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1 회: 10> 게임의 끝. -- >
‘저 모습은 어디선가 봤는데.’
손적은 흑공자의 옆에서 활대 비슷하게 휜 창을 들고 3층으로 향하는 장군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장군의 외형은 그 장군을 알지 못하면 예상조차 하지 못할 것들이 있다.
장군의 명칭과 외형이 매치가 안 되기 때문인데, 괴물이나 전설 같은 경우엔 뭔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명부의 신 네르갈이 10세 이하의 소녀로 나타난다던가, 세 여신의 집합체인 노른은 삼중인격이라던가. 앞서 말한 아자토스 같은 경우엔 잠만 자는 애새끼로 보인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장군의 이름이 ‘여성’의 경우에는 대강은 유추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지만, 확률적으로는 꽤 맞아떨어진다.
측천 같은 경우 측천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용의 눈을 지니고 있는 여황제라는 인상을 강하게 느끼게 만든다. 중국의 황제, 혹은 그러한 부류. 그런 인식이 바로 들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손적은 앞서의 장군에게서 그런 인상을 느꼈다.
아마 본명은 여성일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더운 지역의 영웅, 혹은 신 계통. 신이라고 해도 높은 지위는 아닐 것이다. 옷은 헐벗고 있으니 알 수 있는 거고 구리빛으로 탄 피부가 그런 가설을 덧붙인다.
장군이 높은 신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죄다 강한 것은 아니지만 어줍지 않은 이름보다는 강한 것이 틀림없으니까. 장군 중에서 특출하게 강한 존재들은 대개 신이나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손적 또한 신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영웅 계통일 것이다. 사후 신으로 추앙받은 건 아니고, 고대의 영웅으로 신과의 혼혈. 그런 약한 신성이 느껴졌다.
‘아마존? 아마조네스?’
손적은 점점 상대의 이름을 추측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억의 일부를 되찾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강제로 잊어버린 후 역순해서 되짚는 방식으로 떠올렸다. 정답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손적이 휴대폰을 들었다. 상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영이라고 불린 소녀가 주먹을 쥐었다. 움켜쥔 주먹의 주변공기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손적은 여의봉을 들어 막았다. 손적의 분신들과 손적 본인에게 엄청난 압력이 쏟아졌지만 분신은 죄다 사라진 가운데 손적만큼은 머리칼을 좀 흐트러졌을 뿐 막을 수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손적은 한 마디를 던졌다.
“상대 장군의 이름은 펜테실레이아. 속도로 싸우지 말라고 전해.”
대답을 듣지 않고 휴대폰을 던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가영의 표정은 몹시 굳어져 있었다. 같은 편의 장군 이름을 정확히 맞췄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공격을 간단히 막고서 전화를 거는 여유를 보였기 때문일까.
손적은 기분이 좋아져 허밍을 불렀다. 이게 바로 경험이라는 거지. 오랜 무장은 경험이 쌓인다. 그만큼 부상을 입고 장애를 입는 경우도 많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때 장군이기도 했던 손적은 싱긋 웃으며 여의봉을 양손으로 쥐었다.
“자, 슬슬 시작할까. 1층에서는 승부가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2층은 확실하니까 얼른 끝내자. 죽어주지 않을래?”
가영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손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건 만난 그 순간 알았다. 하지만 진다고 정해져 있진 않다. 가영은 측천이 자신의 힘과 특기를 일부 물려줘 무장으로 만든 여성이다. 측천은 개개의 말로서는 너무 강했다. 그렇기에 만약을 대비하여 그녀의 힘 일부를 다른 무장에게 넘겨주었다. 가영은 그런 힘을 받은 무장이 되었다.
가영의 과거는 우울했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적인 일로 여기고 있었다.
모두가 동정을 가지고 불쌍하다 생각하면서도 돕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망가졌다. 부서진 채, 그렇게 자라났고 결국 이상을 불렀다. 그것을 흑공자는 재미있게 여겼다. 고문할 거리로 잡아온 그녀를 괴롭히면서, 그녀의 이상을 눈치챈 흑공자는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즉 힘을.
가영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손바탁을 편 채로 엇갈리듯 손바닥을 부딪쳐 박수를 쳤다. 불어 닥치는 기파. 그리고 그 손바닥의 울림에 맞춰 흔들리는 공간. 손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영이 중얼거렸다.
“측천무후를 도왔던 네 명의 가신은 훌륭했지만 결코 영웅, 위인이라 부를만한 이는 아니었지. 적인걸, 장간지, 환인범, 경휘 등등. 나쁜 이들은 아니야. 아니, 도리어 한 나라의 재상이 될만한 자격이 있지. 그렇다고 딱히 대단하냐고 그러면 그런 것도 아니거든. 그래서 측천은, 나의 주인님은 무장의 성향을 약간 비틀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측천과 흑공자는 꽤 독특한 방법으로 가영의 강화를 꾀했다.
엄밀히 말해서 가영은 무장이 아니다.
무장에서 조금 분류된, 무조(巫祖)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무장이 파이터, 워리어, 소드맨 등등을 포괄하는 단어라면 무조는 강신술사 같은 마법직이라는 것. 이 또한 무장으로 불리지만 세부적으로 파면 무조라는 것이다.
<강신>.
강대한 힘을 가진 영혼을 불러 자신의 몸에 덮어씌워 강대한 힘을 구축하는 것.
어스 엠파이어의 세 황제 중 한 명, 죽음의 황제는 이미 생로병사의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고, 덕분에 영혼에 관한 힘을 어스 엠파이어에 제공하는 것도 가능했다.
측천의 강대한 힘을 일부나마 이어받은 그녀는, 이를테면 중국과 관련된 영웅, 신들을 소환하여 임하게 할 수 있다.
“……어머나, 씨발.”
손적은 먼저 맛깔나게 싸대기를 갈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손적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녀는 더러운 성격과 뭐 같은 말버릇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욕설을 퍼붓고 말이 더러워진다.
가영이 측천에게 물려받은 힘은 강신. 그리고 그녀가 강신할 수 있는 영혼은 중국의 것. 중국에서 시작된 기원, 신화, 영웅, 그런 종류의 환상.
가영은 강신하는 영혼을 손적이 잘 알고 있는 그것으로 택했다.
“망했어요.”
가영이 덧씌운 영혼은 삼장법사.
손적은 저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얹고 탄식했다.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층은 몰라도 2층은 손쉽게 끝내고 3층, 4층까지 올라가 아군을 도울까 했었다. 손적이 여기에 있다는 걸 흑공자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존재를 불러올 줄이야. 유연성이라고 하긴 그렇고, 어쩌면 어스 엠파이어의 남성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행운이 뒤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상대가 삼장법사라니.
삼장법사는 서유기에서는 납치된 공주님 같은 포지션이지만 무장인 이상 유용한 전투 특기들이 존재한다. 손적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존재를 소환한 가영을 보며 손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만만하진 않네. 응, 만만하진 않아. 역시 쉬운 싸움은 없구나.”
손적은 여의봉을 양손으로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손적이 바라보는 가영은 이미 삼장법사가 되어 있었다. 외형은 무슨 환락가의 창녀 같지만 저래 봬도 삼장법사다. 하긴 돌원숭이인 오공이 손적이 된 것도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손적은 서유기에 나오는 오공의 특성만 가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대는 본질적으로 손적 및 그쪽 패밀리가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자, 그럼 잡담은 이쯤하고.”
하지만 조금 어려워졌을 뿐이다.
상대도 여유로워하진 않는다. 아니, 여유로워했다간 그대로 죽어버릴 게 틀림없다. 손적은 한때 장군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장군에 가까운 무장이 되어 있다.
“시작하자.”
***
게임 스테이지 3.
3층을 지킨 이는 미노였다.
미노는 현재 여자복싱계의 기대주이자 챔피언으로 취급받는 이성아와 마주했다. 이성아는 상당히 초반에 무장이 된 이였고 그녀가 흑공자가 무장을 뽑는 기준이 되었다. 이성아는 게임으로 장기를 선택한 흑공자에게 졸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졸들 가운데서도 그녀는 독보적이다.
애초에 싸우는 법을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무장으로서 획득한 신체능력을 죄다 반사 신경과 오감에 집중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이성아를 초인으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압도적인 힘, 압도적인 체력, 압도적인 속도. 이 모든 것들에 앞서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오감과 반사 신경은 육박전에 관한한 무장으로서 다른 무장들에 비해 한 수 위에 있다는 평을 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선 이 또한 몸을 쓰는 거라면 아쉽지 않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인걸. 복싱은 그만 뒀어?”
이성아를 본 것은 이시현이 훈련을 하겠다며 찾아간 복싱 센터에서. 그러나 이성아는 그녀를 아는 척 하는 걸 TV를 통해서라고 생각했던지 여유롭게 대답했다.
“더 좋은 세계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건 그래.”
이성아의 말에 미노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렇지만 복싱 한다고 죽진 않잖아? 그게 좋지 않겠어? 더 좋은 세계로 착각하는 이곳은 누구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텐데.”
“내가 죽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 죽어. 네가.”
미노는 날렵한 몸매를 꽉 죈 정장 외투를 벗었다.
정장의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어스 엠파이어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현대의 기술로는 무장의 움직임에 맞는 옷을 만들 수 없다. 스판덱스 같은 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미노의 취향이 아니었다. 괜한 옷을 찢어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정장을 벗어두고 구두 또한 벗어 내려놓는다.
옷 한 벌 한 벌이, 구두가 이름 정도는 들어본 명품이라는 사실에 이성아의 눈가에 살짝 살의가 어렸다. 저도 모르게 아니꼬운 소리가 나온다.
“대접받고 사는구나.”
“어머. 너네는 안 그런가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