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4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측천은 아그리피나의 몸에 ‘그리 세게’ 부딪치지 않았는데 온몸의 관절과 뼈 일부에서 으득으득, 뼈가 부러지는 소음과 함께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캐슬. 직선으로 질주하여 적의 전열을 깨부수는, 퀸 다음으로 효율적인 말. 킬 더 킹에서 체스를 고른 백공자는 아그리피나라는 강력한 전력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캐슬의 자리를 주었다. 캐슬의 특기는 캐슬로서 활용될 때는 직선운동밖에 할 수 없지만, 그때 닿은 존재를 최대, 최강의 힘으로 공격할 수 있는 것.
불과 10cm의 간격을 두고 달려들어 부딪쳤을 뿐이지만 측천은 전철에 튕겨 날아가는 경차의 기분을 느끼며 허공에서 몇 바퀴나 회전한 다음 나뒹굴었다. 바닥이 드르륵, 죄다 뒤집어지고 벽에 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짜잔. 내가 돌아왔다~.”
아그리피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엘리자벳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가뿐 숨을 내쉬었다.
“루크레치아는?”
“루크레치아? 암약한 채로 주변을 샅샅이 돌아다녔는데 루크레치아는 안 보였어.”
“암약하고 있는 건가?”
“글세. 헛소리가 아니었을까?”
“헛소리였다고?”
엘리자벳은 눈살을 찌푸렸다. 측천의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온 루크레치아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던 것이다.
“윽. 그, 큭.”
벽에 구멍을 내고 마당으로 튕겨나가지 않은 건 측천이 어떻게든 몸을 제어했다는 이야기다.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측천은 몸을 일으키려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그리피나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반 투명화 되어 있다가 완벽한 실체를 가지며 다시 나타난 엘리자벳은 손을 풀었다.
아그리피나가 부푼 가슴이 돋보이도록 팔짱을 끼고서 툴툴댔다.
“너 퀸이라며? 캐슬 능력도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냐? 완전 병신 아냐.”
“육체적으로 딱히 강하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은 것뿐이야. 들이박아도 저쪽이 더 튼튼하니까 나만 손해지.”
“그러시겠지. 하긴 유령이 뭣하겠어.”
아그리피나도 딱히 육체적으로 강한 것은 아니다. 장군의 스탯을 놓고 보았을 때 육체적인 강함, 즉 내구가 A부터 F등급까지 있다면(A가 가장 약한 기준), 아그리피나는 C 정도밖에는 안 된다. 물론 이 정도로도 손가락을 모아 합금판을 찔러 꿰뚫는 미친 짓이 가능하지만. 엘리자벳은 A, 잘해야 B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수치는 장군이 아닌 강력한 무장 정도도 낼 수 있을 힘이다.
“특성 때문에 그렇거든. 아니면, 너 정말 죽여줄까.”
살벌한 시선을 던지며 엘리자벳이 눈을 치켜떴다. 아그리피나는 비웃음을 흘렸지만 당장 싸우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엘리자벳, 망령의 여왕. 비실체와 실채를 자유로이 오가며 죽은 자도, 산 자도 지배할 수 있는 자. 그녀의 영역은 한없이 넓고 그녀의 힘은 매우 강대하다. 다만,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질 뿐이다.
“측천이 강한 거야. 그리고 너 정도는 나도 이길 수 있거든?”
“하, 그 망령 상태에서 적을 공격하면 생명력을 빼앗는 그런 촌충 같은 능력을 사용하시게? 기력을 빼앗거나, 감각상실을 일으키거나, 정신 상태를 헝클이는 건 같은 장군에게는 안 통해.”
아그리피나의 비아냥을 엘리자벳은 무난하게 대꾸했다.
“그래. 같은 장군에게는 통하지 않겠지. 측천은 무리야.”
“어쭈? 그 말은 나에겐 통한단 말이잖아? 너 미쳤니?”
엘리자벳은 대답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그리피나의 표정 또한 살벌하게 변했다. 곧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야당의 대표를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싸울 일이 아니잖아. 아그리피나, 네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해. 너는 무슨 명령을 들었었지?”
“정말. 무능한 년의 뒤를 닦아주기도 귀찮네. 그야 야당의 대표를 보호하고 이 녀석을 죽이려는 흑공자의 세력을 일소하라고 명령을 받았지.”
아그리피나는 어둠에 숨어 이 모든 일을 계획한 3자와의 거래를 위해 야당의 대표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측천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고 나왔어. 기쁜 추측이지.”
측천이 뚫고 들어간 벽에서 측천의 미약한 신음이 울렸다.
“그렇군. 그럼 측천을 처리하러 가지. 아참.”
엘리자벳은 자신만큼 잔뜩 흙먼지를 먹은 아그리피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옷차림은 왜 그렇지?”
“리퍼와 맞붙었어.”
“뭐?”
뜬금없는 이름에 엘리자벳이 깜짝 놀랐다.
“리퍼가 있었다고?”
“응. 날 심처로 끌고 들어가더군. 그런데 곧 놓쳤어. 심처에는 다른 장군도 있었으니까.”
“다른 장군이 있었다니?”
“루크레치아. 그 년을 보자마자 나를 공격하던 걸 멈추고 그년의 심처 <망자의 거리>에서 나를 뱉어내더라고. 그래서 조금 늦게 측천을 기습할 수 있었지.”
엘리자벳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방금 알게 된 사실을 짜맞추려 애썼다.
루크레치아가 진짜로 와 있었다고?
측천이 루크레치아를 소리 높여 불러 우리를 압도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된 이유가 리퍼 때문이라고?
리퍼가 실제로 여기에 있었고 그녀의 심처를 통해 장군을 다른 세계로 빨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적-측천의 계획은 완전히 망가지는 꼴이다. 그리고 측천은 아마 엘리자벳과 아그리피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거나 혹은 죽을 수도 있다. 측천을 죽인다면 상당한 승점을 획득하는 것이 되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이 패배를 받아들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3자가 흑공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를 묶어놓았기 때문이며…….
“아그리피나! 지금 당장 돌아가!”
“어? 왜? 측천 안 잡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흑과 백의 ‘장군 전부’가 여기에 발이 묶여 있다고!”
아그리피나는 헉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백공자가 있을 방향을 향해서였다.
“멈춰.”
허나 아그리피나는 바라보는 방향으로 뛰어갈 수는 없었다.
“멈춰. 숨 쉬지마. 여기서 죽어라.”
측천이 자랑하는 강력한 특기인 <어명>이 아그리피나와 엘리자벳의 발을 묶었다.
‘현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측천이 뚫어버린 벽을 통해 걸어 나오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백공자 세력의 두 장군을 노려보았다.
“백쪽에 있다던 리퍼는 안 보이고 아그리피나가 있군.”
피를 적셔 물에 젖은 미역처럼 이마를 가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측천이 눈을 부릅떴다.
“엘리자벳, 네년의 거짓말 따위 애초에 믿지 않았지만……장군의 최소한 명예도 잊어버린 모양이야.”
“그런 게 아니야. 측천, 우선 내 말을…….”
“리퍼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루크레치아가 다시 주인님께 돌아갔겠지. 그래서 불렀는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야당의 대표 따위야 너희들을 죽인 후에라도 언제든 죽일 수 있지.”
측천의 분노에 물든 황금색 눈동자가 엘리자벳과 아그리피나의 뒤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숨이 넘어갈 모양새로 꺽꺽대고 있었다. 남자 또한 <어명>의 영향범위에 들어가 있는 상태. 측천의 말 대로 ‘멈추었고, 숨쉬지 않고, 여기서 죽기 위해 도망치지 않는’ 상태로 피부가 파랗게 되도록 숨을 참았다.
엘리자벳이 경악하여 그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억지로라도 숨통을 틔워놓을 생각이었다. 허나 그녀의 판단이 무색하게도 <어명> 때문에 일순간 몸을 움직이는 게 늦었고 그 잠깐의 시간만에 측천의 용을 조각한 비녀가 여당의 대표를 즉사시켰다. 얼굴에 꽂힌 그것은 어딜봐도 죽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나와 함께 놀아보자. 네년들 전부를 죽여 버리겠다.”
측천은 머리끝까지 분노한 상태로 웃었다. 웃으며 으르렁댔다.
“네년들 모두 살아 돌아가게 만들지 않겠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네놈들의 주인은 네년들 없이 어떻게 이 시련을 헤쳐나갈지 기대되는구나!”
“닥치고 내 말을 좀 들어! 너와 나 모두 함정에 빠졌다고!”
“그렇겠지. 네가 만들다 만 함정에 나는 갖혀있지. 왜냐고? 함정을 믿고 으스대던 네년들을 죽이기 위해서! 루크레치아는 이제 네년들 없는 백을 죽여버릴 거다. 네년들 모두 주인 먼저 죽는 꼴을 보지 못해서 좋겠구나!”
측천은 용의 팔로 변한 손을 자신의 귓구멍에 찔러넣었다. 검은색 파충류의 손톱이 그녀의 귀를 파고들어서 고막을 찢었다. 더 이상 말 따위 듣지 않겠다는 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