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6화
6. 어이 늙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1)
을룡이 아침상을 가져왔다.
달칵. 작은 소반에 놓인 것은 한 대접 물과 뭉텅 썰어놓은 채소 한 주먹이었다. 자신이 직접 가져온 상이었지만 을룡은 긴가민가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생채소를 드시겠다고요?”
을룡으로서는 보지도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는 행위였다.
물론 음식의 고명으로 채 썬 채소를 쓰긴 하지만, 이건 주식이 아니라 식감을 돋우기 위한 장식일 뿐이었다.
그러니 생채소를 장식도 아닌, 주식으로 먹는다는 건 실로 진귀한 행위였다. 을룡만이 아니라 금시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조리란 비단 맛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음식에 담긴 양분을 보다 효율적으로 흡수하게 해주는 과정.
특히 음식에 담긴 양분이 적은 채소의 경우에는, 조리가 되지 않았다면 식사를 통해 얻는 에너지보다 소화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더 컸다.
그러니 식재가 진귀한 전근대에서 생식이란 그야말로 기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이 절대적으로 귀한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첨단 기술이 주는 온갖 혜택을 박탈당한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미식밖에 없었다.
생채소가 무슨 미식이냐고?
에라이, 무식한 사람들 같으니.
나는 뭉텅 썰린 당근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게 바로 쿠르디테(Crudite)라고 하는 거야.”
“예?”
“이런 거 사백 년 뒤에 먹으려면 한 접시에 오천 원은 줘야 된다.”
“도대체 사백 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요…….”
을룡은 혼란해하다 물러났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대문에서 쿵, 쿵.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보통의 손님답지 않은 소극적인 등장이라 나는 썩 의아했다.
나를 대신해 손님을 먼저 맞이한 을룡이 돌아와 알렸다.
“금천에서 공자님 땅 일구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예. 어림잡아 열 명은 못 되는 정도였습니다. 장정들인 걸 보니 각 가정의 가장들이 함께 찾아온 모양입니다.”
“무슨 일로?”
해방시켜줄 때는 별 말 없더니.
“물어볼까요?”
“아니야.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끼이익. 대문이 열렸으나 손님들은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볼 뿐. 그러다 맨 앞의 사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뒤편의 장정들도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다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냐는 물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아!
저번에 비가 크게 왔다.
내가 아버지께 받은 땅은 과천현(果川縣)에 몰려 있었다.
미래에는 동작구와 서초구가 되는 지역이다. 꽤나 먹어주는 땅을 물려받은 셈이지.
하지만 내가 그 덕을 받기에는 글렀다. 이 시대의 동작구와 서초구는 계륵이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 땅이니까 쥐고 있긴 한다는 수준이다. 미래로 치자면 개발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산쯤 될 거다.
동작구와 서초구는 강과 가까워 기대할 수 있는 소출은 높았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물대기니까. 하지만 강변인 탓에 물난리가 나면 가장 먼저 수몰되고 가장 나중에 물이 빠졌다.
그런데 추수 때가 다 되어서 큰비가 내린 것이다.
노비라면 밥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다들 해방되어서 소작하는 처지라, 농사가 망하면 정말로 굶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들 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시나 땅이 수몰되어 피해가 크다면, 그 경중을 파악하여 한해 지대는 면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장 굶게 생겼다면 가족 수에 맞춰 양식을 드리지요.”
파격적인 대응이었지만 소작농들은 그리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쌀을 조금 버리게는 되었으나, 어찌 고작 그 정도로 공자님을 귀찮게 할 수 있겠습니까요?”
내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허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사오나……, 송구하옵게도 쇤네들이 일구는 땅 근처에 유력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요.”
“그가 행패라도 부린답니까?”
“행패 정도가 아닙니다요! 쇤네들을 붙잡아두고 천것이 어찌 감히 주인의 재산을 빼돌리냐며, 공자님께서 해방을 해주셨대도 부득불 사람을 시켜 곡식을 전부 강탈해갔습니다!”
‘유력한 사람’소리가 나왔을 때부터 짐작했으나 막상 들어보니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노비가 소출을 빼돌린다고 생각했다면 주인에게 알려야지, 제가 뺏어가는 건 또 무어란 말인가.
어차피 도둑질할 재산이라면 천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둑질하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미친놈이나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관아에 고발은 해보았습니까.”
“예에. 하지만 현감님도 난색만 표할 뿐, 어쩌지 못했습니다요. 오히려 땅을 옮겨서 다른 곳에서 소작하라는 말만 듣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하는 놈이기에 현감조차 쩔쩔맵니까?”
중앙에서 연고도 없는 타지로 파견되는 목민관 특성 상, 현감도 지역 유지들과는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지역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목민관이 행패 부리는 유지조차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정에 고발한다면 고작 아전이나 지역 유지 따위, 하루아침에 몰락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런데 도성 바로 아래에 있는 과천에서 현감이 쩔쩔 맬 상대라? 그럴 인간이 있긴 하던가? 어지간한 뒷배가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만한 사람이 강 바로 너머에 있는 도성은 내버려두고 일개 현에 남아서 왜 행패나 부린단 말인가.
“그것이……, 그 사람이 영천위(靈川尉)라 그런 듯합니다요.”
영천위?
“흠.”
뭐하는 놈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신분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부마(駙馬).
달리 말해 왕의 사위.
직함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영천위처럼 맨 끝에 위가 붙은 직함은 부마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썩 곤란한 상대였다.
내가 왕가의 일원이라지만 왕족 끗발은 조부 때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전주 이씨 성을 달고 있을 뿐인 ‘양반 1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왕의 사위라니.
그것도 남의 재산을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강탈해가는, 아주 악질의.
“내가 영천위를 찾아간다면 말로 해결할 수는 있겠습니까?”
“아, 아니 됩니다, 공자님! 영천위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악명만 언뜻 들어본 사람도 반드시 피해 다닐 정도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설령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자님께서 놈에게 위해를 입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요. 절대로 그냥 찾아가시면 안 됩니다…….”
우려가 가득 묻어나는 부탁이었다.
영천위가 미친놈임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소작의 말을 들어보니 상상 이상인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해결이 안 되어도 좋으니 찾아가지 말라고 한단 말이냐. 도움이 절실해서 찾아온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만큼 영천위가 위험한 자라는 뜻이겠지.
나로서는 똥을 밟은 셈이었다.
그것도 아주 끈적끈적한.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곤란해 하는 소작들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미치광이 부마의 난동에 엮이기 싫다고 발을 뺀다면, 이 사람들은 두고두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감마저도 난색을 표한 마당에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상황에 개입해주겠나.
이들은 모두 나를 믿었기 때문에 찾아온 거다.
“소, 송구합니다요. 공자님. 마음 같아서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나 워낙 피해가 막심하여…….”
“괜찮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다면 응당 그 피해를 호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또 이러한 때에 나를 찾았다는 건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니 기대에 부응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공자님…….”
“이만들 돌아가 계세요. 근시일 내에 도와드릴 방도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소작들은 허리를 연신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올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근심은 이제 나에게로 옮겨왔다.
상대는 부마.
내가 섣불리 어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주위에는 당하관이나마 관직을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이라고 마냥 부마를 이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관직자인 만큼 나보다는 선택지가 많겠지.
얼마 전 저택이 관리 하나와 병사들에 의해 급습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도성에서 사라진 거지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으며, 하필 나의 저택에 들이닥친 이유는 거지들이 나의 저택을 방문한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안 좋은 쪽으로 오해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내가 거지들을 어찌 해버렸다는 식으로 말이다.
덕분에 약간의 소동은 벌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났다.
거지들은 내가 마련한 거처에서 베를 짜고 있었으며 위해를 당한 사람은 없었다. 이를 확인한 관리는 멋쩍어하며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혹시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온다면 주저 않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의 민폐를 갚기 위해서 말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역시 세상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을룡아. 네가 한성부를 다녀와야겠다. 아계라는 사람에게 전해다오. 퇴청 후에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고.”
“알겠습니다.”
* * *
당일 오후.
하늘엔 노을이 지고 바람도 쌀쌀해진 가운데, 나는 쪽마루에 앉아 대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미리 출타하여 김성일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김성일에게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 방문할 수 없다고 연락해두었다.
지금 내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은 손님이었다.
한성부 판관, 아계.
나와 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사람.
어쩌면 아계 역시 해답을 내놓지 못할 수도 있었다.
부마의 지위는 일개 판관이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소작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어 나라는 지푸라기를 잡았듯, 나 역시 한성부 판관이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싶었다.
만일 그 역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된 다음에나 생각해볼 일이다.
“온다고 했지?”
“예에. 꼭 찾아가겠다 했습니다.”
“후!”
을룡에게 몇 번이나 들은 대답이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남들 퇴근해서 배 깔고 드러누울 때 여기 앉아서 끙끙대고 있다니. 미련한 짓도 이런 미련한 짓이 따로 없었다.
오면 오는 것이고 안 온다면 안 오는 것. 사랑방에서 꿀잠 한 판 때리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
들어가서 쉬고 있자.
이런 생각이 든 찰나였다.
-쿵, 쿵.
“을룡아.”
“예.”
을룡이 저벅저벅 나아가 대문을 열었다.
그곳에 말쑥한 사내가 있었다. 잘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던 한성부의 관리였고, 또 내가 그토록 기다린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즉시 뜰을 가로질러 손님을 맞이했다.
“나리.”
내가 묵례를 올리자 아계가 말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미리 연락을 드릴 걸 그랬네요.”
“아닐세! 나와 그대의 첫 만남이 그다지 좋은 인상을 줄만한 것은 아니었으니. 내가 아쉽대도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신하된 자로서 공무를 충실히 이행하려 했을 뿐인데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나리의 우직함을 본받고 싶습니다.”
“하하하.”
아계가 만족한 듯 웃었고, 나는 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일단 안으로 듭시죠.”
“그러세.”
“을룡아, 석반 둘 들여라.”
나는 아계와 함께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고대하던 사람이 마침내 찾아와서일까? 이전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그가 이번 일에 개입해줄지 의문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미리 연락드리지 못했던 것을 사과드리고, 오늘은 좋은 자리만 가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양해를 부탁드려야겠군요.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괜찮네. 편하게 말하게. 나 역시 자네에게 도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가볍게 묵례한 뒤 말을 이었다.
“금일 오전에 소작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이번 물난리 때 입은 피해를 호소할 줄 알았으나, 아니었더군요. 그들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지역의 유력한 사람에게 재산을 강탈당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보통의 유지라면 저 혼자서 해결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말한 유력자란 단순히 유지가 아니었습니다.”
“으음!”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경고였다.
나 혼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적이 있으며, 이 적은 한성부 판관을 지내고 있는 아계에게도 무리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아계가 답했다.
“자네가 잘못을 저지른 일도 아니로군. 그렇다면 무방하네. 약조도 해두었으니 기꺼이 도와줘야지.”
“감사합니다.”
“한데 그 유력자가 누구인가? 군현을 다스리는 목민관인가?”
“아닙니다. 영천위입니다.”
“……누구라고?”
“영천위라고요.”
“하하! 하필이면 영천위란 말인가? 자네 정말로 똥 밟았군!”
아계가 빙글빙글 웃었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현실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함께 밟은 거죠. 방금 저를 도와주시겠다 약조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계는 아차 싶었는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믿음직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