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화
2. 북촌에서 유명한 이순신(3)
인싸 송강은 나의 방문을 반겨주었다.
짧은 소개가 오간 뒤, 송강은 귀한 손을 세워둘 순 없다며 사랑방을 안내했다.
방문을 넘어서니 가지런한 내부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니멀 인테리어라 하던가? 최대한 덜어내고 꼭 필요한 가구와 족자 한 점만 남긴 방이 무척이나 깔끔했다.
“이야!”
나의 감탄에 송강이 물었다.
“내 방이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들다 뿐이겠습니까. 정말 감각이 좋으십니다!”
“그런가?”
“덜어내고 덜어내서 남은 것이 족자 한 점, 그것도 대나무 그림이라. 어른께서는 검약과 절의를 높게 사시지요?”
“하하! 고작 방 하나 둘러보았다고 사람 마음을 읽어버리는가?”
송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가 썩 마음에 들었다는 듯,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를 어른이라고 불러줄 필요 없네. 보아하니 자네는 이제 지학 안팎으로 보이는데, 식견도 괜찮고…… 편하게 형이라 불러주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리 해주게. 자네랑은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호방한 발언이었다.
초면에 형이라 부르라니. 역시 잘 노는 사람다운 친화력이었다.
“원하시니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좋아, 동생! 동생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았나?”
“제가 며칠 전 관광방(觀光坊)에 이사를 왔는데, 도리 상 이웃 어른들께 떡도 돌리고 그래야지 않겠습니까?”
“암!”
“하지만 떡 몇 점 돌려서는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연(酒宴)을 거하게 벌이고 싶은데, 제가 언제 진탕 놀아본 적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내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로군?”
“맞습니다. 잘 찾아왔지요?”
송강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주 제대로 찾아왔네! 내가 또 주연이라면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가 아닌가? 게다가 이웃 사람들에게 대접이라니, 아주 좋은 일 하겠다는데 내가 당연히 형 된 도리로서 도와주어야지!”
“그리 해주시렵니까?”
“물론이네! 하지만……!”
송강은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이다, 씨익 웃었다.
“나도 초대해줘야 해.”
“물론이지요! 귀한 도움 주시겠다는데 초대 한 번 못 해드리겠습니까? 두고두고 초대해드려야지요!”
“하하하!”
송강은 생각보다 훨씬 호쾌한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좋게 끝난 참이므로, 나는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송강이 붙잡았다.
“달리 해주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동생, 주연을 열기 좋은 길일이 바로 언제인지 아나?”
“흠……. 정해진 길일이랄 게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만한 날은 있지요. 휴일 전날, 퇴근 후 아니겠습니까?”
“정확하네! 그리고 바로 모레가 휴일 아닌가?”
“설마, 바로 내일 주연을 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였다.
바로 내일!
어디 대학생들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내일 콜?’이라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격의 없는 술자리가 아니었다.
북촌은 대감님과 영감님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다들 지위도 있고 호주머니도 두둑한 만큼, 허접한 술자리는 대접이 아니라 도리어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아저씨 아줌마들 송년회 준비도 며칠은 걸리는데 어른들 대접하는 자리를 바로 하루 만에 한다니…….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나에게는 자칭 술자리 전문가인 송강이 있으니까!
“좋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하지요!”
“그래, 그래. 원래 술자리는 빨리 잡고, 빨리 끝을 봐야 해. 약속을 한참 뒤로 잡거나 차일피일 미루기라도 한다면 김이 얼마나 새는지 아는가?”
“잘 알지요.”
“일단 한 잔씩 하고 준비하자고. 이 형님께서 직접 주연을 어떻게 여는지 지도해주겠네.”
“기대하겠습니다.”
“좋아! 무릇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술로 축하를 해야 하는 법이지!”
송강은 방문을 열곤 외쳤다.
“주안상 둘 들이게!”
그러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밖에서 주안상이 준비되었다며 알렸다. 고작 반각도 안 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주인이 얼마나 술상을 좋아하면 이렇게 빠르단 말이냐. 역시 노는 사람의 집은 노복들도 달랐다.
술상은 각자 앞으로 하나씩. 송강은 친절하게도 손님을 두고 직접 술상을 옮겼다.
“자네는 술을 어떻게 마시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술이야 술술 마시지요.”
“하!”
송강은 웃음을 팍 터뜨리고는 답했다.
“그것도 옳지만 내가 물어본 건 무슨 안주를 곁들이냐는 것이었네. 같은 술이라도 어느 안주와 곁들이느냐에 따라서 맛이 천지차이로 갈리지 않던가?”
“그야 그렇지요.”
나는 국민 안주인 모둠 소시지를 좋아한다. 입안에 달콤한 기름기가 감돌 때 차가운 맥주 한 잔 들이키면…… 으아아!
하지만 소시지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기름진 쪽을 좋아합니다. 크, 배도 채우면서 살살 넘어가는 술의 청량감이 배가되니까요.”
“쯧쯔. 전형적인 초보의 안주로군. 진정 주당이라면 말일세……, 아. 일단은 잔부터 채워야겠군. 한 잔 받으시게.”
송강이 주발을 들었다. 그러자 술 냄새가 확 올라왔다.
조르륵. 술잔이 채워지자 나는 잔을 살짝 들었다. 이번에는 나의 차례였다. 잔은 놓아두고서 주발을 들었다.
그런데 송강은 술잔을 들지 않았다. 그가 잔이랍시고 들이민 것은 물대접이었다.
“진심으로, 거기다 술을 받아서 드십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술 마신다고 할 수 있는 걸세.”
“이야.”
나는 감탄과 함께 주발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반병이 물대접에 부어졌다. 술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송강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잔을 바라보고는 외쳤다.
“자, 건배!”
“건배!”
잔과 대접이 부딪혔다. 술이 세숫물처럼 철렁대는 꼴을 보니 나의 도자기 잔은 애들 장난이었다.
약간 상하려는 자존심을 애써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려는데 송강이 다급히 불렀다.
“자, 자. 보게!”
의아해하는데 송강이 술상의 종지를 쿡 찍었다. 송강의 손가락에 새하얀 결정이 묻어났다.
설마 하는데 송강이 설마로 사람을 잡았다.
“진미를 맛볼 때는 소금만 쳐야한다는 말, 들어보았나?”
“와…….”
송강은 소금결정을 혀 위에 뿌려두고는 술대접을 기울였다. 꿀럭, 꿀럭, 꿀럭. 그는 막걸리도 아닌 청주를 대접째로 들이켰다.
진한 술 냄새로도 느껴지지만, 조선의 술은 도수가 높다. 고량주를 마시는 중국에서도 ‘동국(東國, 조선)의 술은 중국 것보다 배는 독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송강은 그 독한 술을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들이켜고 있었다. 그야말로 주당, 아니 주신(酒神)!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마시면 사람 죽습니다, 형님!”
송강은 주신다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원래 술은 죽자고 마셔야 되는 거야!”
“……하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사람이 이래서야 술자리 전문가가 안 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