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8화
6. 어이 늙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3)
영천위 신의는 과천현 관아에 구금됐다.
피해자 조사나 가해자 취조는 없었다. 단지 행정절차만 필요하다는 듯 과천 현감은 대청에 앉아 붓만 놀렸다.
아계는 그 옆에서 무언가 떠들어댔다. 지시를 내리듯 손가락까지 써가며 말이다.
한참이 지나자 현감과 아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권자를 말았다. 권자는 아전에게 전해졌으며 아전은 서둘러 관아를 빠져나갔다.
나는 아계에게 물었다.
“고작 이 정도로 영천위를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족(士族, 양반) 폭행은 중범죄지만 신의는 그 이상의 만행도 벌인 자였다. 그러고도 벌을 받지 않아 멀쩡하게 나다니고 있었던 참이고.
그러나 아계는 확신했다.
“말해두지 않았나, 벼르고 있는 친구들 많다고.”
“그야…….”
한 차례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신의는 그동안 명종의 비호로 큰 처벌을 면해왔다.
특히 배소를 무단으로 이탈해 도성으로 상경한 것은 분명 국법을 우롱하는 만행이었음에도, 명종은 신의를 해배한다는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했다.
허나 왕이 바뀌었고 더 이상 명종의 비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조정의 관리들은 신의를 벼르고 있었다. 뭐 하나만 걸려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걸 건드려보자는 게 아계의 작전이었다.
“일의 경중은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이때다!’ 싶을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한 번 현감을 보게.”
고개를 돌리니 현감은 뚱한 얼굴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공무를 보는 건가? 신의의 폭행사건은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저 치라고 의문 하나 느끼지 못했겠나.”
분명 작전은 조잡스러웠다.
그런데 현감은 한 마디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아계와 함께 말이다.
“……미리 말이 되었던 것입니까?”
“아니. 하지만 마음은 맞았지. 내가 말했잖나. 벼르고 있는 사람들 많다고.”
아계는 빙글빙글 웃다가 내 어깨너머로 턱짓했다. 발을 돌리니 일단의 장정들이 관아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정에서 온 사람들입니까? 벌써요?”
“아니. 하지만 신의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 똑같지.”
무리 중 선두에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리가 편치 않은지 연신 절룩거리고 있었다.
“신의는 어디 갇혀 있습니까?”
아계가 답했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계는 거침없이 초면의 사내들을 이끌고 발을 옮겼다.
그들은 어째서 신의를 찾는 걸까. 조정에 소식이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찾아올 정도라면 분명 급한 일이겠지. 호기심에 따라가 보니 절룩이던 사내가 이미 신의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이! 일국의 부마께서 어찌 편치 못하게 이런 곳에서 쉬고 계신가?”
명백한 도발에 신의가 나무창살을 콱, 붙들었다.
“이놈! 어디서 굴러먹은 놈이기에 감히 본관을 우롱하느냐?! 이곳에서 나가게만 되면 당장에 살려 달라 빌게 만들어주마!”
흉흉한 겁박이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주변의 옥졸에게 말했다.
“자네, 뒷간은 아니 급한가?”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옥졸은 대답도 없이 비척비척 어딘가로 향해 걸어갔다.
마침 뒷간에 볼일이라도 있었다는 듯.
병사의 발 옆으로 툭, 하고 열쇠뭉치가 떨어졌다. 분명 소리가 들렸을 터이나 병사는 고개도 발도 돌리지 않았다.
사내들 중 하나가 열쇠뭉치를 가져왔다. 그리고 손에서 한 번 튕기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신호라도 됐는지 스슥, 스슥 하고 소매 끌리는 소리가 났다. 관아를 찾은 사내들의 손에는 어느새 아이 팔뚝만한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절룩이던 사내가 창살을 때렸다.
-탕!
방망이가 얼마나 잘 굳었는지, 귀가 얼얼할 정도의 소리가 났다.
필경 관아 전체에 들렸겠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야만적인 신의도 이제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다급히 외쳐댔다.
“이놈들! 아무도 없느냐! 지금 본관이 위험하단 말이다!”
목이 찢어져라 고함이 질러졌지만 여전히 주변은 조용했다. 서늘할 정도의 무관심에 신의는 새파랗게 질려 감옥 안쪽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음에도, 신의는 땅을 벅벅 밀어냈다.
그 광경에 사내가 말했다.
“부마 나으리께서 평소답지 않게 겁쟁이가 다 되었구나! 방금 전의 위세는 다 어디 갔느냐? 끝까지 건방지게 굴어야 때리는 사람 손맛도 좋지 않겠느냐!”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떨어졌다.
감옥의 문은 서둘러 들어오라는 듯 스스로 열렸고, 사내들은 기꺼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의는 인파에 파묻힌 채 외쳤다.
“내 기필코 네놈들을 모조리 육시 낼 것이야!”
악에 받힌 외침과 함께 몽둥이가 작렬했다.
-퍽, 퍽, 퍼퍽, 퍽…….
매질 소리는 한참이 되어서야 멎었다. 분풀이를 마친 사내들이 하나둘 옥에서 나왔으며, 다리 아픈 사내는 마지막까지 남아 말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띌 생각 하지 마라, 그때는 진짜 대가릴 깨버릴 테니까! ……퉤!”
신의의 얼굴에 침이 탁 붙었다가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신의의 몰골을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치명적인 부위는 피했는지 겉으로는 상처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시뻘개진 눈에는 눈물자국이 여실했고 슬쩍 비치는 옷 안쪽은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결정적으로 신의는 그 지랄 맞은 성격이 어디 갔다는 듯 조용했다.
-찰칵.
다시 자물쇠가 채어졌다.
사내들은 몽둥이를 갈무리하고는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이에 맞춰 아계와 나 역시 신의에게서 멀어졌다.
뜰로 나온 아계는 던지듯 현감에게 말했다.
“영천위께서 자해를 심하게 하시더이다. 몸에 피멍이 많이 드신 듯하오.”
현감이 슬쩍 고개를 들더니 무심하게 답했다.
“들어서 알고 있소.”
그러더니 다시 서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별일 아니라는 듯.
* * *
근정전(勤政殿).
어좌에 자리한 선조 아래, 조정의 당상대신들이 좌우로 시립해 있었다.
제신들의 시선은 선조에게로 향해 있었다. 본래 용안은 빤히 쳐다볼 것이 아니나, 신하들이라고 모르겠는가?
영의정 이준경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전하, 안정(眼精, 눈)이 붉사옵니다.”
“알고 있소.”
“많이 피로하신 듯하니 금일 조회는 파하시옵고 휴식을 취하시옵소서.”
“내가 군왕 된 자로서 정무에 힘쓰겠다는데 영상께서는 반대하겠다는 거요?”
다분히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이래서 영의정이 아닌 다른 제신들은 감히 나설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선왕 명종에게 양자를 권함으로써 선조가 즉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이준경조차 호의적으로 대하질 않거늘, 어느 누구라고 왕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준경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서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
“근래 전하께오서 침수(寢睡, 잠)를 거른다는 말이 궁인들만 아니라 신하들에게서도 돌아다니고 있사옵니다. 자주 침수를 거르는 것은 옥체에 좋지 못한 일이오니 자전께서 도와주시는 기간만이라도 정무는 가리시고 옥체를 보전하소서.”
“내가 잠에 들 것인지 아니 들 것인지는 영상께서 왈가왈부하실 일이 아니오. 금일 조회에서는 그런 무의미한 주제보다 훨씬 중요한 사안이 있소이다.”
“…….”
선조는 예민하게 받아내면서 동시에 화제를 돌렸다.
“도승지는 교지를 낭독하시오.”
“예.”
이양원(李楊元)이 대답과 함께 교지를 펼쳤다.
“왕은 이르노라. 내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가 있어야 하고, 큰 집을 지으려면 동량(棟樑, 기둥과 들보)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뛰어난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치세를 흥하게 한 군주가 있었는가.”
나라를 다스리려면 사람을 잘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서문이 이러한 만큼 이어지는 본문도 궤는 다르지 않았다.
교지는 고사와 역사를 들어 유능한 사람이 왕을 보좌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반각 여에 가까운 낭독이 있었고 이제는 교지도 말미에 이르렀다.
“……진실로 원하건대, 대궐에 나와 좋은 말과 곧은 논의로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고 드높은 풍모로 세속의 모범이 되어 내가 부족한 덕으로 실패하지 않게 하라. 이는 나의 지극한 뜻이니 현인들은 유념하라. 이에 교시하니 나의 뜻을 잘 알 것으로 믿는다.”
이양원이 교지를 접으며 물러나자 선조가 말했다.
“각 관청에서는 나의 교지를 받들어, 유능하나 기회가 없어 초야에 묻힌 사람이 있다면 기탄없이 추천하게 하며 설령 연이 닿지 못한 자라도 나의 뜻을 알도록 만백성에게 공포하도록 하시오.”
제신들이 허리를 숙였고 선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 광관방에서 거지들을 거두어 살 방도를 마련해준 자에 대해서 전해들었는데, 그에 대한 다른 소식은 없소?”
영의정 이준경이 한 발자국 나섰다.
“이순신에 대한 소식이라면 마침 새로운 것이 있사오나, 아뢰옵기 송구하옵게도 좋은 소식은 되지 못하옵나이다.”
“말해보시오.”
“영천위 신의의 패려함은 선왕 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온데, 지난날 해배된 뒤로 눈에 띄는 만행은 없었으나 이는 전적으로 그가 도성 밖으로 퇴출되었기 때문이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거두절미하고, 이순신이 신의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거요?”
“예. 올라온 장계에 따르면 영천위는 일대의 소작들을 폭행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는데, 그중에는 이순신의 땅을 경작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여 이순신이 피해사실을 확인하고자 소작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신의에게 폭행당하고 있어 만류를 하였다가 그만 욕을 보았다고 하옵니다.”
“이런 애석한 일이 다 있나.”
가식이 아니었다.
선조는 진심으로 이번 일이 애석하게 느껴졌다. 정치적이기만 한 다른 자들과는 달리, 무식하리만치 순진한 선행을 한 이순신이라는 사내는 선조가 생각하기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요직을 맡겼을 때 왕을 농락할 가능성이 가장 낮았으니까. 물론, 사람이 뻣뻣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가릴 일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어찌 되었고, 신의는 어떻게 되었소?”
“마침 현감이 인근에 나와 있었으므로, 순신은 더 큰 욕을 당하기 전에 구출되었으며 신의는 즉시 관아에 수감되었사옵니다.”
“하마터면 악인에 의해 선인을 잃을 뻔하였구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옵니다.”
다행은 다행이었으나 선조로서는 썩 불쾌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신의에 대한 악명은 잘 알고 있었던 바였다. 놈의 상식을 초월하는 난동들은 한창 조막만하던 시절의 선조의 머릿속에도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선인들이 악인에 의해 피해를 입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권위를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오. 나는 이 사태를 방치할 수 없으므로 필히 신의를 일벌백계하여 뭇 사악한 자들에게 엄한 경고를 내리고자 하는데, 제신들은 방도가 있으면 논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