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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29화 (129/141)

< -- 129 회: 10> 게임의 끝. -- >

루크레치아가 고개를 설레 저으며 내민 손을 주먹 쥐었다. 리퍼가 눈을 크게 뜨더니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고 전체를 훑듯이 휘저었다.

-으직, 꾸직, 까드드득!

공간이 으깨지고 있었다. 주변 공간이, 보이는 시선이 물질화되어 일그러지고 있었다. 리퍼의 뒤편이, 마치 무언가에 으깨진 것처럼, 거인의 손아귀에 함몰된 것처럼 보였다.

방금 그건…….

“……뭐지?”

“뭐긴 뭐야.”

루크레치아가 혀를 날름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네 최후지.”

“그런 식으로 죽으면 제법 재밌긴 할 텐데.”

상대의 기술을 알 수가 없다. 리퍼는 방금 전의 현상을 3차원의 현실을 2차원 평면에 이어붙인 후 2차원의 평면을 으깨니 모사한 3차원의 현실이 뭉개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보다 더 재밌는 게 많아서 여기에서 죽는 건 사양할게.”

리퍼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고 마치 창을 들듯이 수평으로 들었다. 윤기가 반들반들거리는 구두의 코가 정면, 즉 루크레치아를 향해 있었다. 굽히고 있는 자세도, 리퍼의 시선도 하나 같이 일직선으로 루크레치아를 꿰뚫을 기색이었다.

루크레치아는 한쪽 눈을 감듯이 눈꺼풀을 덮고서 한쪽 눈으로만 리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은 내민 채였다.

‘공간 비틀기. 최소한 그런 종류의 특기일 텐데.’

그런 특기는 굉장히 희소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장군의 특기는 말 그대로 상상하는 대부분이 가능하다. 물론 전지전능한 신적 권능은 세 황제나 위대한 군주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일면을 모사하는 일은 장군으로서도 가능하니까.

문제는 2차원으로 형성하는 과정이다. 리퍼는 목표한 시간의 상황을 저장해두고 나중에 그것을 덮어씌우는 특기 <망자의 거리>가 있기 때문에 꽤 빨리 상대 특기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특기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 특기의 흔적도 없이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건가…….

리퍼는 창처럼 들고 있던 지팡이를 조금씩 기울였다. 정확히는 수평은 유지하되 높이를 바꾸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높이가, 위치가 되었을 때 내던졌다. 자세는 변함없었다. 머리칼의 일부만 팔락, 소리를 냈을 뿐, 리퍼의 손에서 지팡이가 쏘아져 나갔다는 건 정면에 선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약간의 미동도 없이 지팡이쯤 되는 물건을 98마일로 내던진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지팡이가 코앞까지 닥쳐와서야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피했다. 고개를 젖히고 피하는 그 짤막한 시간, 표현 그대로 찰나의 시간에 리퍼가 자세를 낮춘 채, 양손가락 사이 메스를 몇 개씩이나 끼운 채 닥쳐들었다.

인간의 눈은 앞을 향하도록 되어있지만 정면, 두 눈의 초점이 마주치는 부분에서야 비로소 정확한 상을 맺는다. 그리고 초점이 하나로 맞추어진 부분을, 리퍼는 지팡이의 높낮이를 제어하면서 알아냈다.

루크레치아의 미묘한 초점을 파악한 후 상이 맺히기 직전의 위치에서 던졌고, 비로소 시야가 지팡이를 정확히 응시했을 때는 코앞에 도달하게 했다. 가공할 속도로 내던진 지팡이였다. 그걸 아무런 미동도 없이 쏘아낸 리퍼도 가공할 재주를 부렸지만 코앞에서 눈치챈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휙 피한 루크레치아도 신체능력을 칭찬해줄만 했다.

둘 모두 대단한 육체능력이었다. 덧붙여 리퍼는 그런 루크레치아의 회피를 미리 읽었다. 지팡이를 쏘아낸 직후 양손가락 사이에 메스를 생성하여 루크레치아가 고개를 비틀어 피할 곳, 즉 루크레치아의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파고든 것은 마치 미래를 읽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갈 위치선정이었다. 루크레치아의 목덜미를 향해 세 개의 메스를 긁어올리는 리퍼를 바라보며 루크레치아는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으직, 끄직, 뿌드득.

리퍼가 루크레치아의 옆구리에서부터 머리까지 긁어 올리던 메스와 손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리퍼가 반대편 메스를 내던졌다. 루크레치아의 머리를 향해 날아온 세 자루의 메스를, 루크레치아는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휙 젖혀 피했다.

리퍼가 떨어졌다.

핏물이 뚝뚝.

세 자루의 메스를 쥔 채로 긁어대려던 손의 살점과 뼈가 상처를 입고 핏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어 그게 절반 정도를 흡수했지만, 검은색 장갑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의 양은 보통이 아니었다. 신경이 갈가리 찢어졌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육체의 ‘조직’이 한 차례 바뀐 채로 리퍼의 ‘움직임’에 따라 ‘무리’했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무리한 조직이 넝마가 된 것 뿐이다.

“네 눈 특이하네. 그게 네 특기였군?”

리퍼는 기이한 공격을 받았다. 덕분에 왼팔이 반쯤 파열되었지만, 도리어 만족했다.

루크레치아는 이런, 안타까워하며 양 눈을 치켜떴다. 루크레치아의 눈동자는 맑은 푸른색이었다. 반쯤 감았던 눈동자는 푸른색이기는 한데, 기묘한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사파이어. 자체 발광하는 사파이어를 박아둔 것처럼,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인공적인 푸른색이 명도를 달리하여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퍼는 장갑을 질척하게 적시고, 손가락을 따라 흐르는 자신의 핏물을 혀로 핥았다. 리퍼에게 재생력은 거의 없지만, 장군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생물인 만큼 신체치유도 보통은 넘는다. 벌써부터 갈라진 살점 따위가 아물기 시작했다.

“응. 보르자 가문은 르네상스 문화의 수호자이자 이탈리아 문화의 일등공신이었거든.”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보석 눈동자를 손으로 덮으며 말을 이었다.

“조각가, 평론가, 미술가, 음악가.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모든 문화, 예술인은 보르자 가문에게 충성했지. 충성이 아니더라도, 복속했어. 그런 거야.”

“그런 거라니…….”

“이해 못하겠어?”

간음장군 루크레치아.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요악한 여성,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이름을 딴 장군이 눈을 덮은 손가락을 벌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요악하게 빛나는 것은 눈을 대신하는 푸른색의 사파이어.

“현실을 예술로서 보이고 싶어 하는 자들의 지배자였다니까. 정확히 말해서 그에 한 발을 걸친 이였지만……우리는 완벽한 역사의 인물로서 표현되진 않잖아?”

리퍼의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니, 얼어붙는다는 건 옳지 않다.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회백색의 점토처럼. 조각처럼. 리퍼가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거군. 그러니까 네가 보는 것들은…….”

루크레치아가 동감했다.

“맞아.”

그리고 생긋 웃었다.

“나는 사물을 보는 것만으로 객체를 재현해.”

타오르는 불꽃도.

흘러가는 바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그 모든 것들을 그림의 일부로서, 노래의 하나로서, 조각품으로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루크레치아는 눈을 덮은 손의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수호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부술 자격이 있지.”

조각상으로 변해가는 리퍼를 덮듯이 손을 내민 루크레치아는 이내 꽉 움켜쥐었다.

만들고 부순다.

부수지 못할 것들도 부순다.

부술 수 없는 것들도 부순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제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보석 눈의 시야에 사로잡힌 순간 예술품의 일환으로 재현되며, 그 누구도 그 재현된 물품을 부수지 못하지만 루크레치아만큼은 손을 펼쳤다 쥐는 것만으로 부숴버릴 수 있다.

르네상스. 달리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진 언어. 중세를 대표하는 시대이자 문화 전성기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단어. 루크레치아는 그것을 <리나시타>라고 불렀다.

리나시타(rinascita).

이탈리아 어로 재생,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 르네상스의 모태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시작한 이탈리아 문화의 옛 언어.

“뭐 이렇게 이상한 특기가 다 있어. 상대하는 입장에선 환장하겠네.”

쓴 웃음을 지으며 리퍼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 회백색의 리퍼는 어둠에 묻혔다.

조각상이 되어가던 육체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루크레치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털었다. 손가락들이 잘려나가 버렸다. 따끔한다 싶더니 어둠 속에서, 재현된 물품을 부수던 손은 더 이상 움켜쥐지 못하게 변해버렸다.

리퍼의 특기다. 루크레치아는 상대의 특기를 ‘몰랐다’. 한때는 알았겠지만, 그녀들이 각자의 후계자를 주인으로 택하고 떨어졌을 때부터 두 가지의 제약에 걸렸다. 하나는 후계자에게 떨어진 장군의 정체. 그리고 하나가 해금되었을 때는 상대의 능력을 모르게 되었다.

손가락이 잘려 후둑후둑 피를 쏟아낸다.

루크레치아는 신음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

“어둠…….”

어둠이 깔렸을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으니까.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의 피해자, 혹은 오라비와 성교를 나누었던 중세 최고로 음탕한 여인으로 이해되지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알기 어려운 반면, 리퍼는 잭 더 리퍼, 지독한 연쇄살인자다. 그런 이름을 딴 그녀의 공격방법과 특기는 대강이지만 예상할 수 있다.

“하긴.”

루크레치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피를 흩뿌렸다.

어느새 목젖에 메스가 닿아 목을 반쯤 갈라놓았다. 기척조차 알 수 없다. 눈동자는 보석의 눈이 아닌, 본래의 그것으로 되돌렸지만 그런 눈으로도 어둠을 훑어볼 수는 없었다. 루크레치아는 마치 쫓기듯이 이동했다. 그런 그녀를 난도질하는 리퍼의 솜씨는 그야말로 경쾌했다.

“하긴 그러니까 그것을 던져둔 거지만.”

“뭣?”

목이 반쯤 나갔지만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루크레치아가 피식 웃었다. 어둠 속에서 반문하는 리퍼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가.

“내가 개전 이전에 내던진 거 기억 안나? 이런 어둠 속, 너는 보이지 않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알거든.”

루크레치아는 개전 이전 던져둔 검은 베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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