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화
1. 내가 왜 이순신이죠?(2)
“장군님께서 오셨다!”
마을 아이들이 환호했다.
다들 면식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자주 마주치지는 않아도 한 마을 안에서 사니 얼굴 볼 일이 아주 없지는 않거든.
전쟁 준비는 이미 마친 채였다.
조잡함의 한계를 시험하는 나무칼들, 단지 긴 막대기에 불과할 뿐인 나무창까지. 더러는 조막만한 손에 꼭 들어오는 자갈까지 들고 있었다.
매우 안전한 놀이가 되겠군.
그런데 무언가 어색했다.
“흐음…….”
이게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데, 없는 느낌? 애매한 부재감이 신경을 살살 긁었다.
아.
“검불이가 없구나?”
검불.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머니가 본가에서 가져온 반짇고리를 부뚜막에 태우거나 기르던 닭을 밖에까지 데리고 다니다 잃어버리거나.
녀석은 비슷한 말썽꾸러기들과 서리하는 건 기본이었고, 늑대를 기르겠다며 산을 찾았다가 길을 잃어 마을 사람들 전체를 고생시킨 적도 있었다.
아이들은 원래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이지만 검불이는 더 그랬던 셈이다. 꼬맹이 중에서도 상꼬맹이랄까.
“그 녀석 성격에 전쟁놀이를 지나칠 리 없단 말이지.”
“검불이는 많이 아프대요.”
“와. 그거 큰일인데.”
검불은 곧 죽어도 노느라 바쁠 녀석이었다. 노느라 바쁘지 않으면 곧 죽을 정도라는 뜻이고.
“장군님!”
정찰을 나갔던 을룡이였다.
“무슨 일이지?”
“삼재네 녀석들이 오고 있습니다요!”
“좋아. 고생했으니 쉬고 있어.”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들 소식을 전해듣고서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비장한 얼굴을 한 꼬맹이들이지만 말이다.
적. 전장. 싸움.
별로 와 닿지 않는 개념들이다. 내 생에 첫 지휘인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놀이에 불과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임진왜란 직전, 선조 치세의 이순신 아닌가!
꼬맹이들을 둘러보니 다들 잔뜩 긴장한 채였다. 내가 알기로 삼재와의 전쟁에서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누구나 지는 싸움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물며 꼬맹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최악의 사기였다.
‘전생에서 했던 게임이 생각나는군.’
전쟁 게임이었다. 수많은 요인이 전쟁의 성패와 연관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아무리 수가 많고 무장이 좋아도 사기가 빈약하면 지게 된다. 결국 지휘관의 지도력은 전장에서 군을 이끌기 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잘 관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지금 적들이 우리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 삼재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항상 전쟁을 이겨왔고 우리 마을은 놈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꼴깍.
꼬맹이들이 침을 삼켰다.
“하지만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검불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녀석에게 비보를 안겨줄 테냐, 아니면 승전을 알려줄 테냐!”
“와아아!”
철부지들을 선동하는 일이다. 이 정도도 못해서야 되겠나.
“좋다. 이번 전투는 나에게 첫 지휘다. 그리고 난 첫 단추부터 잘못 꿸 생각 없어. 승전 외에 선택지는 없다. 알겠나?”
“예!”
“따라와!”
나는 꼬맹이들을 데리고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그곳에 삼재 쪽 꼬맹이들이 있었다.
놈들은 오늘도 승리를 쟁취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동안 우리 마을은 항상 지기만 해왔으니까.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동안의 패배는 오늘의 승리를 위한 제물이었다! 제군들, 새로운 역사를 쓸 준비가 됐나?!”
“예!”
“공격해라!”
“와아아!”
휘하의 꼬맹이들이 달려 나갔다. 이에 맞춰 반대편에서도 달려들었다.
딱, 딱, 하고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자갈이 전장 위를 날아다녔고 곧 고통의 신음과 철부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과는 승리였다. 삼재에서 온 꼬맹이들이 모두 도망간 것이다.
다친 녀석도 몇 있었지만 꼬맹이라 그런지 다들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전승을 축하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가 이겼다!”
“장군님 만세!”
“와아!”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치렀군.
진짜 전쟁과는 비할 수도 없겠지만, 놀이로나마 이긴 것도 나쁘지는 않잖은가?
나는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해주었고,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발을 돌렸다.
“공자님, 더 어울리지 않으시고요?”
을룡이었다.
“됐어. 다음에 또 장군님 해달라고 하면 귀찮아져. 집에나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공부? 아니다. 이미 논어와 맹자를 떼고 중용을 외워가는 나다. 그리고 중용을 마치면 사서오경 중에 사서를 떼게 된다.
그동안 공부 많이 했는데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오히려 지금은 일부러라도 진도를 늦추고 있었다.
‘이미 너무 큰 관심을 받고 있단 말이지.’
아버지께서는 매번 내가 배운 것을 시험하면서도, 잘했다 못했다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잡히는 대로만 배워왔는데, 어느 날 셋째 형이 불평을 해왔다. 어떻게 공부를 그리 잘 하느냐고 말이다.
자신들도 주위와 비교해서 못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잘하고 있어서 매번 한 소리씩 듣는다는 것이다.
“자존심 세우지 말고 미리 말이나 해볼 것이지.”
“예?”
을룡이 물었다.
“아니야. 들어가기나 하자고.”
솟을대문을 넘어선 나는 바로 곳간을 찾았다.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부호의 저택인 만큼, 커다란 곳간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정문에는 항상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열쇠는 아버지께서 관리하시지만…… 나에게는 못 당한다.
“읏차.”
낡은 판자를 비트니 구멍이 뻥 생겨났다. 우연히 곳간 뒤쪽에 삭아서 덜렁거리는 판자를 발견했는데, 이후로 요긴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할 일이지.”
아버지의 재산을 터는 것 말이야.
“공자님…….”
“너는 망 좀 보거라.”
“주인마님께서 알게 되시면 경을 칠 겁니다요.”
“내가 경 한두 번 쳐보니.”
나는 몸을 웅크려 개구멍을 통과했다.
-지이익.
등이 긁혔다. 자칫 귀한 도포가 찢어질 뻔했다. 그럼 진짜로 경을 치게 되는 것이다.
“구멍을 확장해야 하나? ……됐다. 다음에 생각하고 챙길 거나 챙기자.”
곳간 안에는 천장까지 쌀이 쌓여 있었다. 이 곳간 하나만 따져도 족히 수백 섬은 되리라. 논 백 마지기는 족히 사고도 남을 재물이었다.
아버지께서 조금만 더 선행에 관심이 있으셔도 마을 안에서는 굶는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야. 항상 작은 선행이라도 빌고 빌어야만 겨우 들어주시니.
그래서 내가 대신 선행을 해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재산이 너무나도 많은 탓에 알아채지도 못하고 계시므로, 아직까지는 완전범죄였다.
‘아니, 완전선행이라 해야겠군.’
쌀섬의 구멍이 거의 주먹만 했다.
있는 집의 쥐라 그런지 덩치가 한가락은 하는 모양이다. 이래서 종노릇도 대감댁에서 하라는 거다.
나는 쌀을 몇 움큼 퍼내 주머니를 채운 뒤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도포자락이 끌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말이다.
“아무도 못 봤지?”
“예.”
-툭, 툭.
나는 뿌연 먼지들을 털어낸 뒤 을룡에게 주머니를 맡겼다.
“이제 의원 좀 다녀가자.”
검불이가 아프다지 않던가.
지금쯤이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터이니, 무척 신이 나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이 기분만 좋아서는 병을 떨치기 힘든 법이지.
나는 녀석에게 의원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놈 처지를 생각해보면 의원은 못 불렀을 것 같거든. 약값이 어디 한두 푼인가.
그래서 살금살금 저택을 빠져나가는데, 사랑방의 문이 털컥 열렸다.
“나가느냐?”
아버지였다.
그는 을룡이 쥔 주머니를 주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예.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늦지 않게 돌아 오거라. 내 오늘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