄새가 났다.
석탈리가 친절하게 이 음식의 정체만 알려주지 않았으면 오히려 나았을 텐데 말이다.
“이건 여진족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입니까?”
“아니요. 과거에는 흔히 먹었지만 근래에는 빈도가 많이 줄었지요.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주로 찾습니다. 신임 판관께서 직접 소관의 집에 행차하셨을 때처럼 말이지요.”
솔직히 처음 이 음식, 그러니까 개피에 만 밥을 대접 받았을 때는 나를 골탕 먹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여진족들을 보고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에 미동 하나 없었지만, 내 기준에서는 악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음식을 태연하게 떠먹고 있었다. 간간히 반주까지 곁들여가며 말이다.
“만약 입맛에 맞지 않으신다면 그대로 두셔도 무방합니다. 판관께서는 한양에서 오신 분이니, 저희들의 음식이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별수 없지요.”
“아닙니다. 어렵게 준비해주신 특식인데 물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의향이 그러시다면 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한 번만 더 말려주지…….
석탈리는 이미 시선을 거두고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수저를 놀리지 않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개피에 만 밥은 여전히 내 앞에 자리해 있었고 말이다.
더 물러설 곳도 없군.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선짓국을 상상했다.
한참 지니니 마침내 그릇도 바닥을 드러냈다.
덕분에 뱃속의 위장은 대용량 식용유를 한꺼번에 들이킨 듯 꿀렁대고 있었다. 이럴 때 김치 한 접시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외우니 역한 기운도 차차 가라앉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토하니 여진족 여인들이 그릇을 치워갔다. 배를 채운 사내들은 자리를 비웠고, 이제 응접실에는 나와 석탈리만 남았다.
그는 조금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언제나 그렇기 때문에 미묘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대접 하나를 다 비우셨군요. 보는 내내 불안했습니다만.”
“사실, 먹던 도중에는 이런 말씀 드릴 수 없었는데 다음에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한양에서 지낼 때에도 식사를 많이 하지는 않아서요. 이번 식사는 조금 부담스럽더군요.”
조선시대 사람들의 식사량도 나에게는 많았다.
국밥 뚝배기만한 사발에다 밥을 꽉꽉 눌러 담아놓고는 ‘한 공기’라는데,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스텐 공기에다 반쯤 담아놓은 밥이 한 공기였던 나로서는 가히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만한 밥이 사람 뱃가죽 안에 다 들어가나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여진족은 한 술 더 떴다. 인체구조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도였으니까. 몸 쓰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먹는 것도 남달랐다.
“몰랐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배려해드리겠습니다. 많이 더부룩하실 텐데 여기 앉아서 쉬십시오. 술 한 잔 더 내오겠습니다.”
“더 들여도 될는지…….”
당장이라도 목구멍이 시험받는 기분이었으니까.
만일 보는 눈이 없었다면 정말 시원하게 한 바탕 올렸을 거다. 초대 받은 자리라서 꾹 참고 있을 뿐이지.
“술에 들어간 산사나무 열매는 소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다면 한 잔 정도 더 마셔두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석탈리는 잠시 사라졌다가, 금방 술대접을 가져왔다.
처음 맛봤을 때는 쿱쿱했지만 산사나무 열매 덕에 시고 단맛도 있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적어도 신맛과 단맛이 불쾌한 맛은 아니니까.
몇 모금 들이키니 트림이 거하게 나왔다.
“하하.”
그 광경에 석탈리가 한 차례 웃으며 말했다.
“조금 내려갔습니까?”
“예.”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요. 어쩌면 김자강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나누는 편이 더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왜 이 고생을 했는데…….
김자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 아니었던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식사 하나 마쳤을 뿐인데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는 않는군요. 건설적인 대화 하나쯤은 나눠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산사나무 술을 몇 모금 더 들이킬 동안, 석탈리는 말을 이었다.
“김자강이 어떻게든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달포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봄이란 강 너머의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고통스러운 계절이니까요. 꼭 김자강만 아니더라도 그곳의 여진족 모두가 위험해지는 시기입니다.”
“춘궁기는 여진족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조선의 봄은 흔히 춘궁기(春窮期)라 하여 굶은 계절로 유명했다.
이때쯤이면 작년 가을 수확으로 얻은 식량이 바닥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산을 타고 땅을 헤집고 나무를 뜯었다.
당분간이라도 버틸 풀뿌리와 먹을 수 있는 흰 나무껍질을 얻기 위해서다. 그렇게 봄을 버티고 나면 보리가 결실을 맺어, 사람들은 한숨 돌리고 가을 수확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는 전적으로 조선이 농사를 통해 대부분의 식량을 조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농사는 소출을 얻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진족은 기마민족이 아니었던가? 수렵은 계절을 타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진족들도 농사를 짓지요. 북쪽 저 멀리, 이곳보다 훨씬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말입니다.”
“의외로군요.”
“먹고 사는 일인데 방도가 있다면 그냥 둘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석탈리는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어쨌거나 요즘은 강 너머 여진족들에게는 특히나 가혹한 시기입니다. 먹일 입은 많은데 수렵은 한계가 있고, 농사의 결실을 보려면 멀었으니까요. 그러니 ‘전통적인 방법’에 쉽게 유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이요?”
“약탈,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자강이……?”
“아니요. 고작 소 한 마리 훔치려고 조선과 마찰을 빚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그의 아랫사람 중 하나가 판단력이 흐려져, 독단적으로 벌인 일일 겁니다.”
“만일 김자강이 조선과의 마찰을 원치 않는다면, 소를 훔친 사람을 잡아서 회령부로 넘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로서는 범인을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조선과의 충돌도 문제지만, 부하를 잡아다 보냈다간 족장이라는 지위를 위협받을 겁니다. 죽어야 한다면 족장으로 싸우다 죽는 편이 부하의 손에 죽는 것보단 낫지요.”
범인의 입장에서는 굶어죽은 판이라 소 하나 훔쳐 잡아먹은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도 충분히 범인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다함께 굶는 처지니까. 일에 연관되어 있다면 공범으로서 더더욱.
그들에게 조선과의 충돌이란 김자강의 일이지 자신들의 일이 아닌 것이다.
마치 춘궁기에 끼니 굶는 것은 족장인 김자강의 일이 아니라 부하들과 부족원들만의 일이었던 것처럼.
“곤란한 상황이군요.”
“덕분에 많은 사람이 난처해졌습니다. 사건 당사자만 아니라, 부사나리나 저희들도 말입니다.”
부사는 김자강이 처했을 상황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여진족 출신인 석탈리 등은 다시 한 번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을 테고 말이다.
“방도가 있겠습니까?”
“방도야 많지요. 문제는 양보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자강이나 부사나리 모두 묻어두려는 거지요.”
“음.”
“만일 해답을 보시겠다면 판관께서 직접 뛰시는 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일이 잘못 틀어졌을 때도 대비하셔야지요.”
강 너머의 호전적인 여진족과도 관련된 일. 당연히 칼부림이 날 수도 있었다.
내가 일반인이 아니라 판관의 지위에 있는 만큼 내가 상해를 입거나 죽는다면 조선은 묵과할 수 없었고, 당연히 전쟁이 벌어질 터였다.
“중요한 건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판관께서는 뒷감당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부사나리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뜻이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방치해두라는 것이었습니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름을 그저 눈에 안 들어오는 척하는 환자처럼 말입니까?”
“저는 일개 감부입니다. 판관의 행보를 강제할 힘은 없습니다. 단지 조언을 해드린 것뿐이지요.”
“…….”
이제 속이 더부룩했던 건 신경 쓸 수도 없었다.
논의를 해본 결과,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석탈리도 부사와 입장은 다르지 않았다.
상황은 복잡했고 책임 질 사람들은 모두 곤란한 상황에 있으니 굳이 건드리지 말자는 것.
“하지만 이건 유력자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이 일만으로도 회령의 거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서로를 경계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이 같은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보장도 없고요.”
“압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또 만류를 하실 겁니까?”
“아니요.”
“그럼요?”
“판관께서 혹시나 행동에 들어가신다면,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제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도 그리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아래에는 힘쓰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자강은 그리 강한 세력은 아니지요.”
만일 내가 김자강을 찾아가게 된다면 어깨들을 빌려주겠다는 뜻이다.
굉장히 의외였다. 석탈리 역시 본질적으로는 부사와 입장이 다르지 않았으면서도, 나를 지원하려 했으니까.
“어째서입니까? 만일 일이 잘못 된다면, 저 하나의 목숨은 건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감부께서는 어떤 처우를 당할지 모릅니다.”
“하…….”
석탈리는 기운 없이 숨을 토해내곤 답했다.
“지난 백 년 동안 회령은 조선계와 여진계가 양립했고 부사와 판관은 토관직들과 날을 세웠지요. 그 한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판관과 함께 회령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습니다. 적어도 부사와 판관의 후임으로 올 사람이 이곳의 여진족은 강 너머의 여진족과 다르다는 것을 알 정도로 말입니다.”
석탈리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고, 어조는 위협적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