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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18화 (118/141)

< -- 118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왕권이 어스 엠파이어에서 결정적인 무기로 활용되지 않는 이유가 그거다. 이시현은 생각지 못했던 정보를 듣고 멍해졌다. 하긴, 왕권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걸 이시현만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책까지 마련되어 있고 사실상 의미 없는 일이라는 사실에는 당혹했다.

리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후계자 쟁탈전에서는 후계자의 클론이 없죠. 있다고 해도 여자가 되는 순간 게임에서 탈락하는 건 확실하죠. 좋네요. 지금껏 그것 때문에 왕권을 아끼며 버티고 계셨던 거군요! 확실히, 훌륭해요. 좋아요. 역시 제가 사람을 잘 봤다니까요, 후후.”

“……뭐 그런 이유로, 흑공자와 백공자, 두 놈을 두 년으로 바꿔 내 곁에 둘 생각이야. 쓸모 있겠지. 강력한 장군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완벽한 승자로서 자리 굳힘 하는 거지. 뱀 같은 두 놈들은 언제나 나를 위해 봉사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엮겠지. 그래서 카두케우스라는 이름을 붙인 거야. 그리고 거기에 이어 헤르메티카, 헤르메스 문서를 떠올린 거고.”

이시현은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게임을 제안하지. 게임의 이름은 헤르메티카. 헤르메스 문서라고 이름 붙은 살인명부를 누군가에게 건넨다. 그 명부에 죽일 대상을 그가 쓰면 죽이는 것은 바로 너야. 너는 그 문서를, 뭐 공책 같은 걸로 하지. 그 공책을 타인에게 건네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음을 알려줘. 그렇다면 공책을 받은 이는 원한다면 누군가를 죽이려 들겠지. 죽이려 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리고요?”

“죽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죽여.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

“으흥~?”

“죽일 수 있는 대상은 한 명. 하지만 그냥 죽이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그러니까 비교를 하는 거야.”

“응. 네. 계속.”

“소유주와 목표. 이 둘 중에서 공격(살해)을 명령 할 수 있는 이는 공책의 소유주가 되겠지. 그리고 목표는 공격을 받은 입장이 될 거야. 그때 소유주에게 물어봐.”

“뭘 말인가요?”

이시현이 대답했다.

10초 동안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하나로 만들어낸, 게임을.

“‘목표’보다 뛰어난 점이 뭐가 있냐고.”

“오.”

“그리고 그 목표보다 소유주가 말한 것이 뛰어난 게 사실이라면 목표를 죽여.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공책을 가진 소유주의 명령을 들어. 다만.”

“판단을 잘못했다면…….”

리퍼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 또한 이 게임의 내용을 이해했다.

“반대로 목표에게 나타나서 목표를 죽이려고 했던 자가 공책의 소유주임을 알려주는 거지. 소유주가 했던 행동과 네가 하려고 했던 행동을.”

“그리고 반대로 살해 목표는 소유주가 되는 거군요. 그리고 목표를 지정하지 않으면 반대로 죽어버리는 룰까지 그대로 지니고. 이런 상황에서는 죄수의 딜레마가 될까요?”

“그래. 그런 게임이지. 재미있지 않을까?”

“재미……. 재미있겠군요. 정말로 재미있겠어요.”

리퍼는 그 일을 생각했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오가는 건 시간은 제법 걸릴 듯하다. 하지만 재미있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이런 게임이 훨씬 재미있다. 그녀는 장군이지만, 그녀가 섬기는 주인이 탐닉의 군주. 그 덕분에 도박도, 게임도, 무모한 일도, 쓸모없는 일도, 자신만 즐거워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시현의 제안은, 게임은 그녀에게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시현 또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사람을 죽이라는 식으로 그의 인간성을 마모시켜야겠지만 이번만은 못 본 체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면 천 명은 너무 많네요. 백 명 정도로 줄이도록 할게요. 대가로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그리고 말이지.”

“헤르메스 문서를 만들면 그것을 제일처음에 가져다줄 사람으로…….”

“사람으로?”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서 기대감에 찬 리퍼가 물었다.

이시현이 입을 열었다.

리퍼가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로 진흙탕 같은……아하하하핫, 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게다가 이런 것도 조금은 더하면 더 재미있겠지?”

그리고 ‘이런 것’이라면서, 게임의 룰을 추가하자 리퍼는 그만 그만둬 주세요, 하고 폭소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악당! 정말로 악당이세요. 너무 잔혹하세요. 괴물, 귀축. 힘을 가졌다고 그렇게까지 하시다니! 아하하하하! 이래서야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인간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건 조크 같잖아요!”

정말로 리퍼는 이시현을 택한 것이 좋았다. 이렇게 즐겁게 해줄 수 있다니. 리퍼는 한참동안 웃다가 눈물을 뺨으로 흘려보냈다. 리퍼가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이시현의 뺨을 감쌌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짙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럼 공책을 만들어주지 않겠어요, 임시 주인님?”

임시라고는 해도 주인님.

리퍼가 그를 부르는 명칭이 바뀌었다. 리퍼에게서 주인님이라 불리다니. 이시현은 삶의 목표가 하나 성공한 것 같았다. 이시현은 리퍼의 혀 놀림에 감탄했고, 여운을 맛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당장 날뛰고 싶네요. 자, 주인님. 어서. 어서 부탁드려요.”

“그럼 뭐.”

이시현이 몸을 일으켰다.

“공책 한 권 사러 갈까?”

“네, 주인님.”

공책은 대학생용 캔버스 노트였다. 거기에 이시현이 매직으로 글을 썼다.

HERMETICA. 헤르메스 문서라는 이름이다.

“악필이네요.”

“……컴퓨터 세대라 그래.”

“그런가요?”

고양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리퍼의 모습이 귀여워서 이시현은 화도 내지 못했다.

“자, 그럼 다녀와.”

“네. 야당의 대표에게 찾아가죠. 그리고 물을게요. 당신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그리고 그보다 뛰어난 점이 뭐가 있냐고. 그리고 주인님이 추가하신 룰대로 처리할게요. 아하하하핫,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공책을 허리에 끼고 리퍼가 상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도약했다. 이시현은 편히 잠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제일 처음 볼 뉴스는.

그건 아마도.

“긴급 속보입니다!”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신…….”

“대통령께서 사지가 잘린 채 자택에서 사망하시고……!”

“벽면에 잘린 신체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범인의 메시지가……!”

“범인은 야당 대표로……!”

“야당 대표는……!”

“실로 끔찍한……!”

룰의 추가는 다름 아닌 다잉 메시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냥 메시지.

목표를 지정한 자의 이름을 더한 문구, 소위 ‘야당대표 모모 씨가 대통령을 죽이라고 했다!’는 식의 글귀를 현장에 남겨두는 것.

이시현은 새벽녘에 일어나 TV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몸서리치고, 언성을 높이며, 아는 바가 없다는 사망한 대통령의 입버릇을 외치는 야당 대표를 바라보았다.

야당 대표는 갑자기 공책을 주고 죽이려는 사람 이름을 말하라고 하고, 그보다 나은 점을 설명하라는 소녀의 말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소녀가 정말로 대통령을 암살해버린 것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거기다 그는 모르는 룰 때문에 ‘그가 죽이도록 사주했다’는 글귀가 남아있는 글은……?

“끝끝내 버텨봐. 그리고 다시 사용해 봐. 이 유용한 살인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위기는 가뿐히 뛰어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사용하지 못하면 네가 죽을 테니까. 그리고 사용할 때마다 당신의 이름이 현장에 쓰여있을 테니까. 시작이 어렵지. 하지만 이어가는 것도 열라게 어렵다고. 그게 바로 게임이지. 그래, 게임이야.”

이시현이 날카롭게 웃었다.

“게임, 재미있지 않아? 아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핫!”

국내에서 제일 큰 야당 원내대표는 눈이 퀭해진 채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미복처럼 맵시를 드러내주는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장 차림의 여성이었다. 실크햇을 쓰고 있는 그녀는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그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물론 그것만으로 끝나진 않겠지만요.”

야당 원내대표는 눈 밑이 퀭해진 채로 반문했다. 그 며칠동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서 정치괴물로 불리던 이조차 죽을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어째서야…….”

“당신은 저를 만나고, 소원을 말한 후 가정부를 불러 술을 진탕 마시고 잠들었었죠. 그게 알리바이가 되어 죽인 적 없음이 드러났어요. 물론 아직도 매스컴에서는 당신이 살인을 사주했다며 신나게 때려대지만요. 따로 만난 사람이 있나 어쩌나 검찰이 알아보고는 있지만 당사자인 저를 찾을 수 있을리 없죠.”

“어째서 그 시체 곁에 내 이름을 적은 거냐고!”

“의원님 주제에 ‘내가 비리가 더 적어’라는 장점을 살릴 줄은 몰랐어요. 당신도 비리를 저지른 적은 많고, 더러운 짓도 많이 했지만 과연 이 나라의 대통령은 뭔가 다르더군요. 압도적인 비리대장. 비리킹. 민물고기. 비리로 만들어진 인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새삼 목표를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살해했답니다.”

“말하라고 하잖아!”

리퍼가 느긋하게 야당 원내대표의 코앞으로 얼굴을 밀었다.

“자, 다음은 누굴 죽일까요?”

“누굴 죽이다니!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나!”

“음? 설마요.”

리퍼가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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