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9화
2. 북촌에서 유명한 이순신(4)
이른 밤.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다들 저녁밥을 들고 한숨 자려는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들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소리가 있었다.
-둥기덩, 둥당!
그것은 연회의 소리였다.
게다가 집 앞을 거니는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고기 냄새까지!
연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입맛만 다시며 길을 재촉했다. 이들을 거슬러 연회 장소로 향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의 이웃들이었다.
이제 막 이순신의 저택을 방문한 이는 거의 환갑에 다다른 노인이었다. 왕년에는 잘 나갔던 사람이었는지, 눈은 탁해도 눈빛이 살아있었다.
솟을대문을 넘어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번에 이사 온 새 이웃이로군.”
“예에, 어르신. 전주 이가의 순신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노인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안쪽의 연회자리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색지(色紙, 색종이)를 입힌 좌등(坐燈, 바닥에 두는 등)이라니. 어른들 모시는 자리에 너무 자극적이지 않나? 기방도 아니고…….”
색지 입힌 좌등을 까는 건 송강의 아이디어였다.
원래 이런 색 입힌 등을 주로 쓰는 곳은 기방이었다. 단적으로 표현해, 기방이 있는 거리를 홍등가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런데 송강은 도리어 그 점을 노렸다고 했다. 이번 자리가 단순한 술자리가 되어서만은 이웃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없단다.
뭐, 전문가는 내가 아니라 송강이니 믿고 따를 수밖에.
“송구합니다. 단지 어른들께 저의 기운을 나눠주고 싶었을 뿐인데, 기력이 넘쳤나봅니다. 다음에는 자제할 터이니 귀엽게 봐주십시오.”
미리 외워두었던 말을 읊으니 노인은 기분이 많이 누그러졌는지 흠, 하고는 안으로 입장했다.
안내는 을룡이 맡았다.
녀석은 노인을 모시고 대청 위까지 안내했다. 노인이라고 눈이 삔 것은 아니지만, 손님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탓이다.
즐기고 마시며 노는 주연이라도 위아래는 분명해야 하는 법. 나는 조사를 통해 손님들이 앉을 자리를 미리 정해두었다.
이 역시 송강의 조언대로였다.
“안 늦었지?”
그때 익숙한 얼굴이 문간을 넘어왔다.
송강이었다.
“마침 형님 생각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맞춰 오시네요?”
“내 기세가 범과 같긴 하지. 하하.”
“안으로 듭시죠. 형님이 마지막 손님이었습니다.”
“아! 늦어버렸군. 내가 원래는 안 이러는데.”
송강은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대청에 올라섰다. 그러더니 상석 바로 오른편에 앉았다.
손님 자리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유일하게 관직을 지내고 있는 손님을 위한 자리였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송강은 무려 정육품 병조좌랑!
나의 스승인 김성일이 지내는 승문원 부정자보다 더 높은 위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노인들은 은근히 불편한 표정으로 송강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녀석이 뒤늦게 도착한 주제에 상석에 앉느냐는 투였다.
그러자 송강이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병조좌랑을 지내고 있는 연일 정가의 철입니다.”
“아.”
송강, 아니 정철의 소개에 어른들이 즉시 납득했다.
서양의 귀족과는 달리, 양반가에는 분명한 제약이 있었다. 삼대 내내 관직을 지내지 못하면 특권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매 시험마다 수만 명의 선비들이 응시하지만 가문의 특권을 보장받는 자는 고작 백 명 남짓. 그중에서도 격이 높은 대과 합격자만이 서른 초반에 병조좌랑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철이라고요?”
내가 역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해도 정철은 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 아닌가!
정여립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선비들이 숙청당했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 부르는데, 이를 주도했던 자가 바로 정철이었다.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그의 호(號, 이름 대신 편히 부르는 호칭) 역시 송강(松江)이었다.
“허? 방금 듣지 않았나. 정철 맞네. 무슨 귀신이라도 본다는 얼굴을 하는군.”
나는 진심으로 놀랐는데 정철은 별것 아니라는 듯 씩 웃고 말았다.
“아닙니다. 형님의 성명은 모르고 있어서요. 이런 자리에서 갑자기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 나도 언젠가는 알려줘야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그래도 연연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우리 둘이서 따로 자리를 가져보자고.”
“……예에.”
잡담은 여기까지. 손님들을 불러놓고 나와 정철 사이에서 잔말이 많았다.
나는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도성에 상경했고, 아직 배워야할 것이 많습니다. 혹 실수를 하더라도 귀엽게 봐주시고 조언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은 인사였다.
손님들은 각자의 잔을 들어 화답해주었다. 나 역시 잔을 들었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술잔을 기울였다.
“크으.”
“음!”
첫 잔부터 손님들 반응이 좋았다.
꿀과 약재를 넣어 만든 청주다. 애피타이저로 내놓은 구절판(九折坂)과 맞춘 술이었다.
본래 구절판이란 생야채, 또는 가볍게 조리된 나물들을 전병에 싸서 먹는 음식. 자극적이지 않아 배에게 신호를 주는데 최적이었다.
이런 애피타이저 음식의 약점이 있다면, 자칫 맛이 심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단맛과 향이 있는 반주였다.
“들만 하십니까?”
대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썩 괜찮군.”
“마음에 드네.”
반응은 싱거웠지만 다들 지긋한 나이다. 호들갑 떨 나이는 한참 지났지.
노땅들을 대신해 정철이 엄지를 올렸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말이다. 그 역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좋은 음식, 좋은 분위기.
몇 잔씩 돌아가자 꾹 닫혀있던 손님들의 입이 차차 열렸다.
“자네는 전주 이가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까운 전하가 뉘신가?”
“태종대왕이십니다. 저의 칠대조 되시는 분이지요. 육대조는 양녕대군입니다.”
“아. 그렇군.”
다른 손님이 물었다.
“어쩌다 혼자서 도성으로 올라왔나?”
“부친께서 기대가 많으셨습니다. 스승님 문하에서 공부하라며 도성에 집을 마련해주셨더라고요. 부모님 곁과 정든 고향을 떠나오니 기분이 삼삼합니다.”
“공부를 잘 했나보군?”
“저 스스로는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도성에서 저만큼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바른 마음가짐일세. 젊을 때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기 마련인데 말이야.”
“앞으로도 겸손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는 술상에 놓인 음식도 바뀌었다. 달콤짭짤한 갈비찜에 맑은 청주였다. 본격적인 분위기가 되자 손님들은 연신 젓가락을 놀렸다.
문득 손님 하나가 물어보았다.
“기녀들이 있었으면 좋을 뻔했네만, 허헛!”
처음 저택을 방문하면서 여기가 기방이냐며 투덜댔던 노인이었다. 막상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도 좋으니 제가 한 말도 까먹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기녀는 없습니다.”
“아쉽군.”
“대신, 제가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환상의 똥꼬쇼!
나 역시 노인 못지않게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취하면 자제력이 흐려지는 법.
나는 술상을 앞으로 밀어내곤 일어섰다. 그리고 풀린 허리춤을 정리한 뒤, 둠칫둠칫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다.
손님들에겐 정체모를 몸짓이었지만 기교가 들어가자 다들 눈이 반짝였다. 종내에는 내가 몸을 삐걱거릴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400년 시공을 넘어선 홍대 팝핀황제의 화려한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