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화
9. 신임 회령판관(2)
“…….”
밥상에 놓인 잡곡밥과 고기찜. 아침밥이랍시고 나온 밥상인데 어제 저녁밥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설마 임기 내내 이따위로 먹어야 하는 건가?”
사백 년 뒤 세상에서 온 내가 즐길 수 있는 건 오직 미식 뿐. 하지만 회령의 척박한 토지와 산을 나다니는 노루와 사슴은 나의 미식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고기찜을 들어 맛보니,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누린내가 콧구멍 두 개를 번갈아가며 폭행했다.
후각의 종말, 입맛의 묵시록…….
“하.”
결국 나는 밥을 얼마 먹지도 못하고 저택을 나섰다.
금방 꺼질 배를 매만지며 도착한 곳은, 바로 맞은편의 관아.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아전과 공노비들을 뚫고 도착한 곳은 부사 장필무의 집무실이었다.
그는 첫 만남보다는 훨씬 건조한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왔나?”
“예.”
“자네가 할 일을 따로 빼두었네. 여기 장부들을 취합해서 보기 좋게 정리하고, 공문들 확인해서 육방으로 내려 보내게. 일이 끝나면 볼하진에 얼굴이나 비춰주고. 자네 관할이니까. 가는 김에 운두봉 봉수도 점검하게.”
“…….”
장필무는 당연하다는 듯 업무를 줄줄 늘어놓았다.
문서를 다루는 일이야 그렇다 쳐도 볼하진과 운두봉 봉수까지 다녀오라니.
부임 하루 만인 사람에게 생소할 지명을 읊는 건 그렇다 쳐도, 볼하진과 운두봉 봉수는 회령의 서쪽 경계에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만 해도 50리를 꼬박 달려야 한다. 현대적 단위로 치환하면 20km.
말을 타면 그리 멀지는 않으나, 문제는 두 지역 모두 산에 있다는 점이었다. 볼하진은 중턱에, 봉수는 당연히 꼭대기에…….
근무 첫날부터 하드코어한 명령을 내리는 부사였다.
“거기서 멀뚱멀뚱 있을 건가?”
“아닙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전임 판관이 저에게 남겨둔 언질이 하나 있었습니다.”
“흠?”
장필무의 눈썹이 올라갔다.
“김자강이 우려스럽다고 말입니다.”
“아. 그 친구가 그걸 말해주고 갔군. 나 역시 김자강에 대해서는 우려스런 상황이긴 하네. 그의 부족민과 회령 주민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은 뒤로, 안 좋은 기류가 흐르고 있거든.”
“불미스러운 사건이요?”
“이쪽 동네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 소가 하나 사라졌는데, 밤새 누가 가축을 끌고 강 너머로 도망치더라는 식의 소문이 나는 일 말이야.”
장필무가 말을 이었다.
“따스한 남쪽 지방에서도 귀한 게 소야. 여기 최북단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 귀한 소가 사라졌으니, 그 소를 돌려쓰며 땅을 일구던 사람들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 이쪽에서도 사람을 보내 강 너머를 확인했지만, 성과는 없었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말만 있었을 뿐이지.”
“의심이 가시는 겁니까?”
“판관이 신경 쓸 일이 아닐세. 맡겨둔 일이나 처리하게.”
장필무는 일단의 서류를 밀어낸 뒤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서류들을 챙기면서도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런 일들은 종기와 같아서 내버려두면 크게 번지는 법입니다.”
“종기는 대개 내버려두면 가라앉는 법이지.”
“그러다 터져서 고생하는 겁니다. 여러 가정이 농사에 쓰던 소를 잃었습니다. 그 피해로 농사를 망치면 올해의 생사조차 불분명해지는데 부사께서는 방관만 하시렵니까?”
“나라고 생각이 없는 줄 아나? 물론 김자강의 수하가 소를 훔쳤을 가능성이 십중팔구겠지. 하지만 물증이 없잖나. 게다가 그들은 강 너머의 놈들이야. 심증만으로 들쑤셨다간 주위의 다른 놈들까지 불순해져.”
“그래서 내버려두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도록이요? 목민관의 역할은 왕을 대신해 부민을 다스리는 겁니다. 그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목민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겁니다.”
“…….”
내가 따지자 장필무는 서안을 밀어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형식과 본질은 다르네. 모든 일이 형식적으로만 처리할 수는 없어. 만일 쫓아야 할 것이 있다고 무식하게 달려든다면 짐승과도 다르지 않겠지.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부르는 걸세.”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것은 당장의 충돌을 회피하는데 도움 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겁니다.”
“흠.”
장필무는 짧게 한숨 쉬더니 말했다.
“판관의 입장을 모르지는 않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맡긴 문제를 처리한 다음에 논할 수 있으면 좋겠군. 자기 일도 처리 못해둔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것처럼 보기 싫은 장면은 없는 법이지.”
“……알겠습니다.”
“다녀오게.”
나는 꾸벅 묵례를 올린 뒤 집무실을 나섰다.
서류작업에 몸 쓰는 일, 게다가 장필무는 비협조적인 김자강의 일까지.
부임 첫날부터 일이 산더미였다.
맛대가리 없는 밥은 이제 문제도 안 되는군.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서류를 처리했다.
대부분은 회계였으며, 육방 관속들이 한 차례 고생해둔 덕에 내가 할 고생은 없었다. 내 역할은 감독이었다. 혹시나 아전들이 숫자놀음으로 삥땅친 구석은 없나, 하는 감독.
다행스럽게도 숫자상으로의 문제는 없었다. 아직 행정의 경험이 없는 지금, 그 이상을 확인할 식견은 없다.
이러다 문제가 생기면 부사에게 단단히 트집을 잡힐 터이니, 빨리 관아에 내 편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다음은 몸 쓰는 일이었다.
관아에 들러 서류를 올린 뒤 말을 챙겼다. 이제 볼하진과 운두봉으로 떠나야 할 때. 하지만 위치는 알아도 길은 몰랐다.
꼭 길잡이를 대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부사 외에 안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감부.”
전임 판관이 남겨준 것들로 공부한 결과, 나는 감부가 회령관아의 하부 관청인 전례서(典禮署)의 종육품 토관직임을 알 수 있었다.
토관직(土官職)!
막 조선에 정복된 원주민들 입장에서 새로운 질서란 거북한 것. 그래서 조선은 본토 유력자들을 토관직(土官職)에 제수함으로써 권력과 지위를 보장해 현지인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자리에 제수된 석탈리! 그는 아전 따위는 가볍게 능가하는, 일대의 유력자였다.
“부르셨습니까.”
“예. 송구하오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일대의 강력한 유력자였음에도 석탈리는 공손했다.
위협적인 어조만은 여전해서, 여차하면 허리를 꺾어버리겠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부사께서 저에게 명을 내리셨습니다. 볼하진과 운두봉 봉수를 방문하라시더군요. 제 담당 영역이니 그곳 사람들에게 제 얼굴을 비치라 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최대한 빨리 하시는 편이 좋지요.”
“예. 다만 위치는 알아도 길은 모르고 있으니, 혹 안내를 받을 사람이 있다면 소개를 받았으면 합니다.”
“흠.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모시고 싶습니다만.”
석탈리가 제안했다.
보기와는 달리 고귀한 몸이었으므로 그가 직접 나선다는 건 의외였다.
“감부께서 도와주시겠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영광이랄 것까지야. 단지 이 갑갑한 관아에서 벗어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부사께서는 보기보다 딱딱하신 분이라. 사람이 눈 밖으로 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더군요.”
“저 역시 그렇게 느꼈습니다. 본판이 나쁘지는 않으시지만, 자신의 생각만큼은 완고하신 분이시더군요.”
“앞으로 고생 많이 하실 겁니다.”
“하하.”
짧은 대화가 있었고 석탈리는 부사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출타 허락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대답이 있었는지, 딱딱한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을 이끌고 밖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곧 사람들을 불러서 돌아오겠습니다.”
“사람들이요?”
“집안사람들이지요. 신임 판관의 존안을 익혀두는 것도 좋을 뿐만 아니라, 회령 일대에서 멀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새삼 회령이 위험한 곳임을 다시 느꼈다.
내가 방문하려는 볼하진과 운두봉 봉수와 그곳으로 가는 길은 두만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몰래 강을 넘어온 여진족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었다.
석탈리에게 도움을 청해 다행이었다.
생각 없이 홀로 쫄래쫄래 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으니까. 이런 일을 무작정 맡겨버리는 부사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석탈리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먼저 발길을 돌렸다.
밖으로 나와 기다리니 금방 석탈리가 돌아왔다. 일단의 무리를 이끈 채로 말이다.
십여 명의 흉흉한 여진족 사내들이었다. 다부진 얼굴에 눈은 가늘었으며 덩치는 그들이 탄 말이 괴로워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허리에는 활과 곡도까지 차고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전쟁을 나갈 기세라, 나는 절로 오금이 저렸다.
부사가 이들에 대해 민감한 것도 다 이해가 됐다. 이런 인간들이 아니꼽다고 칼을 드는 순간 눈앞이 다 아찔해질 테니까.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장필무 부사님!
“판관나리.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살짝 박차를 가하니 말이 다각다각 발을 옮겼다. 그런 나를 주위로, 석탈리와 그의 집안 장정들이 포진했다.
마치 압송이라도 당하는 기분.
살짝 고개를 돌리니 옆의 여진족 사내는 시선만 쓱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딱딱한 얼굴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는데 안구만 슥 움직이는 것이 실로 기괴한 광경이라, 나는 고개만 살짝 숙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쫀 것은 아니었다.
* * *
굳이 내 고간을 학대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적당한 속도로 나아갔다.
하지만 태생이 여진족인 주위 사람들에게는 감질 나는 속도임이 분명했다. 한 사람이 여진어로 무언가 말하자, 석탈리가 나에게 권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이런 속도라면 두 시진은 꼬박 걸어야 볼하진에 도착할 겁니다.”
그만 어기적대고 한 번 달려보자는 소리였다.
물론 내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간 내 허리가 접힐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좀 더 속도를 내도록 하지요.”
내가 박차를 가하자 유람하듯 걷던 말이 속도를 냈다. 다각, 다각, 다가각! 말발굽이 대지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고 내 사타구니도 비명을 내질렀다.
살아남으려면 익숙해져야 하는 감각이다. 나는 이를 꽉 물고 고삐를 틀어쥐었다.
석탈리와 여진족 아저씨들은 금방 속도를 내서 따라왔다. 여전히 딱딱한 얼굴들이었지만 어째 한결 나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석탈리에게 외쳤다.
“이미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긴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지요.”
“여기서 제 역할을 다하려면 주민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허나 스스로 여진어를 배우는 건 미련해 보이더군요.”
즉, 여진어를 가르쳐달라는 소리였다.
나의 부탁에 석탈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미세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석탈리가 답했다.
“좋습니다.”
허락을 맡고 난 뒤.
일행은 한참을 말없이 달렸다. 그리고 산에 다다랐으며, 비탈이 심해지자 두어 사람에게 말을 맡겨두고 움직였다.
그렇게 한식경 내내 등산하여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플 때 즈음. 언덕 너머로 석성과 누각이 드러났다.
볼하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