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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27화 (127/141)

< -- 127 회: 10> 게임의 끝. -- >

10> 게임의 끝.

이시현은 말없이 한 명의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려다보는 이는 야당의 차기대표로 원내대표보다 사실상 실권을 더 많이 쥐고 있다는 이였다. 전투력도 대단해서 그가 말 한마디 하면 쓰러지는 장관후보자들이 속출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야당이라고는 하지만 여당도 짜증스러워하고 대통령도 뜻을 꺾기 어려운 실력자였다.

그의 옆에는 여당의 대표가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야당의 대표와 꼴이 다르지 않았다. 여당의 대표 뒤에는 붉은 머리칼을 날렵하게 틀어묶은 여성이 싱긋 미소 지은 채 철봉으로 보이는 것으로 대표의 등을 쿡 하고 찌른 채였다. 손적이었다.

야당의 대표 뒤에는 리퍼가 있었다.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실크햇을 장갑 낀 손으로 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고 실크햇을 다듬는 손의 반대편 손에는 살을 저미는 메스가 들려 있었다. 야당의 차기대표의 목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통령이 야당의 전 대표에 의해 죽은 지금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이 둘 말고 없었다.

이시현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꿀꿀 소리를 내며 애처롭게 울고 있는 단미애를 인간의자 삼아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등에 앉았다. 그의 옆에는 교복을 입은 소년이 있었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난폭한 행동과, 그런 것을 뒷감당 할 수 있다는 듯 하는 이시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당의 대표를, 그리고 야당의 대표를 잡아와 무릎 꿇린 이시현은 세계 제일의 폭군이 될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여러분. 이쪽에 사악한 종자가 하나 들어온 건 알고 있나?”

이시현이 담담하게 물었다.

사악한 종자라는 말에 시선은 일제히 이시현에게 몰렸다. 리퍼가 쿡쿡 웃고 손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이시현의 뒤에 서 있던 여성들 또한 난감해했다. 이시현이 부린 수작을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사악한 종자가 나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좀 그쪽이긴 하지.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난 아직 한참 미숙하지. 그 정도로 개새끼는 아니거든.”

이시현은 아직 지우지 않은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리퍼가 야당의 대표를 잡아 대령하기 전 퀘스트 창이 떠올랐던 것이다.

퀘스트 창은 아직 흑과 백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시현에게 나름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덕분에 이시현은 야당의 대표를 잡아오는 리퍼에 맞춰 손적에게도 명령했다.

여야당의 대표를 앞에 무릎 꿇리고 이시현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게임의 끝이 다가온다.

좀 급격하긴 했지만, 어차피 이시현이 정체를 드러낼 순간부터 급박하게 돌아갈 것이었다. 아니면 세 장군을 주면서부터 미뤄왔던 싸움이 일순간에 진행되거나. 혹은 이시현의 수단이 너무 좋았던 탓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과정의 끝.

“이 게임은 말이지. 사기 게임이야. 스포츠라고 한다면 스포츠로서 성립이 안 돼.”

이시현은 문득 게임을 생각한다.

“정확히는 하나의 피스가 너무 강하지. 다른 피스 전부가 들이박아도, 딱 하나 뿐인 피스를 이기지 못해.”

그게 바로 장군이었다.

장군이라는 존재가 다른 말들의 ‘효용성’을 막았다. 제 아무리 졸이니 뭐니 해도 장군이 그 지위를 맡는다면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결국 이건 장군을 잘 쓰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킬 더 킹을 제대로 즐기려 했으면 애초에 장군이 없는 상태에서, 말의 기능을 강화하는 쪽이 좋았을 터였다.

물론 흑공자도 백공자도 장군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드 게임에서 불공정한 힘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는 것일 터.

백공자와 흑공자는 지배층이었다.

그리고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기도 했다.

지극히 어스 엠파이어적인 인간이기에, 서로는 자신만을 위한 싸움을 준비하면 되었다. 흑공자는 자신의 취향을 위해. 덧붙여 공포에 의해 즉각 지배할 수 있는 부하를 만들었다. 백공자는 부유한 기업을 취하고 그것을 만끽하며 사사로운 즐거움을 획득했다.

애초에 3자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흑공자는 조폭이 아니라 어딘가의 군벌을, 백공자는 영국의 거대 기업이 아니라 황실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군에게 모든 걸 맡기고, 다른 캐릭터를 모으듯이 무장을 만들지 않고 철저하게 전투에 툭화된 이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상대가 한 명 뿐이기에 언제나 즉각 대응을 할 수 있기에 저지른 태만. 이시현은 그것을 한 순간에 눈치 챘고, 이용했다. 압도하는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서 압박해나갈 수 있었다. 자신의 거점을 만들고 모든 판을 주도할 수 있었다.

정체를 숨긴 채 암약한 것만으로 거둘 수 있는 승리가 아니었다.

천운도 따랐고 흑공자 백공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여 낸 결과였다.

“그들의 실수는 여럿 있었지. 뭐 3자가 없었다면 실수가 아니었겠지만. 사기 게임임을 알게 된 내가 짜놓은 판에 그들을 강제로 초대된 것뿐이야.”

그 덕분에 게임도 오늘 하루째에 끝날 것처럼 보였다.

“오늘 승부를 내지. 그 사악한 종자를 물리치고.”

이시현이 몸을 일으켰다.

“나의 세계를 지키겠어. 이 둘은 그런 싸움을 지켜볼 사람들이지. 정의의 히어로는 아니지만 세계를 지켜주는 거니까 이 정도는 받아들여줬으면 좋겠군.”

이시현이 나고 자란 나라에서 제일 높은 두 명을 납치해 와서 싸움의 끝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인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자리가 있으면 몰려드는 게 권력자들이고 하니. 하지만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시현이라는 남자가 싸우는 법을.

이시현이 살아가는 세계를.

여당의 대표는 운이 몹시 따른 청년 재벌 정도로만 이시현을 보고 있을 것이다.

야당의 대표는 살인귀를 기르는 개처럼 데리고 다니는 악마 정도로 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이들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이룰 것이다.

“자, 슬슬 싸움을 준비할까?”

이시현이 쿡쿡 웃으며 물었다. 리퍼가 실크햇을 벗어 무릎에 탁탁 털고는 빙그레 웃었다. 손적이 곱상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시현은 왕권을 꺼냈다.

본래라면 사용처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사용처 중 하나가 삼도천을 건너버렸다. 덕분에 이시현은 남는 왕권을 쥘 수 있었다.

“강주희.”

강주희, 한때 세상을 우습게 여기던 재벌의 딸이 빙그레 웃었다. 이시현은 왕권을 던졌다.

“삼켜.”

강주희는 따뜻한 보석처럼 느껴지는 물건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양손으로 받쳐 들고 꿀꺽 삼켰다. 동시에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치닫는 고통. 강주희가 몸을 비틀며 쓰러졌다.

“아으아어어으으아아아아아!”

이시현은 강주희가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지켜보면서 퀘스트 창에 손을 덮었다.

이시현의 눈앞에 떠올라 있는 퀘스트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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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킹에 참여하는 후계자에게>

열두 번째 퀘스트다.

백공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던 패자는 죽었다. 거만하고 오만하던 그는 기량의 1할도 사용하지 못하고 비굴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때 황제의 장군이었던 측천도 그곳에서 죽기는 했지만 홀로 죽은 것은 아니다. 백공자 측의 병력은 끝났고, 게임의 무대인 한국에 남아있던 무장 또한 넋을 잃고 쓰러졌다. 왕이 죽은 이상 딱히 정리할 필요는 없다.

대마를 잡기 위하여 쓴 팻감은 잭 더 리퍼 하나 뿐. 이건 훌륭한 전략이고 전술이다. 세 장군의 유해를 긁어모아 측천과 엘리자벳과 아그리피나 중 하나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한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흑공자, 회색분자 뿐.

서로를 죽여라. 쓰러뜨리고 승자가 되어라.

꼴사나운 패자를 용납하지 마라. 패자에게 굴욕을 주어라. 패배를 떠안기고 승자가 되어라.

퀘스트 진행시 제공: 상대의 위치정보.

퀘스트 완료 보상: 왕의 권능 및 유일 후계자로서의 지위.

탐닉의 군주의 지위.

탐닉의 군주가 지배하는 자원행성과 유원지의 소유권.

휘하 무장과 재산.

하고 있는 사업 전반 39824개.

사업을 위해 필요한 관계자 12075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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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창을 닫지 않는 이유가 퀘스트 진행시 제공되는 지도 때문이다.

퀘스트 창 옆에는 백공자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대에게도 그럴 것이다. 흑공자는 일직선으로 이시현이 있는 카두케우스 스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흑공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와 봐.”

이시현은 온갖 장치가 마련된 카두케우스 스쿨의 회장실에서 느긋하게 미소했다.

“이번엔 네가 도전자가 되는 거야. 검둥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강주희와, 그녀를 간호하기 위한 남민아만이 여기에 남았다. 그리고 이시현을 대체할 이로서 고대의 군주가 빙의해 있었던 정태우와 그의 노예인 가족. 그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볼 여야당의 대표가 2층 아래 위치해 있었다. 다른 무장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 중.

흑공자는 자존심에 극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았으니까. 3자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터. 하지만 백공자를 죽인 공적이 있다. 백공자를 죽였다면, 아마도 보상으로 왕권 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강주희는 무장도 아닌 상태에서 왕권을 받아 아직도 몸이 변하는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강주희가 아닌, 무장을 장군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장군의 숫자는 동일하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남겨둔 것이다.

각지에.

각층에.

마치 게임의 보스처럼. 한 층마다 한 명씩.

흑공자의 성격상 말없이 건넨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급히 기술자를 불러 CCTV가 있던 자리에 고화질 카메라를 담아 그가 싸우고 쳐들어오는 모습을 방송할 수 있도록 준비까지 마쳤다.

흑공자는 결국 장군 한 명과 함께 이시현의 눈앞에 설 것이다.

이시현이라도, 적이 저렇듯 무대를 마련해주면 따라할 테니까.

예상대로였다.

흑공자가 카두케우스 스쿨 앞에 도착했다.

고소를 머금던 흑공자는 정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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