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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11화 (1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11화

3. 지금 만나러 갑니다, 스승님(2)

-툭, 툭, 툭…….

명종은 손가락으로 서안을 때리고 있었다.

한때는 부드럽고 생기 있었던 손가락이다. 하지만 지금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 마치 실에 걸린 나무토막처럼 억지로 움직이고만 있을 뿐이다.

근래 들어 명종은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사람은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어떤 감정을 느끼나? 고통스럽지는 않은가?

과거에 죽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사후세계는 실재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할 때마다 부왕 중종대왕과 형왕 인종대왕의 모습이 눈에서 가시지 않았다.

각기 앓은 병은 달랐지만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보여준 모습은 같았다.

나의 모습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이제 와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죽음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신하들의 말로는 며칠 동안이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기억은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단지 며칠이 흘렀을 뿐이었다.

사후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일까? 오직 그런 우려만이 명종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가 가진 미련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열셋의 어린 나이에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버린 순회세자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전하.”

방문 너머에서 내시가 말했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입시이옵니다.”

이복형인 덕흥군의 세 아들들이었다.

명종이 그들을 부른 이유는 분명했다.

본인이 죽는 것이나, 사후에서라도 요절한 아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길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이다.

나라의 일에 비하자면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또한 만일을 대비해 양자를 들여 달라 간청한 마당이다.

‘만일을 대비하라.’

사실상 왕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뜻하는 발언이었다.

충분히 정적들에게 공격당할 빌미가 될 수 있었고, 일이 잘못 될 경우에는 국문 이상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준경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가 상념에만 빠진 채 나랏일을 방치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명종은 중전을 찾아갔다.

중전은 명종이 자신의 죽음을 이미 납득했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그리고 양자를 들이자는 명종의 말에 동의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답만 남긴 채 명종을 배웅했다.

그것으로 최후의 만남이 될지도 몰랐기에 명종은 무척이나 아쉬웠으나, 중전은 어울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명종 그 자신을 대신해 명종의 죽음을 극구 부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하.”

내시가 보챘다.

“미안하네. 근래에 들어서 사람이 많이 멍해졌어.”

“아, 아니옵니다. 무례를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죄라니……, 하하. 되었다. 상선은 개의치 말라.”

명종은 힘없이 웃었다.

“세 사람에게 들라 하라.”

“예.”

-드르륵.

정면의 문이 열리며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이 들어섰다.

세 사람은 허리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명종은 팔을 내밀어 자리를 권했다. 세 사람은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내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한 가지 장난이 하고 싶어서다.”

하원군과 하릉군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장난이라니? 다 죽어가는 왕이 방정맞은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성군만 무덤덤할 뿐이었다.

명종은 삐걱거리는 팔을 옮겨 익선관을 내려놓았다. 달칵. 왕의 머리를 한평생 무겁게 짓눌러왔던 모자치고는 가벼운 소리였다.

이제는 명종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익선관은 자신의 무게를 감내할 수 있는 후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원군은 익선관을 써 보라.”

명종이 말했다.

하원군은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익선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머리에 얹었다.

“앗.”

익선관이 흘러내렸다. 하원군의 머리가 큰 탓이었다.

“잘 맞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하릉군이 써보겠느냐?”

“예.”

하릉군이 익선관을 받아 썼다. 푸욱. 익선관이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지 거의 눈썹이 가려질 지경이었다.

“너에게도 잘 맞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하성군이 써보겠느냐?”

하릉군이 익선관을 벗어 건넸다. 하성군은 익선관을 받아들고는 주저하더니, 자신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어찌하여 쓰지 않고?”

하성군이 답했다.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어찌 신하된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음. 그렇구나. 내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하느냐?”

“임금과 아버지는 각기 다르지만, 충과 효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

명종은 빙긋 웃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알겠다. 관은 가져가거라. 이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성군이 놀란 얼굴로 명종을 바라보았다.

허락 없이 감히 용안을 올려다보는 것은 지극한 무례. 하지만 명종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는 왕이 아니었으니까.

명종은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성군은 어쩔 줄 몰라했지만, 결국 명종의 뜻에 따라 익선관을 챙겨 물러났다.

-드르륵. 탁.

그렇게 세 사람이 물러났다.

-툭, 툭, 툭…….

명종의 거처에 다시 서안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참이나.

그로부터 2년 뒤, 명종은 병세가 악화되어 경복궁의 소침전(小寢殿)인 양심당으로 이어되었다.

뒤늦게 어의와 대신들이 소침전 앞에 모였지만 손쓸 방도는 없었다. 이미 명종은 의식을 완전히 잃고 인사불성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고작 다음날 축시(丑時, 오전 1시~3시) 새벽, 명종은 조용히 승하했다.

그리고 다섯 일이 지나.

수십 년 명종을 모셔왔던 내시가 궁궐 지붕으로 올라갔다.

“상위복(上位復, 임금님 돌아오소서)!”

내시는 연신 상위복을 외쳤으나 응답은 없었다. 내시가 곤룡포를 바람에 내던지자, 한참이나 펄럭거리며 떠있던 곤룡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명종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당일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던 하성군 이연이 후왕으로 즉위했다.

4개월 전의 일이다.

이제 대전(大殿)에는 명종이 아닌 이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막 지학을 넘긴 젊은 그였지만 포부는 작지 않았다.

절대왕권.

선대왕은 척신들에 의해 치세 내내 해초처럼 흔들리기만 했다. 왕으로서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이는 없었으며, 단지 자리만을 지켜왔던 왕은 이제 묘소 하나를 차지한 채 잊히고 있었다.

이연은 그 추태를 자신이 반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전하.”

내시 이충방(李忠邦)이었다. 선대왕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자였다.

“무슨 일이냐.”

“심(沈)이 고향에 도착했다 합니다.”

“잘 됐군.”

심(沈). 정확히 말하면 심통원(沈通源)이다.

선대왕 시절 삼흉(三凶)으로 일컬어지던 척신 중 하나로, 머리는 좋았으나 천성이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자였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음에도 이를 자기 보신에만 쓰는 전형적인 소인배.

그는 영의정 이준경과 갈등하였다. 그래서 이준경이 선대왕에게 양자를 들이라고 청할 때 극구 반대하며 이준경의 처벌을 청했다.

그러나 선대왕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나라를 위한 최선을 선택했다. 이에 심통원은 앙심을 품고 하성군을 견제했다.

하지만 보라.

그의 성인 심(沈)이 가라앉는다는 뜻 그대로, 한때는 말 한 마디로 나는 새마저 떨어뜨렸던 심통원의 권세는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연의 치세가 시작되기 무섭게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난 것이다.

왕을 거스른 대가였다.

이연은 자신의 역할에 빠르게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전하. 낮것상 들이겠사옵니다.”

“들라 하라.”

윤허가 떨어지자 지긋한 상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이연의 앞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달칵.

* * *

“국수입니다.”

“귀한 음식이로군.”

김성일이 반응했다.

그는 젓가락을 놀리기 앞서,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국수를 들고 있었다.

후룩, 후룩, 후룩…….

이따금 크아! 하는 감탄도 터져 나왔다.

의관이나 행색이 추레하여 누가 보더라도 노비인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노비에게 국수를 대령하지는 않는다.

제자가 노비를 해방했다고 했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마침 좋은 주인에 대한 말이 나온 터라 농담이겠거니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보라.

“아니 드십니까?”

“아, 아닐세. 일단 먹지.”

김성일은 국수를 들었다.

조용히 한 젓가락 입에 넣은 김성일은 저도 모르게 채신없이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국수 한 사발을 비웠다.

대접에는 미처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오이채와 미역 몇 조각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더 가져오라 할까요?”

“아, 아닐세. 맛있었네만 더 먹었다간 정말로 저녁밥을 들지 못하게 될 것 같군.”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먹어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모두 잘 먹고 잘 살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점잖 빼면 손해죠.”

“자네 말이 맞아. 알았네. 한 대접 더 부탁함세.”

김성일의 밥상에 국수가 한 대접 더 놓였다. 김성일은 물마시듯 국수를 비워버리고는 배가 불렀는지 뒤로 늘어졌다.

“으.”

“괜찮으십니까?”

“잠시 쉬어야겠어.”

“식사한 직후에 누으시면 속 버리는데요.”

“…….”

김성일은 끙, 하며 일어나 기둥에 기댔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정말로 노비들을 다 해방했나?”

“예.”

“왜 그런 건가? 어차피 노비들은 당장 재산이 없어서 자네 집 외에서는 일할 곳도 없는걸. 도리어 세금만 늘잖나.”

16개월마다 오승포 두 필.

평민이라면 재산의 유무와 관련 없이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이라, 인두세(人頭稅)라 불렀다. 사람 머리 따라서 내는 세금이라는 뜻이다.

“세금 조금 더 내서 사람을 노비 처지에서 구해주면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네. 노비들 대다수는 처음부터 노비로 태어난 자들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면, 굳이 해방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겐가?”

“만일 밖에서 아무개를 보았다 칩시다. 관복을 입고 있고, 품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관직이 높지만 항상 겸양하여 뭇 사람들이 존경하지요. 이 사람은 노비입니까?”

“그렇지는 않겠지. 노비는 관원이 될 수 없으니까.”

“제가 말한 사람은 반석평(潘碩枰)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의 표상이라 잘 알고 있었다. 왜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싶은 모범이 있잖은가. 나에게는 반석평이 그러했다.

그는 중종 대의 인물이다.

본래 노비로 태어났으나 총명한 자질이 있어, 주인은 반석평을 해방하고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학문을 닦을 수 있게 해주었다.

훗날 반석평은 대과에 급제하는 것으로 주인의 배려와 신뢰에 보답하였다. 당대 관리들은 천민 출신임을 트집 잡아 탄핵하였으나, 반석평은 이러한 족쇄를 차고도 육조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신분이란 건 환상입니다. 먹물로 몇 자 끄적인, 다 삭아가는 종이가 인간의 본질을 정의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김성일은 기분이 오묘해지는 걸 느꼈다.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원래 사고의 지평이 넓어질 때는 몽롱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그는 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엿한 선비로 자라왔다. 노비들이 상전의 수발을 드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고, 거기에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제자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노비들의 신분을 규정하는 것은 그들을 노비라 밝히는 문서다. 그것이 없으면 노비를 부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본질이 노비문서에 있다는 뜻인가?

실제로 그렇다면, 나의 이름으로 그런 문서가 생겼을 때 순순히 굴종할 수 있을까. 고작 문서 한 장 따위가 나와 내 자손들의 미래를 속박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으음.”

김성일은 침음을 흘렸다. 난데없이 무거운 화두가 떠안겨진 기분이었다.

“여기서는 확답하지 못하겠네. 가볍게 대답을 해서는 안 될 문제인 것 같아.”

“사람은 누구나 직감적으로 정답을 압니다. 단지 일신의 안녕을 위해, 합리화를 이성적인 판단이라 포장하며 굳게 외면할 뿐이지요. 그것에 당당해지면 사람이 뻔뻔해진다고들 합니다.”

“……자네 나이 속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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