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4 회: 10> 게임의 끝. -- >
여성들의 희생 끝에 흑공자는 다섯 명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여야당의 대표가 묶여 있었고 그 뒤에 정태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정태우의 뒤에는 그의 성과 피를 가진 무장이 둘.
“이건 뭐야.”
흑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질문했다.
정태우가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과감한 결단, 나쁘진 않지만……너무 진지하군. 게임은 즐겁게 해야하는 것일 텐데 말이야.”
여기서 볼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어스 엠파이어’의 남성. 조교사가 아닌 이가 박수를 치는 건 흑공자의 상식에서는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었다.
“넌 뭐지?”
“고대의 군주.”
“고대의 군주……?”
백공자 편을 들었다가 흑공자와 함께 패망한 자. 고대의 군주라고? 흑공자는 고대의 군주라고 상대를 확정할 수는 없었지만 군주의 기색이 감도는 정태우를 보고는 납득했다. 고대의 군주와 연관이 있는 존재인 건 분명하다.
“왜 고대의 군주가 여기에 나오지? 게다가 군주치고는 품격도, 재주도 모두 쓰레기 같군.”
“하하. 고대의 군주가 남기고 간 흔적이기 때문이지. 미안하군, 고대의 군주라고 거짓말을 해서. 그러나 전 고대의 군주라는 말은 진실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떨거지들을 막으려고 했지.”
여기의 이 두 방패와, 두 무장을 이용해서.
두 방패라고 불리는 이는 여당, 야당의 대표였고 두 무장은 고대의 군주가 한껏 조교하고 떠나간 두 무장이었다. 정태우가 이시현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인 한 그를 주인으로 섬기는 두 무장 역시 이시현의 무장과 다름 없었다.
“이제 말을 정리하는 수순이잖아. 그래서 남은 것들을 모두 끌고 가려고 했지. 그러나 네게 남은 건 대마 하나 뿐이구나.”
정태우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흑공자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여자밖에 없었다.
그가 급히 구한 장군. 광신의 군주에게 아끼던 두 무장을 팔아치우고 얻은 자.
정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할 일은 없는 것 같군. 이 두놈도 쓸모를 다할 수가 없는걸.”
적의 손으로 ‘쓸모없는 둘’을 처분하려던 정태우는 그들의 어깨를 쥐었다. 정태우의 뒤에 멍청한 눈으로 서 있던 두 여성이 정태우를 끌어안았고 이들 다섯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이트캡을 쓴 장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결과가 난 것 같습니다.”
“결과? 아, 암퇘지 퀸 말인가.”
“네.”
아마도 단미애가 암퇘지 퀸이 되었을 것이다. 어스 엠파이어로 가서 암퇘지 퀸이 되기 위한 시험을 치렀고, 이제 결과가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어스 엠파이어의 시간대와 ‘이쪽 지구’의 시간대는 꽤 차이가 나니까. 암퇘지 퀸이 된 조건으로 어스 엠파이어의 기술을 일부 유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갑작스런 공간이동도 가능하다.
흑공자는 흐음,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겨서 기분이 째지겠군.
“축하한다, 회색분자.”
흑공자는 세 명이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CCTV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여 욕설을 만들었다. 지켜보고 있을 회색분자, 이시현을 향해서였다.
“그럼 나도 슬슬 이동하지.”
흑공자는 세 명이 사라진 공간에 섰다. 그의 옆자리를 나이트캡을 쓴 장군이 지켰다.
그들의 몸도 곧 사라졌다.
***
피투성이가 된 여성이 있었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여성이었다. 강주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던 여성은 왕권을 흡수 후 장군이 되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몸을 깎아대는 고통을 느꼈다. 왕권을 가지고 장군이 되면 그렇게 고통스러울까 싶을 정도였다. 몇 번이고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결코 죽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지독한 고문기술자가 숨통만은 남겨두는 것처럼, 그렇게 강주희는 살아남았다.
그렇게 죽어 나자빠지면서 강주희는 몇 번이나 되는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누군가는 그녀에게 몇 가지의 질문을 제시했다.
‘너 말이야. 강해지고 싶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제발 좀 죽여줘.’
‘강해져서 이 고통을 타파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봐? 피해서 간다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일 텐데, 뭐 좋아. 죽음으로서 고난을 피해간다를 선택했군. 그럼 이 고통에서 벗어나면 뭘 할 거야?’
실루엣처럼 보이던 사람의 그림자가 조금 바뀌었다. 연약하고, 가녀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몰라. 아파. 아파서 미칠 것 같아. 미치지도 못하잖아!’
‘미치게 해줄게. 그러니까 지껄여봐. 이 고통에서 벗어나면 뭘 할 거야?’
‘그를 만날 거야. 그에게 꼭 안길 거야! 내 남편, 내 그이!’
‘응. 그렇구나. 세뇌, 주박, 지배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본래의 사람을 찾는 거군.’
실루엣처럼 보이던 그림자의 중심, 심장 부분에 강철처럼 딱딱한, 하지만 그것을 덮어쓰고 있는 수많은 장미가지가 보였다. 가지마다 가시가 박혀 있어 덤불처럼 보였다. 강철의 심장은 가시뿐인 장미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이가 나타나서 안기고, 쾌락을 느끼고, 만족해해. 그 후에 넌 뭘 할 거야?’
고통이 조금 사그라든 것처럼 느껴졌다. 강주희는 조금 안정을 찾았다. 물론 이것으로 변화의 끝은 아니었다. 최초에도 고통이 가실 무렵엔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직후 이어진 충격에 피를 줄줄 토하고 말았지만.
‘내 몸과 내 기술에 기분이 좋았냐고 물어볼 건데?’
‘그렇군. 틀림없이 기분이 좋았겠네. 기분이 좋아졌을 거야. 몸도 건강해졌을지 모르고. 죽음을 벗어난 직후의 성교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응. 몸의 모든 독소가 빠질 거야.’
실루엣처럼 보이던 사람의 그림자, 그 주변에서 장미향이 풍겼다. 아로마테라피 효과라고 하면 좋을까, 어쩐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장미향이 나는 것 같았다.
‘쾌락을 즐기는 것이 끝났어. 남은 시간은 어떻게 할 거야? 그를 위해 사용하는 건 당연하겠지. 그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로 갈 거야?’
‘나는 풍족해. 가진 것이 많아. 뭐든지 할 수 있어. 영화를 보고, 차를 타고 여행을 가고, 콘도에서 풍경을 바라볼 거야. 바닷바람을 맞고, 그가 만족해하는 걸 볼 거야. 그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걸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으니까.’
강주희는 처음 이시현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지나고보니 옛날처럼 느껴졌다. 실루엣의 주변이 각양각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풍경이 만들어졌다.
‘그런 네 앞에 이제 적이 나타났어. 네 그이를 죽이려고 하거나 빼앗으려고 하는 적.’
‘없애야지!’
‘오, 어떻게?’
‘어떻게든!’
‘그렇게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한 적이면?’
‘글세. 어떻게든 쓰러뜨려야겠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적을 쓰러뜨릴 수 없다면 어떡하지?
생각은 금방 나왔다.
‘그렇다면 그이를 건드릴 수 없게 막을 거야. 내가 벽이 되어서라도.’
강주희의 생각에 실루엣의 그림자는 색깔을 갖췄다.
‘적이 지칠 때까지. 멈출 때까지. 무엇도 생각하지 못할 때까지.’
색깔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는 너.’
입이 생긴 그림자가, 아니 사람의 실루엣이 말했다.
‘네가 바란 나.’
강주희는 점차 색깔을 지니며 완성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어느새 그녀는 거울 속에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되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말했다. 거울 속의 자신이 말하기에 현실의 자신도 입을 벙긋거렸다. 혀를 날름거렸다.
거울 속의 그녀가, 강주희 본인이 방긋 웃었다.
“내 이름은 뭐지? 너?”
현실의 강주희가 그림자 속의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나는 너. 너는 환영. 나는 달콤한 환영.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깔린 자신의 핏물을 장미의 잎으로 바꾸고, 장미의 폭풍을 부르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활짝 웃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이시현을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장미잎으로 만들어진 듯한 붉은 드레스를 걸치고, 흩날리는 갈색머리칼을 아로마 향이 나도록 나풀거리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검은 눈동자가 어둠을 품고서 요악하게 빛났다.
“오, 나의 사랑.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강주희, 아니. 나의 연인.”
“네, 나의 그이.”
“나를 죽이려는 적이 나타났어. 좀 도와주지 않겠어?”
강주희, 아니 이제 장군이 된 그녀가 선연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응시했다. 흑공자와 나이트캡을 쓰고 있는 여성이 그녀의 시야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 저 따위 환영 앞에서 고통스럽지 않게 해줄게요. 저의 달콤함을 믿어요.”
흑공자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회색분자와 새로이 만들어진 장군을 바라보았다. 장군의 흐드러진 미소를 보며 그는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걸작이군. 과연 ‘이 시대’의 사람다운걸. 괴이한 게 만들어졌군.”
“설마. 나는 이 모습에 조금도 손쓰지 않았어. 오직 그녀만의 선택일 뿐이야. 그래, 강주희가 스스로 원해서 만들어진 모습이지. 내 취향이긴 하지만, 내 뜻대로 변했다고 생각하면 좀 그렇지.”
“그래? 그럼 그렇게 대꾸해줘야 하나? 응?”
흑공자는 장군이 된 강주희의 이름을 알고 있는 본색이었다.
“Sturm und Drang! 나는 저 환영의 달콤함 속에서 고통을 받는구나!”
흑공자의 외침에 이시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샤를로테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가 힘껏 내쳤다.
“그때 이후 해도 달도 별도.”
“모두 아무 일 없이 그들의 운행을 계속했지만.”
“나는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네.”
“내 주위의 온 세상이 사라져버렸다네.”
울려 퍼지는 메아리. 흐드러진 장미 잎사귀. 짙게 풍겨나오는 장미향.
그 속에서 샤를로테가 된 강주희가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