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화
2. 북촌에서 유명한 이순신(2)
나는 한 무더기 종이를 든 채 목소리를 바꾸며 놀고 있었다. 콘셉트는 사람을 조종하는 사악한 종이와 이를 징벌하려는 정의의 사도다.
“으악, 살려줘요!”
“어디 감히 목숨을 구걸하느냐!”
“나는 무고한 사람을 계속 노예로 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
“그만! 이제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집안 노복들의 시선은 정말 미친놈을 본다는 투였지만, 동시에 굉장히 진지하기도 했다.
내 손에 들린 종이들은 노비문서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전락시킨 사악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단죄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종이뭉치를 화로에 내려놓았다. 노비문서는 순식간에 불이 붙어, 이글이글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좋아. 사악한 물건이 없어졌군.”
내가 손을 탁탁 털자 노비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화로를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탄 노비문서들이 열기에 흔들렸다. 팔랑팔랑. 그러다 조각조각이 나 허공에 흩날리며 노비문서가 완전히 사라졌다.
재산 가치로 따지면 족히 집문서나 땅문서와도 견줄 수 있는 노비문서들이다.
그런데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노비문서들을 태워버렸다. 고작 한두 개도 아니라, 집과 땅에 딸린 노비들의 문서 모조리 말이다.
“공자님?”
“왜, 을룡아.”
“정말로 노비문서를 다 태워버리신 겁니까요?”
“내 평소 신용이 어떠하기에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거야?”
“어어……. 감사합니다?”
“너나 자네들 모두 자유의 몸이니까, 여기 집에서 나가고 싶다면 나가도 좋아. 그래도 당장은 재산이 없을 터이니, 당분간은 일하는 게 좋겠지.”
나의 말에 노비들이 웅성거렸다. 을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분간 일한다니……, 혹시 새경을 주시는 겁니까?”
“그럼 안 주고 부리랴. 요즘 한 해 새경의 시세가 어떻더라? 금천 집에서도 머슴을 몇 부렸는데 알아둘 걸 그랬다.”
“아, 아니 주셔도 됩니다요. 대대로 노비 신세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새경까지 달라고 하면 도적질밖에 더 되겠습니까요?”
의외로 여기에 태클 거는 노비, 그러니까 ‘전’ 노비들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기껏 평민으로 만들어주었는데도 말이다. 고작 종이 몇 장 태우는 것으로는 와 닿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을룡아. 사람이 고생해서 일을 했는데도 삯을 안 쳐주는 게 도적질이야.”
“그, 그렇습니까요?”
“새경 시세나 말해 봐.”
“한 해에 한 섬쯤 됩지요?”
“좋아. 올해는 이미 반 년 지났으니까 정월에 반 섬 주고, 다음 해마다 한 섬씩 줄게. 괜찮지?”
“괜찮거나 말 것두 없구…… 쇤네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뿐입니다, 공자님.”
노비들이 앞 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불태워진 것은, 자신들의 혈관에 타고 흐르는 피에 ‘노비의 신분’이라는 무형의 사슬을 건 노비문서였다.
문서 자체는 고작 한두 섬 쌀에 오가지만 문서가 가진 힘은 매우 막강했다. 노비가 주인의 자비를 얻지 못할 경우, 노비가 면천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전쟁이라도 나서 공을 세우지 않고서는 면천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종대왕 치세에는 어느 외거노비가 삼천 섬의 쌀을 조정에 바친 뒤에야 겨우 자식들만 면천시킬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노비문서의 힘과 무게였다.
그런데 주인은 노비문서를 태워버리고는 새경까지 주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더 바라는 것은 도적놈도 못할 짓이었다.
“억새야, 부탁한 옷을 가져오겠니?”
나는 젊은 여자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지학(志學, 15살)쯤 되었을까.
억새는 꽃다운 나이에 맞지 않게 바느질 솜씨가 정말 좋았다.
난생처음 비단을 맡게 되어서인지 겁을 많이 냈는데, 나는 억새의 실력을 믿었다. 일부러 옷감을 상하게 할 아이도 아니었고 말이다.
“잠시만 기다리셔요. 가져오겠습니다.”
억새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도도도, 행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금방 진녹색의 비단 도포를 가져와 바쳤다.
“고생했다.”
“아, 아닙니다. 공자님.”
나는 쪽마루에서 일어나 도포를 펼쳤다. 촤라락, 하고 도포가 펼쳐졌는데 겉만 봐도 정말 때깔이 좋았다.
항상 입던 하늘색 도포보다 훨씬 더 멋있는걸. 촉감도 야들야들한 것이 이불삼아 덮고 자도 될 정도였다.
물론, 주인은 따로 있었다.
“을룡아!”
“예, 예!”
“올라와서 한 번 입어봐라.”
“…….”
을룡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도포를 공손히 받아들고선, 입고 있는 옷 위에 걸쳐 입었다.
때깔 좋은 도포를 입으니 사람이 달라보였다. 이전에는 얼빵한 몸종이었는데 지금은 집주인에게 총애 받는 식객처럼 보였다.
“자,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요.”
“잘 어울리기만 한데, 뭐.”
새파랗게 질린 을룡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너는 오랫동안 날 보필해왔으니까, 머슴만 하기에는 경험이 아까워. 식객으로 쓸 테니까 고생 좀 해.”
“아, 아닙니다요! 앞으로도 한 목숨 바쳐 공자님을 뫼시겠습니다요!”
“그래, 그래. 이제는 말끝마다 ‘요’자도 빼고.”
“아, 알겠습니……, 다!”
“네가 내 얼굴이야. 마음 단단히 먹고. 이제는 노비도 아니니까 사람들 앞에서 쫄지 마! 함부로 허리 숙이지도 말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뭔지 알겠어?”
“……으음, 아! 안국방에 사는 송강이라는 사람에게 공자님의 방문 의사를 전해주는 겁니다!”
“가 봐. 옷 마저 갈아입고.”
“옛!”
을룡은 명을 받들고는 행랑으로 달려갔다. 아직 어수룩한 감이 있지만, 어리니까 금방 처신하는 방법을 배울 거다.
노비 신세에서 해방되어 이제 머슴과 식모가 된 이들은 을룡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노비가 하루아침에 비단옷을 걸치게 되다니.
그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크게 쓸 테니까,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저, 정말이십니까요?”
“정말이야. 나에게 보답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평소에 잘 따라주는 것도 좋지만 진짜 보답은 능력을 갈고 닦아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는 거야. 앞으로 새경이 주어지니까 잘 활용하라고.”
“예!”
머슴과 식모들이 힘차게 답했다.
* * *
송강은 나의 방문 의사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래서 그의 저택이 있는 안국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단지 잘 논다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규정할 수 없지만, 도성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논다면 좋은 인상을 주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그가 양아치라면 상대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의외로 사람 천성이 좋아서 편하게 대화가 오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저택에 도착했다. 내가 을룡에게 시선을 주니, 을룡이 눈치껏 대문으로 나아가 두드렸다.
-쿵, 쿵.
묵직한 울림이 있었고, 곧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제 30대쯤 되었을까 싶은 노복이 나타나 인사를 올렸다.
“혹시, 일전에 연통을 주셨던 분이십니까?”
“맞네.”
“몰라 뵈어 송구했습니다. 안으로 듭시지요.”
노복이 비켜주자 저택의 전경이 나타났다.
나의 접근을 미리 전해들은 것인지, 송강은 이미 쪽마루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들고 있었다. 씨익, 하는 미소와 함께 말이다.
꽤나 인싸(insider) 느낌을 풍기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