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2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경찰들이 총동원되어 폭도들을 막고 있다.
덕분에 서울시내 경찰들은 거의 없었다. 야당의 원내대표에게도 호위는 없었다. 집의 위치는 이미 알아두었다.
사설 경비병들이 부촌이랍시고 여러 길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감시범위를 피해 허공으로 뛰다시피 해서 날아든 측천은 오면서 주은 돌맹이를 수십 개로 손바닥으로 쪼개어 CCTV를 부숴댔다. 그녀가 가는 길마다 인공적인 빛을 내던 CCTV가 부서지고, 렌즈가 깨졌다.
10분 만에 5km 이상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측천은 즉각 허공으로 뛰어 야당의 대표가 있는 집으로 뛰어들었다. 국내 최고의 부촌이라 불리는 곳에서,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있는 그의 집을, 담을 훌쩍 뛰어넘어 마당을 세 걸음 만에 도약해 집 내부로 향했다. 그리고 거대한 유리창 문에 손을 대 손바닥으로 유리창과 밀접하게 만든 후 힘을 주어 떼어냈다.
평범한 사람의 손바닥처럼 생겼지만 흡착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유리창의 창문이 손바닥에 딱 달라붙은 채 떨어져 나왔다. 유리창을 내려놓고 측천은 내부로 들어섰다.
야당의 원내대표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대표가 먹으려고 준비했던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써는 여성이 보였다.
“……너.”
곱슬곱슬한 금발을 늘어뜨리고 마치 중세시대의 드레스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있고 피부가 지나치게 창백한 여성이기도 했다. 갸름한 얼굴에 우아한 눈매, 그리고 날렵한 몸매를 갖추고 있는 여성이 음산하게 웃었다.
“안녕하신가. 오랜만이군요. 떼년아.”
“……엘리자벳. 백공자의 퀸이 왜 여기에 있지?”
그녀가 목표로 한 표적은 백공자의 편이 아니었을 터였다. 제 3자의 요청에 농락당해 인생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자가 아니었던가. 측천은 한 순간 적에게 선수를 빼앗겼다고 판단했다. 선수를 빼앗은 자, 백공자의 퀸이자 장군인 엘리자벳이 음산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와인글라스를 흔들었다. 와인글라스에는 피처럼 붉은 술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 그렇게 예상을 벗어나질 못하는지.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은 짧아서 다행이지 뭐예요. 어때, 식사를 좀 할래요?”
엘리자벳의 비아냥에 측천이 무심코 입안에서 이를 한 차례 갈았다. 황금빛 안광이 더욱 흉흉해졌다.
같은 장군이라고 해도 엘리자벳과 측천은 다르다.
측천이 아무리 약화된 상태라고 해도 장군이며, 엘리자벳은 제일 강해져야 측천의 가장 약한 상태와 비슷하다. 허나 엘리자벳은 게임의 절대적인 룰, 킬 더 킹의 원칙에서 최강의 말인 퀸의 힘을 지니고 있다. 측천은 포. 장기에서 차 다음으로 강한 말이긴 하지만 퀸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말의 역할에 따라 배가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엘리자벳을 오만하게 만들었다.
“식사? 지금 네년이 식사 같은 소리를 운운할 때냐.”
“그럼요. 한심하게 나대다가 결국 공권력에 의해 죽어 패망하게 될 멍청이의 편이라면요. 최후의 안식인 거예요. 죽기 직전 훌륭한 술을 한 잔, 그것이 적에게 보내는 저의 예의랍니다.”
“예의?”
측천은 목뒤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뿌득, 뿌득, 연골이 우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깟년이 승리선언? 겨우 허여멀건 정신지체아의 색노주제에?”
“그렇게 화를 내도 달라질 건 없다네.”
여왕의 모습을 한 엘리자벳은 근사하게 웃으며 치맛단을 붙잡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녀의 주위로 공기가 퍼져나갔다. 압축된 살기가 한 순간에 분출되자 공기조차 바람을 만들며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벳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 무서운 모습에 야당의 대표는 말 그대로 침을 줄줄 흘리며 넋을 잃었다. 측천의 분노는 임계점까지 올라있다. 어지간한 사람의 맨정신으로는 장군의 분노를 버틸 수 없다.
어스 엠파이어, 이 강대한 악의 제국에서 자랑하는 무기다. 무기는 살아서 움직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분노하고 증오하고 열이 받고 힘을 집중할 때 생물은 앞에 서 있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네년처럼 격이 떨어지는 게 내 앞에 있다는 건……그거잖아.”
측천은 황금색으로 변한 눈동자를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너 말고 다른 년 하나 더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나와. 나오라고 그래.”
“후웅, 나 그런 거 모르겠는걸? 누굴 보고 나오라는 건지?”
“지금 숨어서 뺀질거리는 년을 말하는 거다. 장군이겠지?”
엘리자벳의 순진하게 웃던 얼굴에 한 순간 금이 갔다. 측천은 상대가 숨기고 있는 걸 밝혔음에도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데다 겨우 두 명의 장군으로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그리피나.
탐닉의 장군 중 하나였으며 세 명의 후계자에게 한 명씩 장군을 선사해줄 때 백공자의 편을 든 장군이기도 하다.
이 장소에는 ‘캐슬’의 지위를 차지한 아그리피나가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암약>이라는 특기 때문인데 특기를 발동하면 장군의 눈조차도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측천이 이렇게 상대가 있다고 짐작하고 있는 한 드러날 것은 명약관화. 상대가 빈틈을 노려 기습을 할 수밖에 없다. 자체적으로 모습을 감추기는 하되, 적의 시야에 한 번 드러나서는 <암약>의 효과는 사라지니까.
하는 수 없지.
엘리자벳은 같은 장군이지만, 격이 다른 측천을 혼자서 상대할 수 없기에 아그리피나를 부르려 했다. 때마침 들려온 측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어서 아그리피나 년도 나오라 그래. 감히 나를 기척도 없이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믿나? 감히?”
측천의 말에 엘리자벳이 멈칫했다.
아그리피나가 백공자의 일원이라는 걸 알고 있어? 어째서? 가장 상성이 비슷하기 때문인가?
아니, 아니다. 야당의 대표가 화제에 오른 이유는 리퍼의 도움을 받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 리퍼의 함정 투성이인 도움 하에 그는 라이벌이 확실시 되는 이들을 죽였다. 리퍼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확실.
리퍼보고 나오라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
엘리자벳의 눈이 가늘어졌다. 측천은 그녀의 반응을 용의 눈동자로 읽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흑공자는 그 사나운 성정으로 어떤 판단을 내렸다. 그것이 백공자의 현재 돌아가는 상황과 대치된다. 3자가 있다는 것까지는 백공자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3자가 리퍼를 고용, 혹은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리퍼는 힘 있는 야당의 대표를 독이 든 성배로 조종하여 백공자를 곤란에 빠트렸다.
백공자는 엘리자벳에게 명령했다.
야당의 대표를 지키라고. 지키라면 누구로부터? 흑공자로부터.
흑공자는 세력이 일소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력이 전멸하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반면 백공자는 다소 여유롭다. 백공자는 이 나라의 공권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래서 그는 계획했다.
3자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야당의 대표를 흑공자의 세력에게서 지킨다. 그 후 대표를 지배하여 야당의 대표 따위를 통해 흑백의 두 세력을 제압하려고 한 이를 찾아 통렬히 반격한다.
백공자에게 간 이가 아그리피나라는 것을 알아챈 이유.
이곳에 온 이유.
엘리자벳은 우아하게 웃었다.
“쿡쿡. 농담이시겠죠. 저희는 리퍼가 있답니다.”
“리퍼가?”
“어머. 모르면서 쿡 찔러본 건가요? 아그리피나는 3자에게 갔죠.”
측천의 머리에 혼선이 잠깐 생긴다. 백공자 녀석에게 리퍼가 갔다고? 측천이 죽이려고 한 야당의 대표를 막고 있는 것이 엘리자벳. 엘리자벳은 백공자의 퀸이다. 측천은 이곳에 리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흑공자가 그리 판단했으니까.
리퍼가 이용해먹은 야단의 대표는 별 다른 재주가 없지만 인간의 나라에서는, 전장이 된 나라에서는 제법 권력이 있다. 그를 살리고 이용해먹는 것은 꽤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결국엔 죽이겠지만 죽기 직전까지는 많이 이용해 먹을 것이 틀림없다. 흑공자의 세력이 탈탈 털리고 있는 이유도 그의 입버릇 때문이다.
리퍼. 잭 더 리퍼.
한때 같은 소속에 속해 있던 장군이기에 측천은 리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여자를 잘 알고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아니었다고?
측천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받아들인 것이 ‘리퍼는 3자의 것’이며 그녀로 하여금 흑백 둘을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공자 측도 압박을 당하고 있으니 그의 퀸 엘리자벳을 통해 ‘야당의 대표를 손에 넣는다’고 판단했다. 엘리자벳이 여기 있다는 게 증거. 허나 이렇게 마주친 이상 엘리자벳은 측천에게 붙잡혀버린 상태고 거의 반드시 죽는다. 엘리자벳이 이렇게 여유로운 건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죽지 않을 이유’가 있기 때문.
그래서 측천은 탐닉의 장군 중에서 남은 이, 아그리피나를 말했다.
허나 엘리자벳은 부정했다. 백공자의 장군은 리퍼라고.
리퍼가 지금 ‘숨어있다고’ 말했다.
즉 야당의 대표는 ‘백색의 것’인 리퍼에게 협박을 받고 흑공자를 공격했다는 의미가 된다.
제 3자의 정체는 불분명. 야당의 대표가 백색의 것이라고 한다면 3자와의 연관된 고리는 없다. 야당의 대표를 죽임으로서 흑공자에게 간섭해오는 공권력을 제거하고, 3자를 추적하여 놈을 제거하려고 했다. 허나 3자로 이어지는 고리가 끊겼다.
한 순간 측천의 머릿속에 판단이 섰다.
“루크레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