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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4화 (1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4화

5. 형이 왜 거기서 나와?(1)

이제 스무 살쯤 되었을까. 굉장히 젊은 미청년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서찰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서찰의 내용은 청년을 지원해줄 터이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게 말직의 현실이겠지.”

청년은 올해 무과에 급제했다. 이른 나이에 관문으로 들어서서 스스로는 무척이나 뿌듯했지만 후폭풍이 만만찮았다.

특히 신참례(新參禮).

경국대전에서는 신래(新來, 신입)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자는 장 60대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이 법이 적용된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 또한 만만찮은 신참례를 견뎌냈으니 후배들 또한 그 고생을 겪어봐야 한다는 것이 선배 관리들의 쉰내 나는 지론이었다.

그 대가로 청년은 쌀 예순 섬의 빚이 생겼다. 주머니는 비었지만 선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무리한 탓이었다.

덕분에 신래 딱지는 떼었으나 빚쟁이 딱지가 새로 붙었다. 하지만 몸 고생을 더 하고 말지, 빚은 견디기 힘들었다.

녹봉이 한 해 열다섯 섬인데 빚은 한 해에 서른 섬 늘어난다. 숨만 쉬고 살아도 빚이 늘어나니 어쩔 방도도 없었다.

분명 청년은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다.

고조부는 공신, 조부는 형조판서.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스무 해 넘는 세월 동안 소과만 겨우 입격했을 뿐이었다.

식년시 외에도 수많은 증광시와 별시가 성균관 유생들을 위해 열렸지만 아버지는 그 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부유했던 집안은 아버지의 공부를 부양하다 단숨에 지역 유지도 못될 만큼 몰락했다.

세 자리를 찍었던 노비도 전부 팔아치웠고 ‘저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고 부르던 광대한 토지도 ‘여기에서 저기까지.’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쉽사리 대과를 포기하지 못하셨는데, 자신이 무과를 급제한 뒤에야 아버지께서는 유건(儒巾, 유생의 모자)을 벗고 성균관을 나오셨다.

이전까지는 무과를 준비하던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던 아버지다. 칼 따위 백정도 잡을 수 있다며 말이다.

그러니 자식의 무과 급제 따위, 대리만족도 되지 못하셨겠지.

아버지께선 단지 명분과 위안이 필요하셨던 거다.

자신은 대과를 급제할 그릇이 아님을, 그리고 가세는 날로 기울어감을 인지하면서도 그동안 허비해온 세월과 재산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이런 사정 탓에 청년은 집안에 빚을 호소하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상심하셨을 아버지를 더 상심시켜 드릴까봐.

그런데 시기적절하게 자신을 지원해주겠다는 서찰이 온 거다.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육십 섬 빚을 당장 변제할 수 있다면 굉장히 홀가분해지겠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

서찰에서도 자신을 도와달라지 않나.

고작 종팔품 감군(監軍, 야간 순찰 감독)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이야……. 이거 막상 보니 겁나는데.”

나의 손에는 환도가 들려 있었다.

칼집에서 나온 도신이 거울처럼 빛났다. 진검이다.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가벼운 이 미묘한 감각.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니 가죽을 두른 손잡이가 착 달라붙었다. 한 번 휘둘러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일렀다.

나는 조심스레 환도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착!

“일단은 필요하다셔서 구하긴 했는데, 환도가 도대체 왜 필요하신 겁니까?”

을룡이 물었다.

한창 공부하는 사람이 칼은 왜 찾는단 말인가. 누가 눈 밖에 난다고 베어버릴 사람도 아니면서 말이다.

어쩌면 철부지 같은 충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자님은 이팔청춘이었고 한창 멋있는 물건에 관심 있을 나이였다.

을룡이라고 다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을룡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칼이 필요하다면 멋 때문만은 아니다. 공자님은 장차 큰일을 하실 분.

혹여 공자님의 안위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칼을 들어야 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로 칼을 찾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공자님으로서는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적어도 을룡이 알기로는 말이다.

“적어도 내 한 몸은 지킬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제가 대신 칼을 배워서 공자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럼 너도 배우던가. 하지만 나도 배워야 해.”

원래는 스승인 김성일의 말을 따라 공부에만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최근 그가 전해준 소식도 있고 해서, 여유를 조금 가지기로 했다.

그래도 청개구리처럼 무과까지 급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든 건 아니라서, 호신에 필요한 환도와 활 정도만 배울 생각이었다.

“무슨 우려를 하시는진 모르겠으나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게 아닐는지…….”

“아니.”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건 과민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첫 침공부터 대규모로 시작되었고 조선의 대응, 명나라의 개입 등으로 빠르게 확전되어 백만에 달하는 군사가 한반도에서 어지러이 부딪혔다.

조선 개국 이래 지상 최대의 전쟁.

곁에서 칼 좀 쓴다는 사람 하나 붙어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래를 모르는 을룡으로서는 주인이 유난을 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주인의 혜안에 놀라게 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그 양반은 안 오려나.”

“서찰 보내놓은 그 사람이요?”

“응.”

“양반님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실 텐데…… 설마 공자님을 돕겠다고 할까요?”

“안 도우면 뭐 자기만 손해 보는 거지. 사람은 많으니 여유를 가지자꾸나.”

정철에게 도움을 청하니 그는 기꺼이 빚쟁이가 되어버린 무과 급제자들의 성명과 거처를 알려주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찾아가서 대신 빚을 갚아주고, 그 대가로 도움을 받으라면서 말이다.

목록은 의외로 길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급제자는 문무를 불문하고 절반은 파산한단다. 면신례란 몸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호주머니도 고생하는 거란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선택지가 많다는 뜻이었다.

나이가 가장 젊어서 부담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싶어 일단은 찔러보았으나, 꼭 그 사람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었다.

-쿵, 쿵!

그때 누군가 밖에서 대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일까?

“가보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가볼게.”

그동안 나를 대신해 허드렛일을 해온 을룡이었다. 마침 밖에 나와 있으니 꼭 을룡이 또 나를 위해 고생해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같이 가지요.”

기어코 나서겠다는 을룡이었다.

자기가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나. 나는 을룡과 함께 나아가 대문을 열었다. 끼이익.

이십대 초반의 미청년이었다. 닳은 도포에 색이 바란 갓. 그다지 부유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얼굴에는 강단이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사이지만 나에게 호감은 없는 듯 표정은 딱딱했다. 나오는 말 역시 딱딱했다.

“이 안에 어르신 계신가?”

“안에 어르신은 안 계십니다만.”

“어디 출타하신 겐가?”

“아니요. 출타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 집 주인이 바로 저니까요.”

“흠?”

청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듯 묵례하곤 발길을 돌렸다.

뭐야,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청년은 밖에서 서찰 하나를 펼쳐 읽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네가?’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찾는 사람이 혹시 저 아닙니까?”

“확실히 서찰에는 관광방(觀光坊) 서쪽에, 흰색 벽돌담이라고 쓰여 있네만…….”

“관광방에는 여기 말곤 흰색 벽돌담 집이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제가 부른 분 같으니, 하하.”

“아.”

청년은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폈다.

작은 별채, 인상적이지는 않은 행랑. 사랑채 바로 뒤로 보이는 안채. 겉보기엔 번듯하였으나 작다. 그다지 부유한 사람의 거처로 보이지는 않았다.

과연 이런 사람이 자신이 빚 육십 섬을 다 변제해줄 수 있을 것인지…… 청년은 의심스러웠다.

애초에 도움을 주겠다는 서찰을 받은 것부터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찰을 보낸 사람이 자신보다 어린 지학임을 알게 되자 더더욱 자존심이 상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예의범절은 차치하고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자네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예.”

“그 대가로 나 또한 자네를 도와야 하고.”

“그렇습니다.”

“만일 내 선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도와줄 용의가 있네. 하지만 나는 자네가 자네의 선 안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군.”

“빚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래.”

“얼마나 됩니까.”

마치 그깟 빚, 있으면 얼마냐 되겠냐는 투였다.

그럼 그깟 빚에 끙끙대고 있던 청년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래서 청년은 강조하듯 말했다.

“정미로 ‘육십’ 섬이네.”

“알겠습니다. 저에게 도움을 주겠다 약조만 해주신다면 댁으로 육십 섬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청년은 어이가 없었다.

한두 섬도 아니고 자그마치 육십 섬이다. 도성에서 가까운 지방에서 기와집을 한 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

그런데 갓 지학이 되었을까 싶은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육십 섬을 내주겠다고 한다.

허! 속으로 탄식한 청년이었다. 보아하니 아비의 기대를 업고 도성으로 상경한 모양인데, 어린 나이에 홀로 상경한 점은 대단하게 봐줄만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당장은 재산이 있다고 육십 섬을 가볍게 생각하나본데, 이건 분명히 적지 않은 돈이네. 내준다면 고맙겠지만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걸세.”

어차피 청년으로서도 자신보다 어린 녀석에게 머리 숙이며 도움을 청하고 싶지는 않았던 바다.

하지만 그 어린 녀석이 해주는 말은 의외였다.

“사람에게 투자하겠다는데, 육십 섬 정도면 싸게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자신의 가치를 육십 섬만도 못하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그건…….”

“제가 건네려는 육십 섬의 가치를 걱정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귀공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신가.”

“제가 드리는 사소한 도움을 발판 삼아, 귀공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저로서는 그 훌륭한 사람의 도움을 고작 육십 섬으로 받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남는 장사지요.”

청년은 더 따지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를 고작 자신보다 어린 지학이라 깔볼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편이 나으리라.

청년은 지학의 나이에 이만한 심적 성취를 이뤄냈던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라도?

전혀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자기보다 어리다며 내심 깔보고 있지 않았던가.

뭇 사람들은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을 이 시대의 참선비로 꼽았다. 청년은 남들이 그러니 그렇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청년은 무릎을 꿇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도포가 더러워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청년은 고작 낡은 옷 한 벌로는 절대 느끼지 못할 충격과 깨달음을 얻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일어나세요.”

청년의 뜬금없는 태세전환에 놀란 것은 나였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굉장히 아니꼽다는 태도로 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어버리는 건 또 뭔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청년은 건네주는 손을 꼭 쥐며 일어났다. 그리곤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제가 마음이 심란하여 선생님을 그릇된 태도로 대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 아닙니다. 갑자기 선생님이라고 부르실 필요도 없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려야지요.”

청년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 꼭 쥐고만 있더니 어렵사리 답했다.

“감사합니다.”

“예…….”

“저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일신의 무용을 기르려 합니다. 저와 저 친구에게 무예를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을룡을 가리키자, 을룡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도 말입니까, 공자님?!”

“칼 배워서 나를 지켜주겠다며.”

“그, 그리 말하긴 했지만요…….”

“칼 휘두를 일 있으면 나 혼자 휘두르는 것보단 둘이서 휘두르는 편이 더 승산이 있지 않겠어?”

“……예. 그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배울 수만 있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청년은 깜짝 놀랐다.

공자님! 평소에는 들을 일이 없는 극존칭이었다.

역시 눈앞의 젊은 사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에 얼마나 덕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지학의 나이에 공자님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청년은 잔뜩 감화되어 물었다.

“저도 선생님을 공자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아니……, 어느 쪽이냐고 하면 선생님 쪽이 더 부담스럽긴 한데…….”

“그럼 앞으로 공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예, 예에…….”

“아! 아직 저를 소개드리지 않았군요. 저의 이름은 신립(申砬)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자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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