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7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여자를 끌어들이는 거라면 뭐라도 좋겠지. 조건이 뭐지?”
잭 더 리퍼가 실크햇을 벗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하면 말씀드리죠. 주인님, 지금부터 사람을 천 명. 천 명 죽여주셔야겠습니다.”
“……뭐?”
“사람을 천 명 죽여주셔야겠어요. 그렇다면 저, 살인장군 잭 더 리퍼는 이시현님을 주인님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정액받이가 될게요. 최고의 칼이 되지요. 훌륭한 수단이 될게요. 당신의 말로서, 활약하겠습니다. 당신의 적을 죽여 없애겠습니다. 어떤가요, 굉장히 쉽지 않나요?”
“천 명을 죽이는 게……그게 쉽다고?”
잭 더 리퍼는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그냥, 조금 생각한 것뿐이랍니다. 아직도 ‘그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있는 당신은 이 싸움에서 의미 없는 그 인간다움을 버려주셔야겠다고. 게다가 저의 제안이 취향에도 맞기에 이런 조건을 택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해주시겠어요? 저를 도구로 사용해도 문제없답니다. 그러니까 이시현니……아니, 주인님.”
어느새 잭 더 리퍼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달콤한 체향을 내며, 복숭아향기의 입김을 불었다.
“이제 군주위는 코앞이에요. 조금 무례하고, 조금 오만하고, 조금 과감하고, 조금 세상을 농락해도 군주가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가능하답니다. 자, 저와 함께 죽이러 가시죠.”
죽이러 가자고?
이시현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딱히 충격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이시현은 누구를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어스 엠파이어의 인간으로서, 다른 후계자들은 자신을 광고하듯 알리고자 죽여대고, 심심풀이로 죽여댔다. 이시현 또한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다. 단미애를 괴롭히던 이들을 어떤 게임에 초대했고 죄다 썰리는 꼴을 목격했었다. 하지만 그들을 일부러 죽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덜컥, 하고 심장이 뛴 것 같았다.
사람을 직접 죽여야 한다고?
인간을 벗어났다고, 인간과는 다른 종이 되었다고 이시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직접 죽이자는 말을 들으니 심적 충격이 컸다.
리퍼는 충분히 이시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제가 해결할 테니까. 목표만 알려주세요.”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그저 마우스 클릭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달콤하게.
“누구를 먼저 죽일까요? 텔레토비? 사람 탈을 쓴 원숭이? 여의도 개새끼들? K1 챔피언? 존재하는데 산소를 소비하는 쓰레기?”
리퍼가 열거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를 대상으로라는 건 별로 중요치 않다.
이시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애국심에 “그것들 다 죽여!”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매력적인 조건이긴 했지만 그놈들 때문에 자신의 각오가 흐트러지는 건 싫었다.
이시현은 리퍼를 바라보았다.
리퍼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리퍼. 너 나를 시험하는 거냐?”
“시험? 설마요. 제가 그럴 깜냥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에요.”
다만, 이라고 말하며 본인의 입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저, 약간의 조건을 걸고 있을 뿐이에요. 이 조건 또한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었답니다. 다른 이들도 조건을 내밀었겠죠. 저는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을 생각한 후 제시한 것뿐이고요.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않나요? 자, 누구를 죽일까요? 네?”
이시현은 리퍼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꼈다. 약간은 사실일 것이다. 인간다움을 버려주어야겠다며 운을 뗀 것은 이시현을 조금 바꿔놓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터. 그녀는 군주를 섬기던 장군이다. 군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혈족도 아니고, 5조에 이르는 주민 중에서 딱 128명밖에 없는 절대자를 섬기던 이였다.
스스로는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본의 아니게 잣대를 재고 있을 것이다.
이시현은 그 점을 지적할까 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리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다.
그 말의 무게는 틀림없이 무겁다.
연쇄살인범 조차도 십수 단위가 끝이다. 개인이 백 이상 죽이는 것은 전설적인 업적을 이룬 군인 정도밖에 없을 터. 하지만 이시현은 리퍼를 얻기 위해서는 천 명을 죽여야 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정말로 어렵지는 않다. 이시현은 손 하나 대지 않아도 된다. 억대의 돈도 필요 없다. 그저 목표가 될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명단을 입수, 그 후 리퍼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끝난다. 하루아침에 천 명을 죄다 죽일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열흘 안에 해결이 될 것이다.
간단한 문제다. 이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일을 하지 못하면 리퍼를 얻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공자나 백공자가 얻게 될 힘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이시현은 ‘장군’을 만들 수 있는 왕권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활용을 위해 아껴두고 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시현에게는 장군이 없다.
리퍼를 놓친다면, 그걸로 게임은 끝. 재기도 무엇도 못하고 파멸할 것이다. 흑공자와 백공자 또한 리퍼와 같은 장군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을 터였다. 제안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잔인한 일이 있다고 해도 그 짓을 해내고 장군이라는 힘을 얻을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아니.”
“좋네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씀 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몰라요.”
리퍼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이시현님이 아닌 다른 목숨 천 명과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지니고 있거든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천 명의 목숨과 저. 가치는 누가 봐도 명확하지 않나요? 자, 어서 죽일 사람을 말씀해주세요.”
천 명의 목숨과 리퍼의 획득.
둘 중에서 이시현에게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이시현은 아주 깊게 고심했다.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리퍼가 재촉했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네?”
“……게임을 할까?”
깊은 고민 끝에 이시현이 물었다.
열 가지가 넘는 생각을, 폐기하고 동시에 그 이상의 계획을 떠올리고, 구체화시켜가면서 줄여나가고, 이윽고 하나의 답을 얻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10초 내외. 게임이라는 말에 질문을 이어나가던 리퍼가 입을 다물었다.
“게임이요? 이미 킬 더 킹을 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보드 게임이요.”
“그것 말고. 너와 나 간의 게임……. 아니.”
이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있더군. 사람 이름을 쓰면 죽는 공책 이야기. 사람 이름을 그 공책에 쓰면 사람이 죽는다던가. 그런 것과 같은 게임을 하자. 어때?”
“음? 무슨 게임일까요. 이야기만 듣자면 제법 기대가 되는데요.”
“리퍼를 이용할 수 있는 공책을 만들자. 흠. 그래. 헤르메티카라고 할까?”
“헤르메티카라는 건 헤르메스 문서(Hermetica)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헤르메스 문서.
이집트 나일강 인근의 도시에서 발견된 문서로 헤르메스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헤르메스를 섬기는 신관이 쓴 것일지, 아니면 그에 심취한 학자가 쓴 것일지는 모른다. 발견된 것은 헤르메스 문서의 일부. 다른 기록을 보았을 때 월등한 양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이야기나 그로 파생된 연금술에 관련된 정보, 점성술, 마술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원론과 범신론적 일원론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 문서는 시간을 이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사상가들을 심취하게 만든다.
이시현이 느닷없이 헤르메스 문서, 헤르메티카를 말한 이유는…….
“내가 만들 학원의 이름이 카두케우스니까.”
이시현의 대답에 리퍼는 눈을 가늘게 했다.
카두케우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다. 신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왕권을 상징하는 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얽힌 모양새. 리퍼가 물었다.
“문득 생각해본 건데 어째서 시현님은 학원의 이름을 카두케우스라는 이름을 붙인 건가요?”
“음? 그야.”
이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왕인 나를, 두 명이 가지고자 서로 싸움을 벌이는 모양새가 될 테니까.”
“네?”
이시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너를 믿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까. 나는 말이지. 흑백을 가질 거야.”
“흑공자와 백공자를 무릎 꿇리겠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겠어.”
리퍼의 표정이 묘해졌다. 리퍼에게도 이런 표정이 있나 싶을 정도라 이시현이 당황했다.
“남색? 그런 취향이었어요?”
“아니지!”
이시현은 저도 모르게 리퍼의 머리를 꽁 하고 찧었다. 리퍼가 혀를 빼물고 아야 했다.
“왕권. 내가 가지고 있는 그걸로 왜 내가 아직까지 장군을 만들지 않는지 알아? 그들에게 쓰려고 그래. 왕권은 어떤 인간이든, 장군으로 만들어주는 보물. 당연히 흑공자와 백공자 또한 인간이잖아. 사용할 수 있지.”
“아.”
리퍼가 감탄했다.
“과연. 그렇군요. 평소에는 엄청 쓸데없는 짓이겠지만…….”
“엄청 쓸데없다고?”
“아, 네. 그야……어스 엠파이어의 귀족은 모두 클론을 지니고 있거든요. 본래와 클론의 구별도 안 되고, 무슨 사태가 있어도 그 상황 그대로 클론으로 일어나는 게 가능해서, 왕권으로 무력화시켜도 의미는 없죠. 남자가 여자로 되는 순간 죽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자신이 아니게 되니까 클론 몸으로 되살아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