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8 회: 10> 게임의 끝. -- >
“쓰레기. 여기가 네가 죽을 곳이냐?”
퀘스트 창을 연결해 두었기 때문에 상대의 위치정보를 뚜렷이 파악할 수 있었다. 덧붙여 그의 목소리 또한 이시현 및 휘하의 여성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시현이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군. 그런데 웬 암퇘지가 지껄이고 있는 거야?”
흑공자는 여성화 되어 있었다. 이시현의 말을 들은 흑공자는 제 머리칼을 잘랐다. 그리고 목을 몇 번 주물렀다. 즉각 여자에서 남자로 변화했다. 저건 변신능력인가, 아니면 변화 같은 것일까. 이시현은 흑공자가 가진 새로운 능력을 보고 다소 긴장했다. 전투에서 써먹지는 못할 것이다. 보이는 대로의 기술이라면…….
이시현은 마음속으로 드는 부정한 마음을 부정했다.
“소개하지. 게인이다.”
“흑공자?”
“그렇게도 불리지. 그래서 네놈은 뭐지?”
“이시현.”
이시현이 쿡 웃으며 대꾸했다.
“회색분자.”
흑공자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를 덮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집요하고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색분자. 그래. 네놈의 처분을 결정했다. 잿더미로 만들어주지.”
“인간은 보통 소사하면 검게 되던데 말이지.”
“연탄과 섞어서 태워주마.”
“이야기는 이쯤하지? 올라와.”
“뭐? 진담으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시현의 대꾸에 흑공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벌써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는지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성들의 옷은 피로 절어있었다.
흑공자가 실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는 뒤에 선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힘껏 내렸다. 진홍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성으로, 수영복 비슷한 차림새만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맨발. 머리에 쓰고 있는 수면용 캡 같이 생긴 물건에는 악마의 그림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라 있었다. 등에 건 것은 꽤 완만하게 휜 창.
루크레치아군.
흑공자의 편을 들었고 리퍼를 쫓아 왔다가 리퍼가 살랑거리자 그대로 전투에 들어간 자. 리퍼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자 도주했고 루크레치아는 이후 일어난 참사를 떠올리고 경악했다. 즉각 흑공자에게 향했으나 패색은 짙었다.
흑공자는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를 짚고 올라탔다.
루크레치아가 벽을 짚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장군이라면.
아니, 무장이라도 저런 짓은 할 수가 있지.
우습게 본 것은 내 쪽이구나.
이시현은 찬탄했다.
저놈은 지금 다른 것을 볼 것도 없이 장군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는 카두케우스 스쿨의 건물 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이시현이 당황하는 일은 없다. 상식 밖의 행동에 조금 놀란 것은 맞지만 결국 흑공자도 자신의 제안을 따를 것은 분명하니까.
흑공자를 제어할 수 있는 단어를 그는 알고 있었다.
“올라올 때마다 제법 재미가 있을 거라고?”
“그냥 꼭대기서 널 쳐 죽여주지.”
꼭대기에 있을 거라고 유추한 것일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이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흑공자를 도발했다.
“이봐, 선배. 탐닉의 군주라는 건 말이지. 누군가가 놀이를 제안해오면 그걸 외면하는 거냐?”
“뭐?”
“게임을 시작하면 블러핑으로 한 번에 끝낸다거나 치트를 써서 앤딩 보고 끝이냐? 그게 탐닉하는 방법이야?”
이시현의 ‘도발’을 흑공자는 명쾌하게 이해했다.
“게임을 하자고?”
“그래.”
이시현이 쿡 하고 웃었다.
“나는 이미 무대를 준비해뒀어. 이 건물을 세울 때부터. 그리고 배치했지. 내 말들을. 이건 함정이 아니야. 킬 더 킹의 룰을 지킨 ‘게임’이라고.”
“이해는 했다만 그래도 괜찮을까? 응? 감히 내게 게임을 제안해? 이봐, 후배. 그 정도에 네 죽음이 바뀌진 않아.”
“그렇겠지. 그렇다면 이런 말로 너를 붙잡을 수는 있을까? 내가 준비한 층에는 너를 잘 아는 사람도 있다고.”
“뭐?”
“퀘스트를 주는 시스템이 내가 게임의 룰을 잘 활용했다더군. 그래서 보상을 받았는데 장군을 하나 주겠다고 하네? 원하는 장군을 만들 수 있는 선택권은 없지만 세 장군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여 만들 수는 있다고 하더라고.”
흑공자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한 순간 굳어졌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세 장군의 이름은 아그리피나, 엘리자벳, 그리고 무측천이더군. 내가 어떤 장군을 선택했을지 궁금하지 않아?”
“네놈.”
흑공자는 가늘게 웃었다. 보는 이가 살이 에일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은 웃음이었다.
“네놈은 정말로 죽고 싶어 하는구나.”
“죽음 아니면 모든 것.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유일한 상식이지.”
“키하하.”
흑공자가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몸을 떨었다. 흑공자는 어깨 위에 올라있던 여성의 뺨을 걷어찼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젖혔지만 몸은 미동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얌전히 엎드렸다. 흑공자는 콘크리트바닥에 착지했다.
“네놈은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겠군.”
“별로 무서울 거 없더라고. 세상? 세계? 어차피 내가 원해서 가지는 거고, 내가 필요해서 지키는 것뿐이야. 나 없이는 외계인들에게 그냥 잡아먹힐 것에 불과하거든.”
“네놈의 세계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겠지. 세상의 넓이를 보여주마. 그리고 후배, 네 목숨을 배팅한다면 선배로서 게임을 좀 가르쳐주지.”
“뜻대로 하시지, 선배. 같은 팀도 아닌데 후배라고 냅다 고개를 숙이진 않겠지만 말이지.”
“크키키키키키키키카카카캬카카카!”
흑공자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한참이나 웃던 그는 짐승의 그것 같은, 아니 귀신이나 악마의 것과 닮은 눈동자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흑공자가 이해했다는 듯 입가를 엄지로 훑었다.
“네 말을 잡아먹고 불계승을 거둬야겠군.”
“바로 그런 말이지.”
“좋아.”
“그래.”
“그렇다면.”
두 명의 말은 우연처럼 동시에 겹쳤다.
“나는 게임의 시작을 원한다.”
그래.
게임을 시작하자.
게임 스테이지 1.
“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리퍼. 잭 더 리퍼라고 합니다. 살인장군으로 1층에서 여러분들의 목숨을 접수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다운 날렵한 곡선을 남자의 복색으로 가린 미모의 소녀가 말했다. 검은 일체의 정장에 레드와인 빛의 넥타이. 그리고 먼지 하나 뭍지 않은 실크햇을 쓴 리퍼가 실크햇을 벗어 마술사처럼 인사했다. 장갑을 낀 손에는 주먹 만한 보석이 박힌 지팡이가 하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여집사와 같은 모습이다.
1층이자 카두케우스 스쿨의 접수계를 맡고 있는 곳에서 소녀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자. 접수하실 분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흑공자 게인은 차갑게 웃었다. 그는 말하지 않고 휘하의 여성들과 함께 계단 쪽으로 향했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리퍼가 계단 앞을 막아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루크레치아.”
“네?”
“치워.”
“이런 때에 말장난이라니. 조금 충격. 공자님은 코미디언을 하면 안 되겠네요.”
루크레치아에게 치워라니, 치와와에게 치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좀 다른가?
루크레치아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어 바닥에 던진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동정할게.”
루크레치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리퍼가 대꾸했다.
“그거 고마운걸.”
루크레치아는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가 손을 내밀었다. 리퍼를 향해서였다. 리퍼가 웃는 얼굴 그대로 계단 앞에 서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계단 옆으로 옮겨간 것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게인은 재차 걸음을 옮겼다.
리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뭐지?
계단을 올라가는 곳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가, 옆으로 이동했다?
공간이동? 루크레치아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였다. 리퍼가 주저했다. 그런 리퍼의 옆을 흑공자와 그의 일행이 지나갔다.
그들이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루크레치아, 혹은 새로운 장군을 적으로 삼아 접수계, 즉 1층에서 발을 묶을 생각이었으니 예상대로이긴 하다. 하지만 리퍼의 기분은 나빴다. 알지 못할 술수에 몸이 밀려났으니까. 게다가 상대의 수법을 알아내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이 올라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역시 장군이다.
리퍼가 퉁명스레 물었다.
“너 이런 수단도 있었어?”
“있었지. 너도 나도, 모두가 알고 있는 능력이었지만.”
루크레치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넌 아마도 내 특기를 죄다 잊은 것 같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너를 만났을 때 너의 특기 대부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숨겨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