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9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조건을 제대로 안 들은 건가요? 당신들은 무수한 법적용을 들어 이익이 나는 부분을 추궁해 남의 지갑과 명예와 생을 털어가는 주제에? 안 끝났어요. 끝날 리가 없잖아요. 나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은, 이 헤르메스 문서를 사용하면 끝이 없어요.”
리퍼는 제 몸을 기댄 지검은색 팡이를 들어 휘릭 돌렸다. 어느새 지팡이는 리퍼의 손가락 사이에서 예리한 빛을 발하는 메스로 변해있었다.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다면, 이번엔 당신이 저의 목표로서 죽게 될 거예요. 자, 죽이고 싶은 목표를 지정하세요. 아니면 오체분시를 여기서 할지도 몰라요?”
“미친년! 넌 미쳤어!”
“설마요. 미친 건 그쪽이 아닐까요?”
리퍼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당신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곤란한 자를 목표로 지정했잖아요. 죽으면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걸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나름 재어봤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미친 걸 이쪽으로 몰다니, 너무하네요. 목표를 죽여줬잖아요? 그저 장난삼아 당신의 이름을 현장에 남겨두었을 뿐이지만, 그것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화를 내나요?”
“내 이름이 적혀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야당의 대표는 외쳤다.
“내 이름이 적혀 있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어!”
“후후, 하긴. 그것만 아니라면 좀 고통스럽긴 해도 이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았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어쩐다. 나는 또 장난을 할 생각이거든요.”
“뭐? 또 하겠다고?”
“네. 그러니까 목표를 지정해주세요.”
리퍼가 눈매를 구부리며 말했다.
“아니면 이쪽에서 칼부림을 할지도 모르거든요. 아, 그거 알아요?”
리퍼는 손가락 사이마다 끼고 있던 매스를 손목을 한 차례 휘저어 하얀 장미꽃으로 만들었다. 장미꽃을 허공에 던지고 빈손을 품에 넣은 그녀는 녹음기를 꺼냈다. 겉껍질의 비닐도 벗기지 않은 신품이지만, 한 차례 사용한 흔적은 있었다.
녹음기를 재생하자 대표가 아는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보냈다고? 그, 그 자식인가? 그, 그만둬. 그만둬! 난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제발 하지 마! 안 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돈이라면 줄게! 다 주겠어! 그러니까 제발……힉, 또, 또 잘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처음 30초 정도를 제외한 모든 것이 끔찍하다는 표현을 붙여야 할 비명으로 점칠 되어 있었지만, 대표는 녹음기의 소리가 누구 것인지 알 수 잇었다. 그가 죽이라고 말했던 이의 목소리였다. 이 나라의 정국을 흔들며 야당 원내대표가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이였다. 살인현장에 이 소리를 녹음했던 걸까.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면서 엄청나게 빌더라고요. 말 그대로 버러지처럼 빌고 또 빌었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위엄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뭐, 그런 사람을 죽일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도 못됐죠?”
“……뭘 바라는 거냐.”
굴복. 표현 그대로 모든 것에서 눌려버렸다. 대표의 물음에 리퍼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라는 거라뇨?”
“이 짓을 그만두기 위해서 뭘 해야 하냐고!”
“음. 진실을 말해주면 좀 나아질 지도 모르겠네요.”
리퍼는 여기까지 와서도 진심을 속이는 대표를 보면서 혀를 찼다.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그만두고 싶어요? 지금 여기서 멈추고 싶어요? 아니잖아요. 그럴 리가 없지 않나요?”
그것은 실로 악마의 유혹처럼.
“본인의 이름만 쓰지 않는다면 계속 할 생각이 있지 않나요?”
대표는 부정했다.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재차 부정했다. 그런가요, 리퍼는 안타까워했다.
“그럼 정말로 그만두고 싶은 모양이네요. 하는 수 없죠. 헤르메스 문서를 되돌려 받을까요?”
대표는 떨떠름해하며 헤르메스 문서를 돌려주었다.
헤르메스 문서는 리퍼가 건네준 용기에 잘 숨겨져 있었다. 사흘 동안 야당 원내대표의 집안을 탈탈 털어대던 검찰들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리퍼는 헤르메스 문서라고 적힌 공책을 들고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음 거래자로는 고(故) 현직 대통령의 자녀를 골라야겠네요.”
“……뭐?”
“그동안 이 헤르메스 문서를 사용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본래라면 당신을 죽여야겠지만 첫 손님인 대가로 죽이지 않을게요. 게다가 다음 행선지도 알려드릴게요. 나는 이제 두 번째 사용자로 처참하게 살해된 대통령의 자녀에게 갈 거예요. 그리고 어쩌다 말을 실수로 흘리다가 첫 번째 사용자가 저지른 사용처를 말할 수도 있겠죠.”
리퍼가 말하다 말고 쿡 하고 웃었다.
“그들의 목표는 누가 될까요. 흐음, 고민되지 않는 이유는 저로서도 그들이 누구를 목표로 할지 떠오르기 때문이겠죠?”
굳이 말을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야당 원내대표는 악마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리퍼가 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슬슬 떠나볼까요?”
“……이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대표가 말했다.
“네가 죽인 시체 곁에 이름을 쓴 종이, 그게 없는 조건으로 필요한 것을 말해봐.”
“어머나. 무슨 말일까요?”
“헤르메스 문서인지 뭔지를 계속 쓰겠다고! 그러니까 그걸 쓰면서 일어나는 일을, 부작용인지 뭔지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봐!”
말 그대로 패배선언이었다.
자기보신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리퍼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내건 조건이 게임으로 바뀌고, 게임으로 바꾼 당사자가 예상한 가장 훌륭한 결말이었다.
리퍼는 장갑을 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하하, 그럼 우선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 평범한 사람이었던 이시현은.
어느덧 완전한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 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우선은 특별법을 상정해주지 않을래요?”
“트, 특별법이라고?”
이시현은 리퍼를 얻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을 상정했다. 게임이 지지부진해지자 탐닉의 군주가 자의 장군들을 후계자들에게 내보내면서 더 이상 암약할 여유가 없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이 장군을 맞이하기 위한 조건을 수행하는 때에 맞춰서.
“조폭을 대처하기 위한 특별법을.”
최초로 야당의 원내대표라는, 손꼽히는 권력을 갖춘 이에게 찾아가서 조건을 걸기로.
“그리고 해외 석유재벌에 대한 특별법을.”
그 조건의 결말은 즉.
“서울의 암흑가는 이미 한 조직에 의해 모조리 정리되어 있지요. 그들은 유래 없는 지배력 아래 뭉쳐서 경찰간부들마저 공격하고 있어요. 이들을 군대로 처리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덧붙여.”
이건 조금 룰 위반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흑, 백을 상대하는 수단이 굉장히 재미있으니까.
리퍼는 수락했었다.
“BP그룹의 후계자에게 이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국금지를 신청해주세요. 들어와 있으면 당장 꺼지도록 해주세요.”
눈을 크게 뜨고 대표가 리퍼를 올려다본다.
왜 이런 제안을 제시하는지 모르는 눈치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났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내 이름을 쓰지 않을 건가.”
“네. 당신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을게요. 어떤가요? 수락할 건가요?”
“……너는 도대체 누구야. 처음부터 물었어야 했어. 내 집을 이렇게 검게 물들이고, 그림자가 똑바로 서게끔 만들고, 짐승 소리가 들리게 만드는 넌 누구야. CCTV를 무효화하고, 국내에서 제일 경호가 확실한 곳을 침범한 너는 누구냐고!”
“아,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나는 잭 더 리퍼. 살인장군.”
리퍼가 곱상하게 인사를 했다.
“훗날 이 세계를 지배할 왕의 무기입니다.”
***
두 번째 살인사건.
살인사건은 아직도 대한민국을 충격으로 밀어 넣은 대통령의 사망과 비슷했다. 대법원장의 살해.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비참하게 죽어버린 그의 죽음은 모든 메스미디어를 지배했다. 엄청난 무게의 쇠망치로 몇 번이나 머리통을 후려쳐 척추까지 짜부라뜨려 죽였다는 살인범에 대한 정체는 의문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런 곳에 들어와 죽인 것일가.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외계인, 악마, 사신, 심판. 갖가지 판타지 적 상상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이번에도 누군가의 이름이 벽면에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은 바깥에 드러나지 않은 자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그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대통령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강력히 떠올랐던 야당 원내대표가 이름의 당사자를 지목하며 특별법을 제창했다.
대법원장을 죽인 범인의 이름은.
최소한 벽에 적혀있던 이름이 지목하는 자는.
“누구냐…….”
하루 만에 대테러 특수부대가 조직되었고 이틀 뒤 목표한 곳으로 돌격했다. 조직폭력배들이 죽었다. 유래 없는 살육. 외부에서는 조폭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이 환호했지만,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살해해도 되는지에 대한 우려를 가졌다. 하지만 그 우려는 그날 발생한 진압의 결과에 의해 말소되었다.
국내의 조폭들이 하나의 조직에 흡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태양그룹의 호텔을 폭발시키고, 재건축 현장에서 날뛰고, 인천지역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그것을 막기 위해 모인 경찰들에게 막심한 영향을 끼친 것도 매스컴을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
최소한 진압의 결과를 보면 그랬다.
대법원장을 죽인 범인. 범인이 아니더라도 벽면에 적힌 이름을 가진 자의 거처에서 보인 것은…….
“어떤 새끼야.”
흑공자 게인은 눈에 핏대를 세운 채 이를 드러냈다.
그가 바라보는 TV에는 21세기에 ‘악마’라는 이름으로 그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거처, 그 지하로 향해 드러난 고문실. 그 고문실에는 수없이 많은 해체의 흔적과 시신이, 그리고 갖은 실험으로 죽는 것만도 못하게 된 이들이 널려 있었다. 갖은 곳에서 납치해온 모자들이 뇌에 전극을 꽂은 채 완전히 정신이 나간 채 범하고, 그 모습을 찍은 비디오도 있었다. 이 지옥에 공분한 이들은, 법을 제창한 야당 원내대표의 외침이 없더라도 일순 하나가 되었다. 흑공자 게인을 반드시 잡아 현장에서 사살해도 되는 법을 상정하고, 그를 향해 모든 공권력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건 정상적인 결과가 아니다.
너무도 빠른 속도전. 흑공자 게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백공자의 짓일까? 아니다. 백공자는 여기에 없다. 게다가 백공자가 아무리 권력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그는 재벌 쪽에 붙은 입장. 국내에서 이렇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다른 3자가 있다.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