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32화 (132/141)

< -- 132 회: 10> 게임의 끝. -- >

이런 시선을 받을 줄 몰랐기에 미노가 반문했다.

무장을 하나의 말로 인식하는 흑공자와 자신의 여자로 이해하는 이시현의 차이다.

물론 환경의 차이도 있다. 흑공자는 스스로를 꾸민다거나 곁의 여자를 꾸미겠다는 의식 따위는 없으니까. 이시현은 과거가 불행하기 때문인지 쾌락에 탐닉하고 주변의 여자들을 희롱하면서도 대접해준다. 물론 미노의 정장과 구두는 본인의 돈으로 산 것이지만 착각하게 놔두는 게 이로울 터였다.

“짜증나. 부르주아 같은 놈년들은. 이러니까 나라가 엉망이 되는 거야.”

이성아의 말에 미노가 피식 웃었다.

“동감이긴 한데.”

미노는 주먹을 움켜쥐고 머리에 튀는 전투감각에 즐거워하며 말을 이었다.

“나라의 구분은 조만간 없어질 거야. 부르주아고 나발이고 죄다 개털이 되겠지.”

“그건 그래.”

흑공자건 회색분자건 현 시대를 그대로 놔둘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장군이라는 존재는 한 나라의 최고지위자를 소리도 없이 살해할 수 있는 이. 그런 절대적인 힘을 갖추고 있으니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흑공자는 장난으로 수천만의 사람들을 고문할 수 있는 이이고, 이시현은 이 시대의 하층민으로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둘 모두 현 시대의 존속을 바라는 인간이 아니다.

“아무튼 붙어보자. 복서와 싸우는 건 처음이라 제법 기대가 되는 걸. 뭐 딱히 내 약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다행이지만. 즐겁게 해 줘야해?”

미노는 어지간한 사람에게 질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복서. 게다가 무장의 육체와 경험을 지니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이 당연한 싸움. 죽는 이는 미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미래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어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세계에 유래 없이 강력한 힘을 소유한 남자의 미래. 그 남자가 저지를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미래는 가볍게 예상을 뛰어넘지 않을까? 어떤 시대가 올지 정말로 기대가 된다. 이제부터는 권력의 시대가, 돈의 시대가 아니다. 한 명의 절대적인 힘을 지닌 이에 의해 재단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 남자가 적이라면 얼른 죽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미노에게는 아군이었다.

성노예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긴 하나 몸 따라 마음 간다고 그에게 복종하는 건 딱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면 무장이 된 후 남자에게 종속이 된 상태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머리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이성아가 팔을 들었다.

전투태세. 무장전의 시작이다.

머릿속에서 열기를 띄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미노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지금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상대의 질주를 기다린다. 일반인 상태에서의 경험은 몰라도 무장전은 압도적으로 상대방 측이 위. 게다가 복서.

이성아는 선공을 양보하는 듯한 미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잽으로 기세를 점하려는 태도도 없었다. 전심전력, 몸이 허락하는 최고의 속도로 시전된 복부를 향한 스트레이트. 미노는 공격의 위치를 알아챈 순간 복부에 힘을 주고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굉음이 있었다.

“크허억!”

모든 근육을 죄며 복부에 힘을 집중했지만 미노는 한 순간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튕겨 날아가고 몇 바퀴나 굴러 벽에 처박힌다. 벽을 뚫고 나가지는 않았지만 벽과 충분히 가까웠다면, 아니면 몸무게가 톤 단위가 될 정도로 힘을 주며 버티던 미노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벽을 뚫고 튕겨 나갔을 수도 있었다.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의 일격을 맞았다. 그러고도 재차 일어난 것을 보면 심신 양면으로 얼마나 터프한지 알 수 있지만 전투능력의 대부분은 상실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성아다.

선공을 양보한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어디 한 번 죽어봐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모르긴 몰라도 대전차 포, 아니, 정말로 전차포 못잖은 위력이 났을 것이다. 장군의 일격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사람의 몸이다. 사람의 몸에서, 앞으로도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는 공격수단일 뿐이다.

“그게 네 최대의 일격이겠지……. 크, 흐으, 흐으흐흐. 죽진 않았는걸.”

반 죽음상태이긴 했지만 미노는 죽지 않았다. 일어나서 비틀거리고, 배가 붙어있는지 손으로 쓰다듬으며 피를 토했지만 의식은 멀쩡했다. 미노의 말에 이성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며 감탄과 비아냥을 동시에.

“대단하네. 그걸 맞고 버티다니. 하지만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제 죽여줄게. 정신머리 없기는. 그런 걸 버티겠다고 하다니, 도대체 무장을 어떻게 보는 거야?”

“어떻게……보냐고……? 그야…….”

토해낸 피로 입가를 흠뻑 적신 미노가 히죽 웃었다.

“그야 괴물로 보지…….”

“그래. 괴물이야. 괴물 앞에서 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영웅이라면 당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잊고 있는 게 있군.”

입과 턱을 적신 핏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미노가 힘겹게 일어났다.

“나 또한 괴물이라는 걸 잊었나? 응?”

“잊진 않았어. 오히려 같은 괴물끼리 싸우자는 거지.”

“아, 아하하하핫! 같은 괴물이라고?”

어느새 미노는 일어나 있었다. 일어나서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괴물이 맞아.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뭐?”

“나는 괴물. 괴물 미노타우로스.”

움찔, 이성아가 물러났다.

미노가 웃고 있었다.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영웅에게 죽어버리는 미노타 섬의 괴물. 나는 무장이 되는 순간부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고 가혹한 고문을 받고 짐승처럼 부려졌지. 미노타우로스의 이름이 지니는 힘은 영웅에게 약한 대신 영웅이 아닌 존재에게 강해지는 것. 이름이 없는 것들은 그저 나의 공복을 채우고 힘과 경험을 늘려주는 사냥감일 뿐.”

“그, 그게 무슨…….”

“넌 영웅이냐? 장군이야? 아니지? 이름조차 없겠지? 그렇다면 넌 잡졸에 불과해. 내가 사냥할 수 있는 먹이라고!”

장군으로서의 미노타우로스는 <영웅약화>가 아니라 영웅에게도 강해지는 <영웅강화>의 특기를 지니겠지만 미노는 장군이 아니다.

때문에 영웅의 이름, 즉 이름의 힘을 지니고 있는 이에게 약해진다. 이를테면 영웅에게는 때리기 어렵고 아프게 맞는다는 소리다.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영웅에게 약해진다는 건 곧 영웅이 아닌 이에게 강해진다는 거니까.

어스 엠파이어의 무장 및 장군은 그 이름이 지닌 유래나 역사, 명성에 따라 특기와 힘을 충족할 수 있다. 명성이 높은 이름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덕을 톡톡히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름에 따라 나뉘는 다양함.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경험.

미노타우로스는 그 이름에 따른 특기가 있다.

입구와 출구만 있다면 어떻게 꼬인 공간이라도 헤매지 않는 <길 찾기>, 영웅에게 약화되는 <영웅약화>, 영웅이 아닌 존재에게 강해지는 <신화의 괴물>, 생것을 날로 먹어도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식인> 등등.

이름에 붙은 특기 중에서 효율적인 것, 비효율 적인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런 특기들을 죄다 가지는 이들은 장군 정도다. 장군은 무장과는 달리 특기를 상당히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 특기의 수량은 즉 가능성의 한계를 말하기도 한다.

미노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영웅약화>와 함께 <신화의 괴물>을 특기로 가지고 있다.

이 특기는 굳이 사용 한다 어쩐다 할 필요 없이 딱 한 번의 방법을 통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반응하는 방법이란 공격을 받는 것.

즉.

“네 공격을 맛보고 이해했다. 너는 영웅 따위가 아니야.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다른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야! 강력해. 분명히 나와 동등할 정도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경험도 있고 강력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니잖아!”

어느새 미노는 이성아의 코앞까지 닥쳐들었다. 이성아가 빠른 스탭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미노는 끝까지 따라붙었다. 떼어내기 어렵다고 느낀 이성아가 주먹을 뻗었고, 미노는 뺨으로 받아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무장이라고 해도 척추 째로 머리가 떨어져 나가 나뒹굴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버텼다. 미노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는 카운터를 먹였다.

이성아의 얼굴표정이 변했다.

이성아의 복부를 걷어찬 미노의 다리는, 뱃가죽을 찢고 부러진 갈비뼈에 상처를 조금 입었다. 하지만 왼쪽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져 근육과 가죽을 찢고 나온 이성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어……억?”

“무장이라는 건 말이지. 이름을 받기엔 아까운 존재야. 왜냐, 무장의 숫자는 말 그대로 발로 채일 만큼 있거든. 딱히 군주나 군주의 혈족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조차도 무장을 한둘 씩은 데리고 있어. 그들에게 모두 이름을 준다? 곤란하지. 이름의 가치는 꽤 높으니까. 그래서 무장이 이름을 가지는 경우는 별로 없어. 왜 장군의 태반이 이름을 지니고 있을까? 그야 당연히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 ‘강하기 때문’이야.”

신의 이름이든, 영웅의 이름이든, 가공, 가상의 이름이든, 괴물의 이름이든.

그 이름이 이고 있는 역사나 전설, 가공의 소문 따위는 죄다 <특기>가 된다. 치열하게 개발하지 않아도 이름을 짊어지는 것만으로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장은 무기다. 그리고 그 무장에 이름이 붙으면 마법무기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넌 이름도 없잖아. 무장으로서는 강하지만 그게 전부잖아?”

미노가 자신의 뺨을 뚫어버릴 것처럼 내민 이성아의 팔뚝을 쥐었다. 우둑, 소리가 나더니 이성아의 팔목이 부러졌다. 동시에 미노는 재차 걷어찼다. 초격에 거의 정신을 잃어버린 이성아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깨질 수밖에 없지. 복서라고 했지? 위대한 복서의 이름을, 혹은 복싱 이전의 원형에 가까웠던 판클라티온의 강자들처럼도 되지 못한 넌 깨질 수밖에 없다는 거야.”

이성아. 한국에서, 혹은 세계에서 가장 강할지도 몰랐던 여자복서는 두 번의 공격에 허리를 중심으로 두 동강으로 분리되었다.

“네가 한탄했어야 할 것은 걸치고 있는 구두의 브랜드가 아니야. 네 주인의 수준으로는 ‘꽤 수월하게’ 획득했었을 이름조차 주지 못한 네 주인을 원망해.”

두 동강으로 나뉘어 즉사한 이성아를 바라보며 미노는 담담하게 뇌까렸다.

“……그보다 사람을 이렇게 잔혹하게 죽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구나. 나도 정말 사이코패스가 다 됐네.”

참혹한 모습을 한 이성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미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 꺼풀, 미련을 털어냈다는 듯한 안도감서린 표정만 있을 뿐.

“아니,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괴물인가.”

미노는 피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내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문질렀다. 피를 토해낸 것을 닦는 손수건도 300만원이 넘는 물건이라는 건 잠시 후 이해했다. 미노는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팔랑, 소리를 낼 것 같은 모습으로 손수건이 떨어졌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성아의 얼굴을 덮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게 무장이라는 걸지도 모르겠네.”

아무도 듣지 않아 혼잣말이 된 말을 내뱉으며 미노는 만일을 대비해 올라올 계단을 지켜보았다.

누가 올라올까.

아군이 올라오면 가장 좋은 결과겠지만 적이 올라올 수도 있다. 그 적을 죽여 없애야 하지만, 아래에 있는 이들이 자신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특히나 한 명은 자신에게 엄청난 약점이 된다.

“물론 그 한 명 또한 올라온다고 해도 엄청나게 다쳐있을 거라는 게 문제지만.”

루크레치아. 그리고 잭 더 리퍼.

두 명의 장군이 맞붙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미노는 즐겁게 기다리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