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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5화 (1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5화

5. 형이 왜 거기서 나와?(2)

“성명이 신립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혹, 아는 분의 함자와 비슷한지요?”

비슷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똑같아, 이 사람아!

신립.

역사에 아무리 관심이 없대도 한 번쯤은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충무공 이순신만큼은 아니래도 충분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설령 신립이라는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래도 탄금대 전투쯤은 들어보았겠지.

그러니 좋은 쪽으로 유명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신립은 분명 용맹한 사람이었지만 시세를 읽는 흐름은 부족한 자였다. 당대 맹위를 떨치던 조총을 과소평가한 결과 신립은 탄금대에서 대패하고 말았으니까.

“음…….”

“무예는 어떻게 배우시렵니까?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사흘 밤낮도 자신 있습니다!”

신립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팡팡 내질렀다. 만일 그 자리에 적이 있었다면 누런 옥수수들이 날아다녔으리라.

곁에 두기 부담스럽긴 했으나, 일신의 무용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였다.

“열의는 감사합니다만 신 공(公)도 일과란 것이 있으시니…….”

“고작 감군(監軍)입니다! 여차하면 군모 따위는 벗어버리고 공자님 댁에서 식객 노릇이나 해도 무방하겠지요!”

“전혀 무방하지 않습니다. 어렵게 무과 급제하셨는데 또 그 고생을 하려 하십니까?”

“막상 무과를 급제하고 나니 하는 건 고생밖에 없어서, 하하.”

신립이 멋쩍게 웃었다.

“뻔뻔하게 견뎌내야죠. 지금 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신 공이 느끼고 있는 고생을 견디지 않고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공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후!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신립은 자신의 뺨을 짝짝 때렸다.

사람이 경박한 감이 있었지만, 천성 자체가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탄금대의 비극에서 책임을 면키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으나, 자질이 없는 것도 아닌 만큼 도움이 주어진다면 새 역사를 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감군이라면, 순라군들을 지휘하는 그 감무인가요?”

“예. 그 감군입니다!”

매일 밤 10시쯤, 스물여덟 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데 이것을 인정(人定)이라고 했다.

통행금지는 새벽 4시 서른세 번의 종을 치는 파루(罷漏)까지 이어지는데, 그동안 도성에는 순라군들이 돌아다니며 무단으로 야간을 통행하는 자가 없는지 순찰했다.

이를 총괄하는 사람을 순장(巡將)이라고 했고, 이 순장을 보좌함과 동시에 감독하는 사람을 감군(監軍)이라고 했다.

감군의 선발은 선전관 등에서 선발한 세 명의 후보자를 왕이 직접 낙점하는 것이라, 감군에 뽑힌 사람은 왕의 시선을 받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왕의 시선은 곧 승진의 기회!

올해 무과 급제한 신립으로서는 첫 단추를 잘 꿴 셈이었다.

왕이 선조라 문제지.

“야간 근무라면 해 떨어지기 전에는 시간이 많으시겠군요.”

“예! 아주 넉넉합니다!”

“그래도 잠은 주무셔야 할 터이니 너무 이른 시간에는 안 되겠고.”

“어느 시간이건 괜찮습니다!”

“아니…….”

“아예 제가 공자님 댁에서 숙식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여긴 광화문과도 가까워서 등청도 되게 쉽고, 공자님 댁을 오가면서 걸리는 시간도 아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감정적으로 되어 텐션이 올라갔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 열의가 이성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치 ‘이래서 나는 탄금대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니까!’ 하고 자랑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꽤나 나에게는 부담스러웠으므로, 나는 서둘러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내일 유시(酉時, 17시~19시)에 다시 찾아와요. 정미 육십 섬은 그 전에 보내드릴 테니까 아랫사람에게 미리 말 해놓으시고요.”

“유시는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등청하기 전, 신시(申時, 15시~17시) 초에 입궐해서 어패(御牌)를 받아야 합니다. 이게 있어야 순라를 돌 수 있거든요.”

“아니, 신시 초에 입궐한다고요?”

“예.”

“퇴청은 언제 하시는데요.”

“해 뜨기 전에도 하는데, 일단 파루는 넘어야 합니다.”

“와…….”

저녁 밥 먹기 전부터 근무 들어가서, 해 뜰 때 퇴근이라니.

으윽!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끔찍한 기억을 떨쳐내곤 대화에 집중했다.

“여유시간 없으실 것 같은데, 육십 섬은 그냥 드릴 터이니 감군 지내실 동안에는 근무에 집중하세요.”

“아니, 공자님께서는 저를 도우시겠다면서 왜 저는 공자님을 돕지 못하게 합니까? 감군 그거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못 견딜 일은 아닙니다!”

신립이 다시 주먹을 붕붕 날려댔다.

하기야 기운은 차고 넘친다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등청하기 전에 찾아와주세요. 괜히 무리하다가 몸 상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신립이 힘차게 허리를 숙였다.

하늘을 보니 이제 거의 신시(申時)였다. 중천을 넘어가는 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입궐 전에 짬 내서 들르신 것 같은데, 식사 여기서 하고 가시겠어요?”

“그리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흠흠, 마침 공자님 댁이 관광방이라서 좋군요. 입궐 전에 자연스럽게 여기서 머물다 갈 수 있으니.”

“옆방에서 쉬고 계세요. 사람 시켜서 밥 내오라 하겠습니다.”

“예!”

신립을 빈 사랑방으로 안내해준 뒤,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야기가 잘 됐으니 다행이지만 덕분에 당분간은 바빠질 예정이었다. 일정은 뻔했다. 점심 먹고 난 후에 신립이 찾아오면 을룡이와 함께 무예를 수련한다.

신시가 되어 신립이 입궐하면 그동안 미리 배울 분량을 예습하고, 해가 떨어쳐 스승 김성일이 퇴청하면 찾아가 저녁밥을 먹고 공부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꿀잠.

바쁜 일정이지만 타이트하지는 않았다. 아침에서 점심까지는 완전히 나의 시간이었으니까.

“공자님, 식사 내왔습니다.”

그 알림과 함께 식모들이 쪽마루 위에 상을 놓았다. 달칵, 달칵. 나는 손을 들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공자님. 맛있게 잡수셔요.”

식모들이 물러나자 나는 평소처럼 상을 안으로 들이려다, 도리어 쪽마루로 나왔다.

오늘은 신립과 함께 식사하는 날. 아마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겠지. 기념비적인 첫 합좌였지만 신립은 밥이 나왔다는 말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있는 옆방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크어엉……. 크엉, 컭!

신립은 다 드러난 배를 벅벅 긁어며 죽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햇빛에 새까맣게 익은 복부에는 근육이 딱딱 박혀있는 걸 보니 실로 무인은 무인이었지만, 도포 대신 거적을 입혀놔도 잘 어울릴 몰골이었다.

“신 공!”

“으응, 억?!”

내가 썩 언성을 높여 부르니 그제야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신립이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눈을 비볐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는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공자님.”

“저는 안 잤습니다만…….”

“앗.”

“나와서 식사하세요.”

“예.”

신립은 밥상을 마주하자 감탄을 자아냈다.

“공자님께서는 평소에 이렇게 드십니까?”

밥상에 마련된 식사는 보통의 점심(點心)이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메인이 무게감 있게 양념된 소갈비 찜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마음(心)에 점(點)을 찍는 정도가 아니다.

그냥 식사지.

“평소에는 이렇게 먹지 않습니다. 다만 신 공께서 한 번 등청을 하시게 되면 퇴청까지는 식사하기 힘드실 터라, 그 점을 유의했습니다만 괜한 짓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공자님!”

집도 아버지께 물려받은 남촌의 초가집에, 굳이 본가에서 보내주려는 생활비도 녹봉이 있다며 한사코 사양해온 신립이었다.

덕분에 마음은 편했지만 몸만큼은 편하지 못했던 바. 특히 빚더미에 오른 뒤로는 쌀밥을 먹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져 잡곡 몇 섬을 사다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갈비?

적어도 몇 년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저를 신경 써주셔서 이런 귀한 음식을 해주시다니…….”

“저에게는 신 공의 방문이 귀한 인연입니다. 이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을 뿐이니, 부담 갖지 말아주십시오.”

“아…….”

신립은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공자님의 댁을 방문했을 때 어떤 태도였던가? 상호존대의 원칙도 행하지 않고서 그저 이 집의 도령이겠거니 깔보지 않았나.

그럼에도 눈앞의 공자님은 자신의 허물을 개의치 않고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었으며, 주인의 거처인 사랑방에서도 자게 해주었다.

그런데 자신이 또 보인 모습이라고는 배 훤히 까고 자기, 잠결에 취해 헛소리하기……. 도저히 좋은 사람을 모시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또 이걸 괜히 자책한다면 공자님께서 의식하실까봐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신립은 얌전히 젓가락이나 들기로 했다. 공자님께서 수저를 먼저 든 다음에 말이다.

그런데 공자님이 물었다.

“아니 드십니까?”

“공자님께서 먼저 드신 다음에 들고자 합니다.”

“제가 집 주인이긴 해도, 신 공이 연장자입니다.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편하게 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자님 운운도 부담스럽고 말이야.

하지만 신립은 나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었는지, 대뜸 자기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도 이러지 않았나?

“후! 후! 정신 똑바로 차리겠습니다, 공자님.”

“예에…….”

신립은 권했던 대로 기꺼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갈비 한 점을 맛보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눈물이라도 흘릴 정도였다.

가식 없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습이었으므로 나 역시 마음 놓고 식사를 들 수 있었다. 썩 잘 조리된 갈비찜과 기름진 쌀밥은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고, 나와 신립의 식사는 조용하게 끝났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공자님.”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신립은 약간 물러나서 배를 매만졌다. 그리곤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자님께선 노비들에게도 귀한 갈비를 주십니까?”

“저들은 노비가 아니에요. 다들 평민이지요.”

“아. 그럼 노비는 공자님 댁에서 일하지 않는 거로군요.”

귀한 사람을 모시려면 당연히 수발도 최소한의 지위는 있어야 하는 바.

아마도 담당자가 녹색 도포를 입은 을룡이라는 선비인 모양인데, 자신보다 먼저 공자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잘 하고 있었다.

……라는 건 전적으로 신립의 착각이었다.

“저는 밑에 노비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명운을 속박하는 건 도의상 맞지 않아요.”

“그렇군요.”

“부담이 되시더라도, 괜찮다면 제 누택에 찾아오실 때 점심은 여기서 대접해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게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이미 저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그리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겠지요.”

“괜찮다면요.”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공자님 말씀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빚을 갚겠습니다.”

“존중의 표현은 누군가에게 빚 지우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앞으로도 저와 잘 지내주시기만 하신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신립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말을 나눠볼수록 깊은 호수처럼 느껴지는 공자님이셨다.

“혹시, 공자님께서는 대과에 응시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예. 저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저 스스로에게도 기대를 하는 바가 있고요.”

“공자님이시라면 충분히 대과에 급제하실 겁니다! 만일 공자님 같은 분을 크게 쓰지 않는다면 나라가 죄를 짓는 거지요!”

맞는 말이었다.

이순신을 기용하지 않으면 조선이 임진왜란을 견뎌내는 건 미지수였다. 그리고 나라의 자살은 백성에겐 죄였다.

“하하하……. 좋습니다. 하늘을 보아하니 신시가 머지않았는데, 준비하실 게 있으면 준비하시고 입궐하시지요.”

“예. 몸을 좀 풀어야겠습니다. 간만에 포식했더니 배가 불러서, 하하하.”

신립은 가볍게 웃다, 문득 을룡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걸린 곳은 을룡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쥔 환도에 있었다.

“그거 네가 가지려고 찜했냐?”

“공자님은 이런 칼보다 훨씬 좋은 칼 드셔야죠.”

“그 칼이 그 칼 아닌가?”

툭 던진 말에 신립이 치고 들어왔다.

“그 칼이 그 칼이라니요? 공자님, 같은 환도라도 족보가 있고 종류가 있습니다! 도신의 절단면은 어떤 모습이냐, 곡률은 심하냐, 약하냐, 단조는 어떻게 되었느냐, 도신과 손잡이 길이의 비율은 어떠하며, 무게 중심은 또 어떤지, 내가 배운 파지와 손잡이의 규격이 잘 맞는지…….”

신립은 말 많은 귀신이 들리기라도 한 듯 환도의 수십 가지 조건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1994년 LA에 있을 때 얘기까지 나올 것 같아 손바닥을 내보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크흠, 흠.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흥분한 건 아는구만.

“제가 한 번 휘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신립은 을룡이 건넨 환도를 받아들고는 스릉, 상태를 확인했다. 마음에 들었는지 착, 집어넣고는 마당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후우. 깊은 호흡을 내쉬더니 촤락! 단숨에 환도가 뽑혀 나왔다. 번개 같은 발도였다. 신립은 이어 사방으로 환도를 내질렀다.

매 일검에 공기가 찢어졌고 현란한 검무는 실로 하나의 춤과 다름없었다. 칼등을 타고 허공을 휘저어대는 환도는 그 자체가 한 마리의 독사였다.

물리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검무는 순식간에 끝났으며, 내질러진 환도의 도신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착!

신립은 멋들어지게 환도를 집어넣곤 말했다.

“나쁜 칼은 아닙니다만, 이것보다 더 좋은 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사가 약간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이던 신립. 하지만 그의 신기 들린 검무는 신립이 단지 딱지치기로 무과에 급제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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