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화
7. 형이 밀어줄게!(1)
이이(李珥)!
생원과, 진사과, 대과, 별시라는 실재할 수 있는 모든 시험에서 장원을 거둠으로써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이명을 얻은 자였다.
이러한 학문의 성취로 이이는 자신의 의향과는 달리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왕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사후에는 왕실 사당인 종묘(宗廟)와 성균관 사당인 문묘(文廟)에 함께 배향되었는데, 당시 종묘와 문묘에 동시에 배향된 사람은 고작 둘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이도 지금은 고작 이조좌랑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최근에는 몇 번이나 장원을 하고도, 또 장원을 거머쥐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는 이유로 싸가지가 없다는 오명까지 붙은 참이었다.
물론, 이이는 자신의 오명에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제정신입니까?!”
이이는 손끝으로 서안을 딱딱 치면서 따졌다.
이곳은 그가 근무하는 이조의 관청이었다. 주위에는 상관인 판서 박영준, 참판 이문형, 참의 강사필 등이 있었지만 이이는 당당했다.
그 모습에 상관들은 눈을 내리깐 채 한숨만 흘렸다. 상하구별이 엄격한 조선시대에서 하관이 상관에게 따박따박 대드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러나 이이에게는 아니었다.
‘공인 미친놈’
서경덕, 이황, 조식 등 명망 있는 선인들을 공격하고 다니며, 신래가 되어 신참례를 강요받자 선배 관리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응수한 자.
최근에는 왕과도 맞섰던 최후의 훈구파 심통원도 들이박았다. 선조가 마침 심통원을 제거할 생각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나.
장원 많이 하고도 또 장원하려 든 것? 그건 이이의 역사에 끼지도 못했다.
만일 보통의 관리들이 이렇게 행동했다면 즉시 탄핵 감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자신의 학문과 자질을 증명한 자였으며, 많이 장원하고도 재차 장원하려 든다는 비판조차 이이의 입지 강화를 두려워해 나오는 소리였다.
이런 마당이니 상관이자 장관인 이조판서 박영준도 이이를 엄하게 꾸짖을 수 없었다. 얼굴 한 번 쓸어내리고는 조용조용 타이를 뿐이다.
“나라고 어찌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세가 이러하니, 따져가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어.”
“눈치만 보시겠단 뜻입니까?”
이이가 다시 따졌다.
현재 그가 항의하는 부분은, 바로 특채 추천인 명단에 이순신의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직접 이순신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이이에게 놀라움을 선사해주었다.
이이는 이조의 좌랑이 되면서 인사권을 쥐었으나 그동안 해온 선택이라곤 최선이 아닌 차악이었다.
보잘 것 없는 인물들 중에서 그나마 덜 변변찮은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전부다. 뒷맛은 항상 찝찝했다. 이들이 최선이냐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순신!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도성의 거지들을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거지란 항상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니 구제는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되었으며, 구걸 해오는 거지에게는 식은 밥이나 내어주고 쫓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스무 명의 거지들이 안정적인 거처를 갖고 주기적인 식사를 하면서 스스로 밥벌이를 하게 됐다. 심지어는 세금도 낸다.
이런 길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이이.
하물며 이순신이 이제 갓 지학을 넘긴 청년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이이를 놀랍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었으며, 마침 금상이 현인을 모집하겠다는 교지를 반포한 것은 하늘이 이순신을 위해 내린 기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조에서는 추천인 명단에 이순신의 이름을 넣지 않겠다고 한다.
“어째서 이순신이 기회를 박탈당해야 합니까?!”
“이순신은 영천위가 극형을 당한 일과 연관되지 않았나.”
공식으로 공포된 일은 아니었으나, 도성에는 파다하게 퍼진 소식이었다.
선전관과 동행했던 병졸들은 도성으로 돌아와 고생을 토로했다. 죄인이 배소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흑산도를 사흘 밤낮 꼬박 뒤져서야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병졸들의 노고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보다는 영천위 신위가 마침내 죽었다는 사실에 환호했으며, 이를 알리고 다녔다.
그 과정에도 자연스럽게 이순신의 이름도 함께 오르내렸다. 영천위 신의의 만행을 마침내 종식시킨 자로서 말이다.
“저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이순신이 영천위와 관련된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순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답니까?”
“일국의 부마가 사형을 당했어. 이순신은 그 계기가 된 자고. 특채는 쓰려는 사람의 평판이 무척이나 중요하네.”
“만약 이순신이 영천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오히려 포상을 해야지요! 지난 이십 년 내내 불충과 불효했던 준 역적이 이제야 죽지 않았습니까?!”
“그 준 역적은 부마이기도 했네.”
쾅!
이이가 서안을 때리며 말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부마라는 이유로 비호를 받는다면, 사헌부 관리들은 왜 있습니까? 종친들이 사람 패죽이고 강간할 동안 애먼 관리들이나 탄핵하라고요?!”
“나에게 따지지 말게. 국법이 그러하니.”
“대감은 이 나라의 재상이십니다. 육경(六卿, 육조 판서) 중에서도 으뜸인 이조판서이고요. 만일 국법의 지향점에 문제가 있으면 무작정 고개를 숙일 게 아니라, 따지고 물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박영준은 의자에 늘어져서 이이를 바라보았다.
썩 불쾌한 침묵이 오갔다.
박영준은 중종 35년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지인 모두가 축하해주었으나 박영준은 내심 불만이 있었다. 하필이면 병과로 급제하다니.
장원은 관문을 넘어선 그 순간 참상관(參上官, 종육품 이상)에 제수된다.
이하 갑과 급제자들은 정칠품, 을과 급제자들은 정팔품. 그리고 제일 밑바닥에 있는 병과 급제자들은 정구품에 제수된다.
우스운 일이다. 소과 급제자들도 대과를 포기하고 바로 관문을 나서면 종구품 관직에 제수된다. 기껏 대과를 급제해 33인 안에 들었는데, 소과 급제자와 한 등급 차이밖에 안 난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시간이 흐르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동기들은 줄 잘못 탔다가 떨어지고, 옳은 말만 하다가 찍혔다. 조용히 있던 놈은 조용히 묻혔고 주목 받은 녀석은 당쟁에 휩쓸려 죽었다.
그렇게 삼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재상에 오른 자는 병과 급제자였던 박영준 그뿐이었다.
한 차례 자신의 삶을 회고한 박영준이 말했다.
“자네 이런 식으로 굴면 오래 못 가.”
삼십 년 관직 생활의 정수가 담긴 한 마디였다.
그러나 이이의 생각은 달랐다.
“전 오래 가려고 관직 시작한 게 아닙니다. 무언가를 해내려고 시작한 거지요.”
보신을 추구하는 박영준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젊은이의 패기였다.
“좋아……. 자네가 그토록 열의를 가지고 추천하니 명단에 이름은 올려두겠네.”
“응당 그러셔야지요.”
“하지만 알아두게. 만일 추천을 받아 관문에 들어선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추천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며칠 뒤.
이조로 공문이 내려왔다.
도승지가 직접 가져온 이 권자에는 선조가 추천인 명단에서 최종적으로 선발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문을 받아 든 관리들은 다분히 사무적인 태도로 명단을 훑었으나, 이이만큼은 잔뜩 긴장한 채 명단을 확인했다.
주르륵.
긴장한 시선이 공문의 말미에 이르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단 하나의 이름.
이순신!
이이는 반색했다.
고대하던 결과였다. 암! 별다른 평판이 없는 자들도 특채가 되는 마당에 이순신 같은 사람이 특채되지 않을 순 없지.
관원 모두가 명단을 확인하자 이조판서 박영준이 말했다.
“전하께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쓰기로 확정하셨으니, 우리의 일은 명단의 사람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걸세.”
박영준은 덤덤하게 덧붙였다.
“근자에 들어 인사의 변동이 많았네.”
선조는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때문에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인사만큼은 대비에게 맡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파격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선조의 치세가 반년이나 흐른 지금에도 관리들이 직책이 알음알음 바뀌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을 당상관에 제수하라는 특명까지 있었다. 서두르지 말라는 대비의 만류까지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관들께서는 이번 기회에 각 관청들의 공석을 확인해서 취합해 올리게. 그런 다음 선발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논의해보도록 하지.”
할 일이 정해지자 이조가 분주해졌다. 주로 움직이는 사람은 존귀한 이조의 관리님들이 아니라 아전인 녹사와 서리들이었지만 말이다.
그 사이에서 이이가 일어섰다. 막 찾아갈 사람이 생긴 참이었다.
퇴청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지만, 이이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공무였다.
* * *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
“삼치행채(參差荇菜) 좌우류지(左右流之).”
“요조숙녀(窈窕淑女) 오매구지(寤寐求之).”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헤치며 찾네.
요조숙녀를 자나 깨나 구하네.
관저(關雎, 물수리가 우네)라는 시였다.
요조숙녀를 자나 깨나 구한다라…….
화자가 솔직해서 좋다만 인상 깊은 시는 아니다.
그런데 왜 이딴 시를 읽고 있느냐?
사서를 떼고 나면 삼경이 반겨준다. 그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펼치는 경전이 바로 시경(時經), 삼백 편이 넘는 시가 수록된 시집이다!
시경은 사서처럼 특별한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니나 옛 주나라의 노래들을 공자가 직접 선별해 엮어냈다는 이유로 당당히 유교 경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집을 외워야 했다.
무식하게!
-쿵, 쿵.
그때 밖에서 대문이 울었다.
“내가 나갈게!”
나는 미련 없이 시경을 덮어버리고 뜰로 나왔다.
대문을 여니 관원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 삼십대쯤 됐을까? 그다지 고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관원이 말했다.
“먼저 인사하겠네. 나는 이조에서 좌랑을 지내고 있는 율곡(栗谷)이라고 하네.”
“헉.”
율곡! 하면 당연하다는 듯 뒤에 붙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이이!
설령 이이의 호를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천원권에 떡하니 찍혀있는 얼굴이 바로 이 사람, 이이였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왜, 한참이나 보지 않았다가 10년 만에 본 사람을 보면 많이도 바뀌었는데 금방 눈치채지 않는가? 기억 속의 그놈이구나, 하고 말이다.
지금 내가 딱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조의 좌랑께서는 제 누택에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아. 다름이 아니고. 자네가 이번에 특채자 명단에 올랐네. 사양하지만 않는다면 관문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지.”
“예?!”
스승인 김성일이 불평을 한 게 고작 며칠 전이었다.
개나 소나 특채 추천자 명단에 오르고 있는데 내 이름 이순신 석자만 언급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영천위 신의랑 불미스럽게 엮인 게 그 이유라나?
나는 다음 식년시에 급제하면 그만이라 했지만 김성일은 억울하지도 않느냐며 투덜댔다. 그래서 그날은 공부도 못 하고 김성일을 달래야 했지.
“흠흠. 나에게 고마워해도 되네. 내가 자네를 추천자 명단에 올렸으니까. 물론 자네가 선발된 것은 전하의 의향이시네만, 이 사람이 나서지 않았으면 자네는 전하의 눈에 들어올 기회도 없었을 걸세.”
이이는 감사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어깨에 힘줬다.
그야말로 엎드려 절 받기로군.
“감사합니다.”
“흐음…….”
이이는 음미하듯 한참이나 침음을 늘어뜨리다 물었다.
“별로 기뻐보이진 않는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언젠가는 시작할 관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단지 생각보단 일찍 관문에 들어섰을 뿐이지요.”
“내 생각보단 자신감이 강하군.”
“사명감이 강할 뿐입니다.”
“사명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요.”
언젠가는 내가 맞게 될 임진왜란!
그때 이순신답게, 이순신처럼 공을 세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자네 말대로 관문에 언제 들어서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역시 내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어.”
“귀한 발걸음 해주시어 직접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대문을 닫으려는 찰나!
이이가 대문을 밀어내며 끼어들었다.
“어허! 어디 벌써 사람을 보내려고 하시는 겐가?”
“……한창 근무하실 시간이니 바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공무야!”
이이는 시원하게 외치고는 뜰로 들어섰다. 그리고 관찰하듯 저택 내부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자네가 도움을 주었다는 거지들은 어디 있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 누택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지내기에는 좁은 편이니까요.”
“그렇게 보이는군.”
이이는 중얼거리더니 문득 말했다.
“내가 자네 아끼는 거 알지?”
엥?
왜?
언제 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