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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3화 (2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3화

8. 임지로 떠나기 전(2)

“이래서 학맥이 얕은 자는…….”

따지자면 아계와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동인의 역사는 서인에 비해 짧았으나 이황과 조식이라는 걸출한 문인이 동인의 스승이 되어 활동한데 반해, 정철이 속한 서인에는 이러한 구심점이 될만한 자가 없었다.

아계는 그것을 비꼰 것이었다.

감정싸움이 당쟁으로 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에 정철이 이를 꽉 물고 중얼거렸다.

“하! 선인들이 목숨을 바쳐 일구어낸 세상에 은근 슬쩍 숟가락 들고 끼어들었으니 사람이 각오가 없는 거야.”

명종조는 계유정난 공신들의 후손들인 훈구파와, 이들이 장악한 조정 질서를 개혁하려는 사림파의 투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선조의 즉위와 함께 훈구파 거두인 심통원이 몰락하고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이 복권되어 사림파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나, 이는 수많은 출혈과 희생으로 얻어낸 갚진 승리였다.

서인은 명종조 훈구파와 맞섰던 사림파의 적통이었으며 최근 뒤늦게 발호한 동인들은 선인이 투쟁으로 얻어낸 황금기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괘씸한 무리였다.

정철은 이를 비꼰 것이었다.

당색은 아직 중립인 이이마저도 자신의 미래를 암시라도 하는지, 정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입장 차이로 싸우던 아계를 지적하는 말이었으니 이이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다던가. 갑자기 개인의 말싸움이 당쟁으로 번질 지경이 되자, 나로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들께서 별것 아닌 저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하면서도 서로 마음을 상하시니 죄송할 뿐입니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이이가 답했다.

“당연히 자네 잘못이 아니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아계도 끼어들었다. 빈정거리면서 말이다.

“판관께서는 원래 성정이 그따위요?”

그러자 정철이 또 물꼬를 터뜨렸다.

또 대판 싸움이 벌어질 판이라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은인들께서 서로 싸우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단 한 분이라도 계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나는 정철을 향해 말했다.

“만일 병조좌랑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직까지도 이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어느 분들과도요. 저에게 사람을 사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까.”

“흠흠.”

정철이 ‘잘 알고 있네.’라는 듯 어깨에 힘줬다.

“스승님께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무릇 배움이란 마음의 양식이며, 학문이 부족한 사람은 이치가 짧고 행동거지가 야만적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당당히 한 명의 선비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나는 아계를 바라보았다.

“비록 오해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판관께서는 사실을 확인하시자 금방 오해를 거두고 저를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만일 판관께서 저를 가상히 여겨 조정에 전말을 보고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지금 특채될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천위로 인해 곤란한 입장에 처했을 때에도 큰 도움을 주셨으니 제가 지금의 자리에 이른 것도 다 판관의 도움입니다.”

“크흠.”

실상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아계로서는 마냥 자랑스러워하긴 민망했다.

군사들을 데리고 저택에 쳐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대면했으며, 이때의 오해를 청산하고자 도움을 주겠다 약조해 놓지 않았으면 영천위와 함께 맞서지 못했을 터였다.

“이조좌랑께서는 당초 특채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던 저를 명단에 올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귀한 발걸음을 하셔서 어느 관직을 원하는지 의향까지도 물어봐주셨습니다. 또 겉으로는 우려를 표해주시고 속으로도 많이 걱정을 해주셨음에도 저의 억지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터임에도, 저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하셨지요.”

“그래. 나라고 자네 걱정을 아니 하고 바로 판관에 추천했겠나? 그런데 예전에 자네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이 지금 나에게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이이가 실망감을 드러냈다.

아직 날은 서 있었지만, 투덜거림에 가까웠고 아계로서도 민망한 참이었으므로 이전처럼 쓴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크흠, 흠. 내 좌랑께 사죄하겠소이다. 당초 명단에 없던 사람을 직접 올려주기까지 했다는 걸 모르고 있어, 본의 아니게 무례를 끼치게 됐소이다.”

“아니오. 이 사람 역시 순신을 판관에 추천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내가 한성부 판관 같았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거요.”

“흠흠.”

“흠.”

두 사람은 내심 민망했는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헛기침해댔다.

그동안 신립은 눈을 땡글땡글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에게는 해줄 말이 없냐는 듯 말이다.

물론 있지.

나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회령에 가면 선전관께서 저에게 가르쳐주신 무예가 가장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하하! 다 공자님께서 혜안을 가지시고 저에게 먼저 가르침을 청하신 덕이지요. 제가 해낸 게 있습니까?”

신립의 공자님 존칭에 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차이 안 나는 사이지만, 선인인 신립이 후예인 이순신을 공자님이라 부른다는 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자네도 순신을 공자님이라 부르나?”

“예. 일전에 가르침을 얻어서 말이지요. 원래는 선생님이라 불렀는데 공자님께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공자님이라 부르게 됐지요.”

그 말에 김성일이 감탄을 흘렸다.

“역시 내 제자야. 벌써 다른 제자를 두다니.”

“그럼 저는 부정자의 사손(師孫, 제자의 제자)이 되는 겁니까? 그럼 사조(師祖, 스승의 스승)께 인사를 드려야 되겠군요.”

“그렇게 되는 셈인가? 인사는 술 채워주는 걸로 대신 받겠네.”

“사손이 한 잔 따르겠습니다.”

신립은 김성일의 잔을 먼저 채워준 뒤, 주위 사람들에게도 스승의 은인이라며 잔을 채워주었다. 모두의 잔이 채워지자 아계가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순신……. 아니. 제자를 앞에 두고 스승의 이름을 막 부를 수는 없지. 그동안 실례를 해왔구만 그래.”

“괜찮습니다.”

“아니야. 그럼, 이 판관에게는 무슨 가르침을 받은 겐가?”

“말씀을 드리자면…….”

신립이 옛 이야기를 꺼냈고, 주위 사람들은 이야기를 긍정하여 앞 다투어 살을 붙였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니, 하는 일이 착하고 마음씀씀이가 선하다니 등의 칭찬일색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왜 순신이 판관이 되게 두었냐, 본인이 원하던 일 아니었냐, 날 세우며 왈가왈부 싸우던 사람들이 금세 한마음이 되어 술잔을 나눴다.

자칫 감정싸움으로 끝날 수 있었던 자리는 좋은 분위기로 무르익었다.

부러졌던 뼈가 더 튼튼하게 아무는 법.

첫 만남에서부터 숙적이 될 뻔한 사람들은 친우가 되었고, 한마음이 되어 내가 회령에서 안전하게 임기를 채운 뒤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몇 잔 순배를 돌리고 안주 두어 접시를 비워내니 하늘에는 금세 별들이 반짝였다.

-뎅, 뎅, 뎅, 뎅…….

“이런. 종이 치는 걸 보니 벌써 인정(人定, 통행금지)인 모양이구려.”

아계가 탄식하자 이이가 덧붙였다.

“좋은 시간은 언제나 화살처럼 빨리 가는 법이라오.”

“부정하지 못하겠구려. 오늘 좋은 사람들을 보고 인연을 만들 수 있어 기뻤소이다. 필히 다음에도 자리를 가져봅시다.”

“회령판관은 두고 말입니까?”

“하하하!”

뭇 사람들이 웃자 정철이 끼어들었다.

“아니,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지금 아니면 이 판관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진하게 송별을 하려면 파루까지는 마셔줘야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은 정 좌랑 덕분에 이미 파루까지 마신 기분이외다.”

아계가 난색을 표하자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철은 주당, 아니 주신(酒神)이었다. 가히 물 마시듯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주도(酒道)란 사사로운 술자리 예절이 아니라 술병을 빨리 비우는 것이었다.

이런 양반이 자리에 낀 덕에 모두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파루까지 마신다면 아마 자리가 파할 때쯤에는 한두 사람 정도는 죽어 있겠지.

“본관은 내일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등청했다가 문책 받고 싶지는 않으니 양해바라겠소. 하하.”

자리가 파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정철은 아쉬운 듯 입맛만 다시다, 돌아가기 전에 최대한 많이 술을 마셔놓겠다는 듯 자작을 때려댔다.

그 모습에 여러 사람이 웃었고, 한 차례 대소가 있은 뒤 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바쁘실 터임에도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귀한 발걸음을 해주시고, 또 감히 두터운 연이라고는 못할 사이임에도 기꺼이 안전을 기원해주시니 저로서는 한량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필히 무탈하게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자리를 청할 터이니, 그때에도 응해주신다면 망극하겠습니다.”

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손님들은 덕담을 한 마디씩 건넨 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마당에서 상전을 기다리고 있던 각 집의 노복들이 다가왔다. 너나할 것 없이 비틀거리던 사람들은 노복의 부축을 받아 문간을 넘었으며, 나는 밖에서 손님들을 배웅했다.

마지막으로 문간을 넘은 사람은 신립이었다. 그는 마치 데운 떡처럼 노복에게 달라붙어 늘어져 있었는데, 돌아가서 꽤나 고생할 모습이었다.

“오늘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자리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 물론이지요. 이번에 판관에 제수된 것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공자님이시라면 필경 그만한 관직은 지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

신립은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공자님께서 회령의 판관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은 미리 접해 알고 있었습니다. 선전관청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어린 사람이 잘도 그런 곳을 자원한다고 말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지요. 개의치 않습니다.”

“그때 저 역시 병조에 육진 지역으로의 전출을 지원했습니다.”

신립은 새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민망한 것인지, 아니면 술기운 때문인지.

그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덧붙였다.

“어쩌면 나중에 임지에서 공자님을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 선전관께서 원하신다면, 저 역시 임지에서 선전관을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예. 그럼.”

신립은 묵례를 꾸벅 올리고는 비틀비틀 발을 돌렸다.

* * *

주연은 고향에서 한 차례 더 있었다.

평소 손이 짜기로 유명했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며 곳간의 문을 활짝 열었다.

금천현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초청해 수백 명의 손님들과 수천 명의 방문객을 받으니, 사람들이 저택을 수십 겹이나 에워싸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술상과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을 피하며 저택으로 입성해야 했다.

대청에는 이미 아버지께서 이웃 수십 명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희희낙락한 것이 실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오!”

아버지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덕분에요.”

“올라와 인사 드리거라. 금천현 현감나리와 내 친우들이다. 여러분들, 이쪽이 이번에 회령판관으로 제수된 막내 순신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순신입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니 대청에 있던 뭇 사람들이 허허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어릴 때부터 총기가 있었다니, 원래 성정이 곧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잘 해주었다니. 나의 잠재력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들이었다.

그중에서 사십대 초반의 인후한 중년인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현감님이라 소개한 사람이었다.

“전도유망한 판관나리께서 오셨구만. 덕분에 내가 금천의 현감을 지내면서 자랑할 거리가 하나 늘었어.”

“별것 아닙니다. 필경 현감님께서는 임지의 사람 중 하나가 관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해내실 테니까요.”

“하하. 내 자네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는걸. 조언 하나를 해주자면, 기회가 될 때 홍패 하나 만들어두게.”

홍패(紅牌)란 대과 급제자에게 주는 증명서를 말했다.

아무리 첫 관문을 높게 시작했어도 대과에 급제하지 않으면 진급에서 밀릴 수 있었다. 다른 관원들은 다 대과에 급제한 경력이 있으니까.

게다가 당하관은 과거를 급제해야 품계를 높여줬다. 나에게 홍패란 일거양득이 되는 셈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있고서, 현감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실로 훌륭한 아들을 두셨소이다. 가급적이면 이 사람 임기 안에 다른 자제분들께서도 관문에 입성했으면 하오.”

“하하하…….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자식 놈들이 너무 대기만성형만 아니길 바랄 뿐이지요.”

“다 잘 될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멋쩍게 웃으시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임지로 떠나면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텐데, 혼자서 잘 지낼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얼마나 잘 지내는지 연락하겠습니다.”

“기대하마. 하지만 내가 물어보려던 건 그것이 아니었다. 혼처를 알아보는 중이야. 형제들 중에서 아직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너뿐이니 말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물론 열다섯쯤 되면 다들 결혼하는 세상이긴 한데, 이런 자리에서 혼사 얘기가 나올 줄은 추호도 몰랐다.

“게다가, 네가 판관에 제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온갖 곳에서 매파를 보내왔다. 너나 나로서는 좋은 혼처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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