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화
7. 형이 밀어줄게!(2)
내가 너 아끼는 거 아냐니…….
하다못해 몇 번 본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초면인 사람이 뜬금없이 나를 아낀다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차마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애매해서 미소만 짓고 있으니 이이가 말했다.
“이조에서는 각 관청에 난 공석들을 조사하고 있네. 이번 특채자들을 배치하기 위함이지. 이조에서는 각 사람들이 가진 재주와 평판을 감안한다지만, 필경 지위나 인맥 따위나 보고 말 것이 분명해.”
“이제야 관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니까요. 무슨 재주가 있고 평판이 있겠습니까.”
“자네는 불쾌하지 않나? 시답잖은 사람들이 어쩌면 자네의 상관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원래 그런지라 일일이 불쾌해하면 못 살죠. 더군다나 조직에서는 더더욱.”
불합리하다는 건 안다. 굳이 의식해서 불쾌해하거나 억울해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이제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이 위치에서는 아무리 불평해봐야 달라지는 게 없었다. 내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게 있으면,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서 바꾸면 될 뿐이다.
하지만 이이의 생각은 나와 달랐던 모양이다.
“허어.”
이이는 대뜸 한숨을 내쉬더니 엄히 늘어놓았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기만 할 셈인가? 당연히 불쾌해해야지!”
이이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살아가는 방법은 차차 배워가세.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은 자네가 재주를 펼칠 수 있는 관청에 배속되는 것이야. 어중간한 곳에 떨어졌다간 시간만 잔뜩 버려.”
“어차피 이조에서는 말씀대로 인맥이나 봐가면서 사람을 쓸 텐데요. 제가 어느 자리를 희망한다고 거기에 제수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
“그럼…….”
무슨 소용인가.
도리어 바라는 관청에 배속되지 못하면 실망만 하게 될 텐데.
“하지만 내가 이조에서 좌랑을 지내고 있지 않나. 당하관들 관직 제수는 내가 꽉 잡고 있어. 자네가 나라라도 구하지 않은 이상 당상관부터 시작할 일은 없으니, 일단 자네가 어디로 갈지는 내가 깊게 관여할 수 있다는 뜻이지.”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나중에 부정으로 특정한 자리에 제수되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게 부정이라면 부정 안 저지르는 사람 없어. 자네 같은 사람이 귀한 재주를 썩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상 받을 일이지.”
“정말로 저를 아끼시는군요.”
내가 너를 아낀다는 말 따위,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이가 태연하게 따져 물었다.
“농담이라도 한 줄 알았나? 나는 공허한 소리는 입에 담지 않아.”
도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아껴주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표해도 되네. 지금은 자네가 희망하는 관청에 배속되는 일에 대해서나 고민해보자고.”
“음, 특채가 된대도 적당히 자리 난 곳에 제수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생각해둔 곳은 없습니다만, 선택이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이순신의 공훈은 도성 안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도성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안락하게 경력을 쌓아 요직에 이르는 것도 좋겠지만, 실전경험을 채우지 않고서는 임진왜란에서 큰 역할을 해내기 힘들었다.
“북방의 분쟁지역이 좋겠습니다.”
“뭐? 자네 제정신인가?”
이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북방.
남쪽에서는 다도해와 절도들이 관리의 무덤이라면, 북쪽에서는 국경의 분쟁지역이 관리들의 무덤이었다.
기후가 좋지 않아 매양 춥고 강 너머에는 야인들이 수시로 침범할 기회를 노렸다.
매일을 덜덜 떨면서 혹시나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해서 현지 관리들조차 쌀밥 먹기 힘들었고, 강 남쪽에도 여진족들이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은 조선의 질서에 부합하고 있지만, 언제 다시 야만성을 드러낼지 모르는 족속이었다.
조정에서는 북방으로 발령 난 관리들의 관품을 한두 계단 높여주는 식으로 달랬으나, 여전히 잊을 만하면 북방의 임지를 거부해 쫓겨나는 관원이 생겨났다.
달리 말해서 북방은 제정신으로, 제 발로 갈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물며 국경의 분쟁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거부한다면 보다 높은 관직에 제수될 가능성이 있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어중간한 곳에 떨어졌다가 시간만 버려서는 안 된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말한 건 삼사와 같은 청요직 자리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지, 절대 북방의 분쟁지역을 말한 게 아니었네.”
“어차피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지방관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겸사겸사 분쟁지역에서 지방관을 지낸다면 높은 관품에서, 경력도 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이는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할 말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네는 여기 따스하고 안락한 도성에서 살아서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북방은 진실로 험난한 곳이네. 그곳에서는 지금처럼 몇 마디 말하는 것으로는 몸의 고생을 달랠 수 없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무런 생각 없이 드린 말씀인 것도 아닙니다.”
안락과 보신만 쫓아서는 이순신과 같은 공훈을 낼 수 없었다.
임진왜란 전후로 수많은 명신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라를 구해낸 사람은 조정의 명신들이 아니라, 전장으로 나선 자들이었다.
지금 내가 고생을 자처해서 경험과 실력을 쌓지 않으면, 조정에서는 명신노릇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장에서는 명신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지금의 왕은 선조!
당장은 아니겠으나 관품이 오르면 나 역시 매일같이 선조를 알현해야 했다.
만일 선조가 온화한 왕이었으면 모르되 그는 자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신하를 잡아먹는 사람이었으니, 그 지랄맞은 인간을 면전에서 상대하는 것보단 험지에서 구르는 편이 나았다.
몸고생보다 더한 것이 마음고생이니까.
“으음…….”
이이는 팔짱을 낀 채 침음을 흘렸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무릇 관원이라면 모두들 안락한 도성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굳이 지방으로 나가봐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으며, 공을 인정받기도 힘든데 왜 외관직을 하냐는 것이다.
이순신은 다시 한 번 이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터무니없는 선행을 처음 접했을 때 이이가 느꼈던 충격과 비슷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던 이순신이라는 자에게 지극한 호감을 갖게 되었던 계기처럼 말이다.
결국 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자네가 진심으로 북방에서 관직을 지내길 원한다면, 내 배려해주는 수밖에 없겠지. 이미 말도 꺼내버렸으니.”
“감사합니다.”
“혹시나 정말로 북방에서 관직을 지내게 되면, 나에게 앓는 소리가 들어오지 않게 하게. 굉장히 실망하게 될 테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좋아…….”
이이는 대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자네 의향을 이조에 전하도록 하겠네. 다음에 보도록 하세.”
“다음에 다시 뵈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인사를 나눈 이이는 이순신의 저택을 나와 이조로 향했다.
이순신의 거처가 관광방에 있었던 만큼 육조거리와 멀지 않았으므로, 이이는 금방 이조로 귀환할 수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울었다.
내부는 조용했고 관리들은 모두 서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단숨에 입구 쪽으로 시선이 모였으나, 산통을 깨뜨린 사람이 다름 아닌 이이라는 것을 발견한 상관들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이조판서 박영준이 뭇 하관들에게 말했다.
“특채자들을 어디에 배치할지에 대한 논의도 끝났으니, 이대로 전하께 상주 드리도록 하겠네.”
이이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벌써 말입니까? 사람을 관직에 쓰는 일입니다. 어떻게 반 시진도 못 되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배치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특채자만 있는 게 아니네. 을사년 사람들을 쓰는 일도 있거니와, 명 사신들이 온다는 말이 있어 접반사들도 선발해야 해.”
“그렇다고 이렇게 날치기를 해버린단 말입니까?”
“흠…….”
박영준은 콧김을 스윽 내쉬고는 말했다.
“관심 주고 있던 사람의 배치가 걱정되는 모양인데, 이순신은 활인서 별제로 쓰기로 했네. 자네로서도 불만은 없으리라 생각했네만.”
활인서!
도성 인근의 갈 곳 없는 빈자와 병자들을 구제하는 시설이었다. 거지들을 도운 이순신의 명성에 딱 맞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별제는 종육품 관직이었다.
대과 장원이 바로 윗 단계인 정육품으로 제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과 입격 경력도 없는 이순신을 종육품부터 쓴다는 건 크나큰 특혜다.
이이가 이순신을 크게 아낀다는 것을 고려한 박영준의 배려였다.
“불만 없겠지? 이대로 올리도록 하겠네.”
박영준이 서안에 있던 서찰을 말아 옆에 올려두자, 이이가 말했다.
“이순신을 크게 쓰시기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북방의 분쟁지역으로 나가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흠.”
-술렁술렁.
이조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북방, 하다못해 분쟁지역을 원하고 있다니.
차라리 무인이라면 사람이 순진해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분쟁지역이라면 무공을 세우기는 쉬웠으니까.
그러나 도성에서 근무하는 경갑사가 북방에서 근무하는 양계갑사에 비해 공훈을 세울 기회가 적다는 이유로 특혜까지 받게 된 지금, 무인마저도 북방은 기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인이 강제로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북방의 분쟁지역을 원한단다.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나 이이라는 사람은 건방지긴 해도 헛소리나 할 자는 아니었다.
“그새 이순신을 만나보고 온 모양이군.”
“…….”
“마침 북방에 자리가 있긴 하지. ……어디더라? 이번에 사람 하나 임기가 다 돼서 빠진다던 그 자리.”
박영준이 묻자 이조참의 강사필이 답했다.
“회령의 판관 자리입니다.”
“아, 그래. 회령판관. 이순신이 그 자리를 한다면 특채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관품을 가지게 되겠군. 물론, 북방의 자리를 자처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판관은 종오품 자리다.
대과 장원도 바로는 못 하는 자리. 물론 박영준의 말대로 북방의 관직이니 자원을 한다면 관품 하나둘 못 올려줄 것은 없다.
문제는 회령이 북방 중에서도 북방이라는 점이다.
회령은 조선의 강토가 동북면으로 뻗어나간 함경도 중에서도 유난히 북쪽으로 툭 튀어나와 매우 위험한 육진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기후와 토질이 독보적으로 좋지 않았으며, 개척된 지 백년도 넘게 지났으나 거주민의 십중팔구는 여진족과 여진족 혼혈이었다.
게다가 국경 역할을 하는 두만강이 육진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남쪽에는 여진족 부락이 즐비하여 유사시 가장 먼저 공격받을 곳이기도 했다.
박영준이 물었다.
“좀 더 알아본다면 보다 남쪽의 수령직이나 비교적 조용한 평안도에도 자리가 있겠지만…… 그쪽은 이순신이 원한 분쟁지역이라곤 못할 것 같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정말로 이순신을 회령의 판관으로 보내야겠나?”
이제 이이가 결정할 차례였다.
이순신이 적성에 맞는 활인서에서 안락하게 재주를 드러내게 해줄지, 아니면 자원하는 조선 최북단의 국경 분쟁지역에서 목숨을 걸게 해줄지를 말이다.
그리고 후자를 고르는 것은, 분명 이순신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