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6화
10. 변방의 일(1)
볼하진.
회령 서쪽 경계에 있는 소규모 주둔지다. 산 중턱에 위치한 만큼 이곳 병사들의 역할은 방어가 아니라 감시에 맞춰져 있었다.
높게 세워둔 누각에 올라 두만강 너머를 주시하는 것이다. 그러다 무언가가 감지되면 운두봉 봉수에 연락해 회령에 상황을 알렸다.
마침 운두봉 쪽에서 연기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보이긴 하지만, 회령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연기 기둥 하나의 뜻은 변경에서 소규모의 무리가 발견됐다는 것. 늘상 여진족들이 두만강 너머를 나다니는 회령에서는 밥 먹듯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기 기둥이 두 개 이상 피어오르는 순간, 그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무리가 강을 도하해 침입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직접 보시겠습니까?”
볼하진 내부를 안내하던 갑사가 옆의 기둥을 툭툭 두드렸다. 누각의 기둥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려는 참입니다.”
누각 기둥에는 이끼가 잔뜩 껴 있었다. 세운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습기와 함께 검은 때도 껴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겁났다.
“기우이십니다. 보기보다 튼튼하거든요.”
갑사는 나의 우려에 답하듯 기둥을 퍽퍽 걷어찼다. 나름 용력을 담은 발길질이었는데 누각과 기둥은 끄떡도 없었다.
“십 년은 더 쓸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께서 잘 아시겠지요. 부디 내가 우려하는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갑사는 호언장담하고는 권했다.
“한 번 올라보시지요? 강 너머의 광경이 꽤나 볼만합니다. 이곳에 처음 전입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을 내지를 정도니까요.”
“권하시니 사양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요. 가서 보겠습니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갑사의 경고대로, 이끼와 습기를 먹은 사다리는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비라도 온다면 정말 위험하겠는데.
손에 잔뜩 힘을 주고서 차근차근 오르다보니 금세 누각에 올라왔다. 그리고 광대하게 펼쳐진 전망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드넓은 대지, 짙푸른 녹음. 태평하게 흘러가는 구름까지…….
“판관나리.”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였다.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방치되어 밤송이가 되어버린 턱과 다 떨어진 군복을 보니 고생이 역력히 느껴졌다.
상투를 보니 여진족 태반인 이 동내에서 몇 없는 조선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뻔한 소리가 될 것 같아, 나는 아저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발을 돌렸다. 그리고 누각을 내려오니 갑사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전망이.”
“좋더군요. 회령만 아니라면 풍류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겠습니다.”
“예, 하하. 저도 옛날에는 한 풍류하던 사람이라 처음 몇 번에는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풍류라면 학을 뗄 정도입니다만.”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운두봉 봉화까지 안내해주시겠습니까? 거기도 직접 봐야겠군요.”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지요.”
갑사가 기꺼이 응해주자 나는 석탈리에게 기다려 달라 부탁한 뒤 운두봉으로 향했다.
한창 산을 타는데 갑사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없고 판관님만 계시니 하는 말인데, 함께 온 자들은 누구입니까?”
“직접 본 적이 없나보군요. 회령부에서 감부를 지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동한 사람들의 기세가 썩 흉흉하던데……, 앞으로는 여진족 사람들을 대동하는 건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왜요?”
“판관님도 잘 아시겠지만 회령은 여진족들이 조선 사람보다 많지요. 그리고 그들은 조선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덩치도 크고 용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성정이 괴팍하고 공격적이라 얼마 없는 조선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으음.”
“볼하진에 몇 없는 조선인 출신 병사들이 의지할 구석은 저희 갑사들뿐입니다. 그마저도 다섯이 전부라, 혹 조선 사람과 여진족 사이에서 분쟁이라도 발생한다면 지위를 이용해 억누르는 게 최선입니다.”
감부는 종육품 관직.
물론 토관직이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무관직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품계 자체는 갑사 최고위인 사직(司直)인 정오품에 준한다.
이하로는 부사직, 사정, 부사정까지 있으니 감부라면 능히 갑사들과 대적할 수준이 됐다.
소수인 조선인들이 갑사에 기대 다수의 여진족들의 등쌀을 견뎌내고 있는 볼하진에서 감부라는 여진족 유력자가 등장했으니, 당연히 볼하진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일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판관나리를 책망하려고 드린 말씀이 아니라, 앞으로는 조금만 배려를 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응당 해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갑사는 살짝 묵례하고는 길을 재촉했다.
살짝 뒤처져 있던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역시 현장의 일이란 오묘하군. 조선인과 여진족 사이의 알력다툼이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령 일대가 조선의 질서에 편입된 지 백 년도 더 넘었지만, 구성원은 여전히 여진족이 대다수였다.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그들에게 조선의 질서란 껄끄러운 것이었고, 한때 여진족의 영역이었던 땅에는 조선인 지배자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조선인 이주민들은 이런 여진족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했다.
강제 이주정책으로 인해 고향과 친척들을 두고 끌려온 것도 억울하거늘, 지형과 기후는 혹독했고 같이 사는 여진족들은 자신들을 경계했다.
출신과 입장, 이해관계가 다른 두 무리가 자신들끼리만 뭉치고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다 두 무리 사이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금방 패싸움으로 번지겠지. 물론 지배자는 조선인이니 동족의 입장을 봐주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주먹을 쥔 자들은 여진족 유력자들이었다.
어찌 보면 살얼음판이라 할 수 있다. 화약 창고였으며, 벼랑에 쳐진 줄이었다. 문제의 소지는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김자강 외에도 일거리가 하나 늘었군.
나는 부사에게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했고, 이 문제를 타협으로 미뤄두다 후임에게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운두봉 봉화에 도착했다.
좁은 공터에 봉화와 야간에 빛을 밝힐 화등잔, 그리고 몇 명의 상주 병력이 지낼 작은 집이 하나 있었다.
갑사가 등장하자 병사들이 예를 올렸고, 갑사는 뒤따라 들어선 나를 소개했다.
“이번에 신임 판관으로 부임하신 분이네. 다들 예의를 갖추게.”
이에 뭇 사람들이 판관나리, 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얼굴 한 번 비추고 싶었습니다. 잠깐만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대놓고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는 것만큼 공허한 소리는 없었다. 밑바닥 일개 병졸로 2년 굴러본 경험이 있으니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봉화나 화등잔에는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돌과 석회, 그리고 쇳덩이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런 물건에 문제가 생기면 아예 기능을 하지 못할 터였다.
병사들의 거처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물론 낡고 비위생적이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이다. 도성 한복판의 저택처럼 잘 관리되어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다 둘러보셨습니까?”
“잘 관리되어 있군요.”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문제가 생길만한 구석 자체가 많지 않지요.”
“다시 내려갑시다.”
“쉬지 않으시고요?”
“감부의 존재가 진영 사람들에게는 불편할지도 모르니까요. 데려온 사람이니 책임지고 빨리 데려가야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내려가지요.”
볼하진으로 내려오니 석탈리가 나를 맞아주었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덕분입니다. 기다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예.”
나는 볼하진 내부와 운두봉 봉수를 안내해준 갑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볼하진을 나섰다.
비탈을 내려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금세 말을 묶어놓은 곳에서 남은 사람들과 합류해 이동을 재개하려는데, 석탈리가 문득 물었다.
“시간은 언제쯤 나시겠습니까? 업무를 끝내신 다음, 쉬시는 시간에 제가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여진어를 배우는 일에 대해서였다.
“스승이 제자를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오는 것이 예의지요. 여진족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까?”
“어느 쪽이 편하냐면, 저로서는 당연히 판관나리께서 찾아와주시는 쪽이 편하지요.”
“하하. 그럼 감부께서 말씀을 해주셔야겠군요. 언제쯤 시간이 나시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퇴청 후라면 아무 때라도 무방합니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됩니다. 자면서 판관을 도와드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석반 직후에 찾아가도록 하지요.”
“흠.”
석탈리가 침음을 흘릴 동안, 일행은 각자의 말에 박차를 가했다. 처음에는 약간 여유있는 속도로 시작했지만 금세 속도가 붙어 말들은 바삐 뛰었다.
푸륵, 푸르륵 하면서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덕에, 석탈리는 반쯤 외치며 말했다.
“언제 석반 이전에 찾아오십시오. 기왕이면 대접 한 번 해드리고 싶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회령에서 달리 할 일이 있으십니까?”
“부사나리와 나눌 말이 있어서요. 그게 길어질지, 아니면 짧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섣불리 약조하기 어렵군요.”
“무슨 일로 말입니까?”
“김자강 일 때문입니다.”
김자강 소리가 나오자 석탈리의 얼굴이 변했다. 물론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너무 미묘한 변화라서 무슨 감정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조금은 쾌활한 느낌으로 말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김자강에 대해서 드릴 말씀도 많고, 이번 일에 대한 입장도 나누고 싶으니까요.”
“음…….”
나를 도와주었으니, 기회를 달라면 주는 게 예의겠지.
게다가 석탈리의 입장과 조언이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 상태로 부사를 또 찾아가봐야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할 테니까.
“좋습니다!”
“그럼 사람들에게 미리 말해두도록 하지요. 퇴청 후에 같이 가도록 합시다.”
“예.”
회령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대화는 없었다.
석탈리는 관아 밖에서 집안사람들에게 몇 마디 나누었고, 그동안 나는 장필무 부사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는 연이은 서류작업의 피로 탓인지 조금은 지친 기색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다녀왔나?”
“예.”
“어떻던가.”
“볼하진에서 내려다보는 두만강 광경이 좋더군요. 운두봉 봉화도 점검해봤는데 이상은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현장의 병사들과 장교들은 보고를 꺼리는 편이라, 이따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직접 나가서 시찰할 필요가 있네. 앞으로도 너무 뜸하지 않게 방문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김자강에 대해서 더 얘기하겠나?”
“조금 더 생각을 갖춘 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오늘 수고했네. 더 맡길 일은 없으니 이만 퇴청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염치불구하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묵례를 꾸벅 올린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석탈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맞은편 집에서 쉬고 있다가, 퇴청할 때가 되어 나섰다.
선약이 있었다. 과연 여진족 유력자의 거처는 어떠할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