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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37화 (137/141)

< -- 137 회: 10> 게임의 끝. -- >

흑공자는 느긋하게 걸음을 걸어 빌딩의 최상층을 향했다.

펜테실레이아로 위장하고 잇던 아킬레우스와 샤를로테의 전투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상층에는 흑공자가 전력을 다해도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있을 테니까. 광신의 장군이 빌려준 펜테실레이아, 아니 아킬레우스는 원정을 떠나온 후 갓 만들어진 장군이었다. 군주의 장군치고는 매우 약했다. 그렇기에 흑공자가 두 명의 여성을 팔고 얻을 수 있었지만. 갓 만들어진 건 샤를로테도 마찬가지. 둘의 승부는 머지 않아 끝날 터였다.

흑공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지며 최상층에 올랐다.

최상층에는 회색이 보였다.

“네놈인가?”

회색분자,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다.”

“네놈이 비굴하게 숨어서 온갖 짓을 벌여왔던 거냐.”

“그래. 나다.”

“네놈이 내 모든 것을 망쳤군. 나의 자존심을, 나의 삶을, 나의 미래를, 나의 운명을. 내 모든 것을 부순 놈이 너냐.”

이시현은 깍지를 끼고 느긋하게 웃었다.

“그래. 그것도 나다.”

흑공자는 고개를 돌렸다. 이시현이 깍지 낀 데스크에는 알몸의 여성이 옷을 벗고 음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그녀의 발치 아래에는 금과 자주색으로 아우라진 궁복이 떨어져 있었다.

“춤은 그만둬도 좋아…….”

여성 쪽으로 시선을 돌린 흑공자를 알아채고 이시현이 춤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측천.”

측천. 그런 이름을 가진 장군이 음란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의 균열 속으로 밀어 넣었던 손가락을 빼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입에 물고서 측천은 흑공자를 바라보았다.

“네. 주인님이 아닌 이에게 저의 아름다운 몸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요.”

흑공자를 낳은 어머니였고.

흑공자의 본래 아버지였을 이보다 먼저 탐닉의 군주에게 범해졌고.

그 결과 탐닉의 군주와 황제의 장군이었던 측천 사이에서 태어난 흑공자.

흑공자는 흑공자 본인을 완전히 다른 타인처럼 바라보는 측천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흑공자의 눈앞에서 자신의 음부를 자랑하듯 넓게 펴보인 측천은 그의 눈이 떨리자 요염하게 눈꼬리를 치면서 데스크에서 내려왔다. 이시현이 몸을 일으키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둑. 우드득.

“이 아가씨를 사용하면 쉽게 끝날 거야.”

뼛소리를 내며 몸을 푸는 이시현이 정장을 벗었다. 정장은 무릎 꿇은 측천의 머리 위에 얹었다.

“한때는 너의 모든 것이었을 무측천. 그러나 그녀는 이제 없지. 대신하여 얻은 것이 이 무측천. 이름은 같지만 성향과 기억은 전혀 달라. 안타깝게도 힘도 좀 부족하겠지. 그러나 전의 무측천이 제국 장군 내 공포였고 네임드였던 것처럼, 그 명성을 빌린 새로운 무측천도 거듭 강해져서 과거의 그녀와 흡사해지겠지. 그녀로 너를 끝낸다는 건 상상만 해도 즐거워.”

흑공자 또한 입고 있는 검은 일색의 정장 재킷을 벗었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입가가 내려앉았다. 이시현은 소매단추를 풀고 두 번 접어 올렸다. 드러난 그의 팔뚝은 근육으로 엉겨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군주로서, 왕으로서 인정받기는 어렵겠지. 아니, 정확히는 ‘이런 상황을 알고 올라온’ 네게 밀리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이 두 손으로, 나의 이 몸으로 너를 끝장내기로 결정했다.”

“네가?”

흑공자가 혀를 내밀어 입가를 훑었다.

“너 따위가?”

“아직도 자존심은…….”

이시현은 킥 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덤벼봐. 나에게 죽음을 안겨봐. 너도 남자라면 네 손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봐.”

흑공자는 재킷을 벗고 가는 팔을 들었다.

“후회할 거야.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기분에 모든 걸 맡기는 것. 그게 바로 탐닉의 자세 아니던가?”

이시현의 대꾸는 흑공자를 쓴웃음 짓게 했다.

이시현이 손가락을 내밀어 흑공자를 지목했다.

“너는 죽이지 않아. 너를 쓰러뜨렸다는 대가로 왕권을 얻으면 그걸 네게 써서 전원이 범해줄 테니까.”

“이길 수 있다면 뜻대로.”

“네 여성 모습 예쁘장하던데. 그 꼴로 바꿔주지. 그때 이름은 뭐지?”

“자명(藉名)이었다만?”

‘이름을 빙자하다’는 의미의 단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건 흑공자만이 가진 해학일 것이다.

“잔뜩 임신시켜줄게. 네 정신은 여전히 지금 그대로인 채로. 범해줄게. 마음껏. 네 아이를 낳으면, 흠. 자씨 성을 따서 자청비, 뭐 이런 건 어떨까?”

“네 뜻대로 해보시지.”

흑공자는 킥킥 웃으며 대꾸했다.

“그보다 말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아?”

흑공자는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물었다.

이시현은 긴장 때문에 흘러내린 땀을 털어내고 씩 웃었다.

“아, 미안. 아귀는 아니지만 혓바닥이 길었지? 1분.”

“1분?”

이시현이 흑공자의 앞에서, 그와 대항하는데 버티는 시간.

“괜찮군.”

흑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올린 팔은 허공 속으로 파고 들었고 이윽고 내장 끄집게를 그의 고유한 공간에서 꺼냈다. 흑공자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1분을 버틸 수 있다면 내가 진 것으로 하지.”

이시현이 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몇 걸음.

“반대다.”

흑공자는 말했다.

“1분이 지나도록 너를 꺾지 못하면 내가 패한 것으로 하지. 우선 축하의 말부터 해두마.”

“축하?”

“축하한다. 차기 탐닉.”

흑공자는 내장 끄집개라 이름 붙인 부지깽이를 전력으로 휘둘렀다. 이시현은 반사적인 동작으로 부지깽이의 궤도를 피해 몸을 젖혔다.

흑공자는 인정하고 있다.

본인의 패배를.

지금 이렇게 겨루는 것은 흑공자와 회색분자의 자존심을 건 최후의 승부일 뿐이다. 그 승부의 끝은 정해져 있다.

최상층까지 올라오면서 모든 패를 잃어버린 흑공자. 그리고 흑공자에게 가장 치명적일 무기를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던 회색분자.

회색분자는 무기를 꺼내지 않고 맨몸으로 흑공자를 맞이하였고 흑공자는 그의 의도를 읽었다.

패배의 수순을 결정하는 승부.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흑공자의 공격은 비장했고 비참했고 우아했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슬펐다.

흑공자와 정면을 마주한 채 겨우 몇 걸음만 떨어뜨린 상태에서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월한 육체로 단련한 복싱. 그가 가장 재밌어하며 배운 무술.

“기대가 되는데.”

이시현은 밝게 웃었다.

최후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여자들 사이에서 굴복하여 흑공자를 무릎 꿇리고 그에게 왕권을 처먹일 것을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런 것도 괜찮다. 죽음은 두렵지만, 그 죽음이 자신의 것이 되기엔 꽤 먼 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이 빌어먹을 세계가 완전히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 세계 전체가 궁성이 되어 흑공자의 먹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간다!”

이시현이 바닥을 짓차며 달려들었다.

흑공자가 바닥에 떨어뜨린 내장 끄집게를 손가락으로 얽어매고 휘둘렀다. 이시현이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피하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블로우 잽. 내장끄집게의 무게 때문에 앞으로 향했던 흑공자의 상체, 그것도 머리가 이시현의 주먹을 맞고 크게 휘청였다.

끄득, 소리가 들렸다.

“이 돌대가리 새끼가!”

“크핫! 키힉! 아프잖아!”

고개를 젖히고 잔혹한 미소를 짓는 흑공자는 상체가 들리는 것에 맞춰 내장 끄집게를 휘둘렀다. 이시현의 사각에서 온 공격. 사람 하나를 완전히 해체했으면서도 극도의 예리함을 잃지 않은 것이 이시현의 살점과 근육일부를 뜯어간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뜯겨나간 조직은 하얗게 되어있을 터.

이시현은 소리를 높였다.

“병신아! 싸움을 못하니까 그런 무기를 쓰지!”

품으로 파고들어 빈틈투성이인 흑공자의 복부를 후려친다. 얼마나 단련을 안했는지 움푹 하고 배가 들어간다. 완벽히 내장까지 거덜 낼 정도의 파괴력이 그의 주먹에 실렸다.

“차라리 못 박힌 몽둥이를 들었다면 둔통이라도 느꼈을 것을!”

사람을 해체하는 갈퀴를 들고 있으니 뜯어나고 통증이 느리다. 근육의 일부까지 들고 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뇌가 통증을 느끼는 정도는 꽤 느렸다. 이시현은 입을 벌리고 알루미늄처럼 뭉개진 흑공자의 복부를 한 차례 더 스트레이트로 찔러 넣었다.

“뒈져!”

“크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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