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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2화 (2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2화

8. 임지로 떠나기 전(1)

늦은 밤.

-드르륵…….

달그락.

서안에서 붓이 굴러 떨어졌다.

선조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신경 쓸 수 없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막 정무를 마친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가벼운 세필도 쇳덩이나 다름없었다.

선조는 얕게 한숨을 흘렸다.

“후우…….”

이런!

한숨이라니.

신하들이 본다면 ‘아, 전하께서 지금 많이 힘드시구나.’하고 걱정이라도 할 줄 아느냐.

명종에 이어 또 나약한 왕이 보위에 올랐다며 물 만난 고기처럼 설쳐댈 거다.

소위 신하란 자들의 본성이 어떤지는 명종 시절에 여실히 드러났다.

윤원형, 이기, 심통원……. 힘을 거머쥐고 왕이 약해보이자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왕을 농락한 역적들이었다.

뭇 사람들은 권신들이 태생적으로 악한 자라고들 한다. 대다수의 신하들은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에 임하는 자들이라고 말이다.

선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이 믿고 강력한 힘을 쥐었던 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겸허하게 산 자가 있었던가?

없었다.

신하의 본질이란 그런 법이다.

최근 영의정 이준경의 만행만 해도 그랬다. 감히 왕을 상대로 대들고 따지려 들다니.

영천위 신의는 오래전부터 죽어 마땅했을 위인이었다. 그러나 부마나 되는 자를 왕명으로 직접 사형을 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종친들의 지지를 의식해야 했으니까.

보통의 백성들과는 달리, 종친은 왕과 가까운 피를 가진 자들이다. 선조가 그러했듯 기회가 된다면 왕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왕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느냐에 따라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숙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쉬이 종친의 목숨을 박탈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다고, 종친 하나가 죽는 것은 어려워도 종친이 두 번 죽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필경 선조 그 자신의 의사로 영천위 신의의 사형을 주도한다면 종친들의 충성도가 흐려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발언력 있는 신하 중 하나가 나서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이러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돌려서 드러냈다.

-지친(至親, 종친)을 나라에서 명하여 죽게 하였다가 뒷말이 나올까 우려스럽다.

-하오시면 유배하소서.

-다시 유배를 보내면 필경 배소를 빠져나와 난동을 부리지 않겠는가.

선조가 물었으나 영의정 이준경은 답하지 않았으며, 길고도 불편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준경은 침묵을 통해 왕의 행동을 지적하고 규탄한 것이다. 감히 왕이 하문을 하였는데도 답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평소 왕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었다. 그리고 왕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역적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이다.

어쩌면 이준경 역시 아직 계기만 주어지지 않았을 뿐인 역적일지도 모른다. 그의 만행을 그 자리에서 죄를 따져 묻지 않은 다른 신하들도 말이다…….

-부득.

선조는 이를 갈았다.

대과 급제자들을 관원으로 쓰는 이유는 유능한 자가 왕을 보필케 함이지만, 정작 관원들이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서 유능함을 보인 분야는 왕을 기만하고 자신을 위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녀석들.

이러한 혐오스런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선조가 꿈꾸는 것은 바로 절대왕권이었다. 백성 모두에게 신하들 따위가 왕을 농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주지시켜야 했다.

하지만 절대왕권의 완성까지는 멀기만 하다. 계기가 필요했다. 만일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동안 조용히 갈고 있었던 칼날을 휘두를 때가 오리라.

반드시.

그런 면에서, 최근 행보를 드러낸 이순신이라는 자는 썩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거지새끼들을 재우고 먹이고 입힐 생각을 하다니. 무식하리만치 순수하고 천박하리만치 순진한 발상이었다.

그리고 조정에는 그런 놈이 필요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들은 그 재능을 잔대가리나 굴리는데 쓸 뿐이니, 차라리 조금은 덜떨어졌어도 이순신 같은 부류가 곁에 두고 써먹기 쉬웠다.

보라.

-李純信.

이순신은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후손이요,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이진(李眞)과 안동김씨 성균관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의 다섯째 아들로 명종 8년 12월 기해일에 금천현(衿川縣)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세종숙황제(世宗肅皇帝) 가정(嘉靖) 32년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지학부터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단정하고 자애로운 인격을 갖추어 빈한한 자들을 구제하니 뭇 관리와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조정에서도 포상이 논의되었으나 영천위 신의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취소되었다.

무진년 왕이 교지의 반포에 따라 현인들을 모집하여 크게 쓰고자 하니 이조좌랑 이이가 직접 이순신을 방문하여 의향을 묻자, 이순신은 기꺼이 북방으로 가기를 자처하였다.

아직 시험에 합격한 경력은 없으나 동량지재(棟梁之材, 나라의 기둥)의 자질이 있다.

내정 - 승훈랑(承訓郎) 수(守) 회령판관(會寧府使).

일전에 인가했던 특채자들을 어느 관직에 올릴지에 대한 이조의 내정과, 보다 자세해진 인적 정보였다.

이미 한 차례 읽었던 글임에도 선조는 썩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올렸다.

가상한 녀석이었다. 모두가 사절하는 북방으로 차출되기를 자처하다니.

아직까지는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아직 어떠한 시험에도 합격한 경력도 없이 바로 판관에 추천되었다는 점이 걸리긴 했다. 박영준 역시 타협점인지 직품에 맞는 종오품 품계가 아닌 정육품인 승훈랑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양사의 관리들이 파격적인 특채를 용납할지 의문이나, 이순신이라는 놈은 시험해볼 가치가 충분했다.

싹수 있는 놈을 써보지도 않으면서 주위에 싹수없는 놈밖에 없다고 불평하는 건 한심한 짓이었으니까.

이미 이조에서 올린 공문에는 왕의 인장이 짙게 찍혀 있었다.

선조는 공문을 만 뒤 켜켜이 쌓인 권자들 위에 올렸다. 이제 목판 위에는 공문이 꽉 찼다. 더 놓을 곳도 없이 완벽한 삼각형의 탑이 쌓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서안 옆에는 이렇게 가득 메워진 공문의 탑이 몇 개나 있었다. 선조는 서안의 목판을 수많은 탑 옆에 내려놓았다.

이제 쉴 법도 하나 결재되지 않은 공문이 많이 남아있었다. 선조는 시선을 찌푸린 채 아직 손대지 못한 공문의 탑들을 노려보았다.

“…….”

고생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절대왕권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강력한 왕은 반드시 실권을 쥐고 있어야 했다. 처결하는 일 하나 없이 군림할 뿐인 왕은 지배하지 못한다.

마치 잘 말린 국수 위에 채 썰린 오이처럼, 장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선조는 그런 장식이 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나도 잘 간다는 점이었다. 하루가 두 배만 길었어도, 아니 절반만 더 길었어도 공문들을 능히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밖을 향해 물었다.

“밖에 아무나 있는가.”

“말씀하시옵소서.”

“지금이 몇 시인가?”

“사경 일각(四更 一刻, 01시 15분)이옵니다.”

“……그렇군.”

선조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일, 아니 오늘 일정을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 네 시간도 되지 않았다. 역시 시간이 잘 가도 너무나 잘 갔다.

“이제 대전에 듭시지요. 어제도 많이 못 주무시지 않았사옵니까.”

내시가 배려 섞인 어조로 권하였으나, 선조는 서안을 쾅! 때리며 외쳤다.

“지금 그대는 과인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린 왕이 철부지처럼 억지나 부린다며 말이다.

누가 알겠나?

선조는 부득 이를 갈았다. 내시 놈이 초를 치는 바람에 남은 공무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다른 일을 생각하자. 마침 꼭 해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의정 이준경을 제거하는 것.

고심에 빠져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뎅, 뎅, 하고 종이 울었다. 딱 서른세 번이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벌써 파루인가…….”

건방진 역적 늙은이를 숙청할 방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손을 대야 할 공문은 여전히 한 무더기가 남아 있었다.

실망스럽고도 빌어먹을 소식이었다.

-쾅!

분노한 선조가 신경질적으로 서안을 때리자, 밖에서 물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자지 않았다!”

선조는 속으로 건방진 내시의 입을 수차례나 찢어버린 뒤, 끓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냉수와 미음을 가져와라. 대비께 인사드려야겠다.”

* * *

“사헌부에서 반대가 많았어. 어떻게 경력은커녕 시험 한 번 안 본 사람이 바로 종오품 관직에 제수될 수 있냐고 말이야.”

“하지만 전하께서 강경하게 의지를 표명하셨네. 그대들 중 단 한 사람의 빈자라도 구제해본 적이 있냐고 말이야.”

“그러니 사헌부 관리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헛소리나 하다 말고 조용해졌지……, 하하. 전하께서도 자네가 마음에 드시는가보네. 결국 자네가 원하는 대로 됐군.”

이이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쓱 짓고는 따졌다.

“좋은 자리에 모였으니 좋게 생각하려 했는데, 어떻게 막 지학을 넘긴 청년이 원한다고 다른 곳도 아닌 회령판관을 시키시오?”

“본인이 원하는 일이었소이다.”

“허! 만일 사람이 제가 원한다면 산채로도 묻어주겠군. 어른이 되어서 융통성이 그리도 없다니.”

아계가 경멸어린 코웃음을 날리자 이이도 더 참을 수 없었는지 언성을 높였다.

“뭐라?!”

“내 이씨 성을 가진 이조좌랑에 대해서 들은 말이 없지는 않소! 모두가 겪은 신참례인데 선배들이 강요한다고 고발을 하질 않나, 근래에는 더 기고만장해져서 평소에도 상관 능욕하기를 밥 먹듯 한다고 말이오!”

“신참례를 강요하는 건 본래 국법으로 엄금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경우를 맞는다면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소이까!”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그러니 자제도 못하고 앞길 창창한 젊은이를 회령판관에나 추천하는 거요. 잘도 벼랑으로 밀어내셨소이다!”

아계가 따지자 이번에는 정철이 나섰다.

“어허! 판관께서 말씀이 심하시오! 이조좌랑이 비록 관품은 판관보다 낮다곤 하나, 엄연히 선인이고 또 당사자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해준 것인데 그 고생을 인정해주기는커녕 도리어 타박만 하는 게 옳소?!”

“사람이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나잇값을 해야 선인으로 예우해주는 법이지, 하다못해 그깟 나이, 차이 나면 또 얼마나 난다고?”

“허, 허!”

정철이 탄식하자 이번에는 김성일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이 사람이 선배 관리들께서 논하시는 자리에 함부로 낄 자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제자의 스승 된 사람인만큼 조심스레 의견을 표하자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 자리는 내가 회령판관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연이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렀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안 좋게 돌아갔다.

김성일이 말을 이었다.

“이제 지학을 갓 넘긴 제자가 험지 중에서도 험지인 회령의 관직에 제수됐다니 가상하기도 하지만 걱정부터 듭니다. 희망하는 바가 있었다곤 해도 그것이 최선이었는지…….”

김성일이 어물어물 말을 끝내자 아계가 덧붙였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아무리 본인이 희망하였다고는 하나 채 장성하지도 않은 사람을 회령에 보내다니!”

이이가 반박했다.

“나라고 우려가 없는 줄 아시오? 하지만 당사자가 깊은 의지를 표명하였는데 그걸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잘못하는 것 아니겠소?!”

정철이 거들었다.

“만일 순신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걱정은 하더라도 잘 되기를 바라야지. 사람이 보다 큰일을 해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서 험지를 자처하였는데 기껏 좋은 자리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초 치는 게 전부라니, 이게 어찌 도리에 맞는 행동이겠소?!”

그러자 아계가 재차 빈정 어린 콧김을 흘리며 말했다.

“이래서 학맥이 얕은 자는…….”

따지자면 아계와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동인에게는 이황과 조식이라는 걸출한 문인이 동인의 스승이 되어 활동한데 반해, 정철이 속한 서인에는 이러한 구심점이 될만한 자가 없었다.

아계는 그것을 비꼰 것이었다.

감정싸움이 당쟁으로 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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