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1화
0. 서
1567년 7월 3일.
대행대왕에 이어 새로운 왕(선조)이 즉위한 날이었고, 열다섯 살 이순신의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날이기도 했다.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아니다. 무의공 이순신이다.
충무공의 빛에 가려 존재감도 거의 없고, 혹 아는 사람이 있어도 짭순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이순신 말이다.
이러한 후대의 인식과는 달리, 충무공과 무의공은 전장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전우였다.
두 사람은 단순히 이름만 같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각기 상관과 부하 사이로 함께 전투에 임한 것이다.
나아가 충무공과 무의공은 격에 갇히지 않았다. 자칫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임에도, 두 사람은 함께 놀이를 즐겼고 술잔을 나누었다.
한때 충무공이 원흉(元兇) 원균에게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하게 되자,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충무공을 찾아간 사람이 바로 무의공이었다.
상관과 부하라는 이례적인 관계를 떠나, 무의공은 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전장에서는 누가 먼저 승기를 잡느냐에 따라 전세의 흐름이 판가름 난다. 그만큼 선봉과 선봉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충무공께서 남긴 장계에 따르면 무의공은 충무공 휘하에서 열 번의 전투를 치를 동안, 아홉 번이나 선봉장을 맡았다.
그런 무의공의 능력은 타국의 장수인 진린도 인정할 정도였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후, 무의공은 진린의 추천에 힘입어 통제사에 제수되었다. 충무공의 후임이 된 것이다.
만약 충무공과의 인연이 더 이어졌으면 달라졌을 수 있겠으나…… 무의공의 말년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상관이기에 앞서 절친이고 전우였던 충무공을 잃었고, 본인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전장에서도 떠나게 됐다.
무의공은 전쟁이 끝난 뒤 공신에 녹권(錄券)되고 높은 관직을 역임했으나, 그동안 ‘교만하고 아부하며, 백성들에게 재물을 받아 챙기고 뇌물을 수수하여 여러 번 탄핵되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었다.
그동안 전장에서 세운 공훈으로 가려져왔던 본성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의공은 자신의 전성기와 타고난 자질 전부를 전장에 바쳤다. 그리고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과 가장 가까웠던 전우를 전장에 둔 채로 먼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