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5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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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게임이 본 무대에 올랐군.”
느긋하게 입을 열며, 그가 말했다.
탐닉의 군주. 인류 최악의 제국인 어스 엠파이어의 128지배자 중 한 명. 스스로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즐기고 마는 남자. 성격파탄의 극에 이른 이 남자는 보드게임 킬 더 킹의 모든 진행을 맡고 있었다. 그 또한 전대 탐닉의 군주에게서 이와 같은 게임을 제의받았었다. 후계자였던 시절, 압도적인 힘으로 다른 라이벌들을 제거한 그는 오랜 시간을 지나 새로이 열린 이 시대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느려. 지루해. 성장하는 것을 계속 지켜볼까 했지만 이제 슬슬 그도 자신의 길을 자각하고 있어. ‘인간다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애처롭기는 하지만 그런 건 곧 권력과 재물, 그리고 무한한 영광 앞에서 잊히게 되어 있지. 탐닉이라는 건 그래서 즐거운 거야. 덜 중요한 것들을 내동댕이칠 수 있거든. 마음껏 즐기는 걸 찾기 전까지는 곁가지에 시선이 가는 게 당연하긴 하지. 후후.”
탐닉의 군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너희들은 저들 중 누굴 좋게 보았지?”
세 명의 장군이 탐닉의 군주 뒤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소염장군 아그리피나, 살인장군 리퍼, 간음장군 루크레치아.
탐닉의 일족, 그들의 장인 탐닉의 군주를 지키는 최강의 무력. 세 명은 각자 성격도 다르고 하고 있는 차림새는 물론 특기도 달랐다. 하지만 그녀들은 장군이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한 명의 남성을 수호하고 있었고 수호를 통해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하고는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저 세 명의 후계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은 누구였지?”
탐닉의 군주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였다. 이번만큼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저는 주인님뿐이에요.”
“주인님만이 모든 것이랍니다.”
“주인님이라고 말하면 틀린 답이 될까요.”
탐닉의 군주는 세상 끝날 때까지 자신만을 바라볼 여자들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쁘진 않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군. 자, 말해봐. 너희들은 뭐가 마음에 들었지?”
“굳이 말하자면.”
풍성한 백금발을 틀어올린 아그리피나가 반쯤 드러난 젖가슴을 돋보이게 가슴 앞에 모은 후 빙긋 웃었다.
“전 하얀색이 마음에 드는군요.”
“이유는?”
“더럽히고 싶어요. 저 오만한 자존심, 끝 높은 줄 모르는 자기애. 시련 한 번 겪지 않았기에 생성된 성격. 모든 것들을 뭉개고, 무릎 꿇려 발을 핥게 하고 싶어요.”
“너답군.”
소염장군 아그리피나.
달리 로마의 폭군, 황제 네로의 어머니로 유명한 여성.
무수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독부로 이름이 나고, 그리고 아들과도 간통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 그리고 로마 시대 최악의 폭군으로 유명했던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
처녀를 오라비인 칼리굴라에게 잃었지만 서기 15년 전에는 비극도 아니었다. 그 후 파세누스 크리스푸스와 결혼, 곧 과부가 되고, 이어 귀족인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재혼하여 네로를 낳았다. 네로 3세, 그나마 있던 남편도 죽고 황제인 칼리굴라의 남창 레피두스와 관계하며 칼리굴라의 암살을 꾀했다.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추방당했다. 그녀가 죽이려 했던 칼리굴라 또한 이집트 병사에게 암살당하고 제위는 그녀의 숙부인 클라디스우스에게로 넘어갔다. 이런저런 일로 숙부와 결혼, 이윽고 황후에 오른 그녀는 클라디스우스의 양아들로 네로를 추천, 여러 가지 모략을 꾸며 이윽고 숙부이자 남편인 황제 클라디스우스를 독살시켰다.
그 후 황제가 된 네로의 곁에서, 그를 쥐고 흔들려다 실패, 다리를 벌리고 네로를 성의 유혹에 빠트렸고 목숨을 부지했다.
실로 다사다난했던 인생. 그 인생의 끝에 주어진 것은 그런 여성이면서도 역사 속에 확실히 이름을 남기고 존재했던 그녀의 삶이었다.
풍만한 가슴 사이 검게 그늘진 가슴골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보라색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그리피나가 요염하게 웃었다.
“이것도 틀림없이 관심이라고 볼 수 있겠죠. 으응. 네, 저의 대답은 마음에 드셨나요?”
“그럭저럭. 그럼 다음은?”
“음, 제가 말해야 하나요.”
간음장군 루크레치아.
눈부신 금발머리를 곱슬곱슬하게 늘어뜨린 미모의 여성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금발위에 덮은 검은색의 두건은 수녀의 베일이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15세기 이탈리아, 한 나라의 모든 경제와 사법, 정치 및 종교를 쥐고 흔들었던 보르자 가문의 여식.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할 때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이 된 남자의 여동생이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드르 6세, 그리고 체자레 보르자 사이에서 그녀 또한 엄청난 삶의 질곡을 겪으며 정치와 성교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모든 사람이 아는 근친상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죄다 권력의 희생양으로 삼게 되었다. 팜므 파탈의 전형, 그리고 최고의 요부.
“전 아무래도 흑색이네요.”
“이유는?”
“아무래도 압도적이기 때문일까요? 적으로 맞이하면 몹시 피곤할 유형. 그리고 자신의 아군이라고 한다면, 그의 밑에 기어 들어가야 될 것 같은 잔인함. 처형에 아무런 주저도 없고, 용서도 없고, 자비도 없고, 이유나 사정 따위도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편이 아니면 모두를 죽여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는 잔인무도한 사람. 전형적인 폭군이자 군주감이네요. 적이 없으면 아군을 죽이겠죠. 그러니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바쳐야 할 텐데, 그런 건 꽤 재미있을 것 같아요.”
“흐음. 그래? 하긴. 그렇군.”
아그리피나는 백공자 샤를을, 루크레치아는 흑공자 게인을 택했다. 그녀들의 상성 문제다. 탐닉의 군주는 대답하지 않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실크햇을 쓰고 있는 작은 체격의 소녀였다.
“리퍼.”
“네. 저는 아무래도 회색이네요.”
“회색. 의외군. 아무 것도 볼 게 없지 않나?”
“음~. 그러네요. 흑이나 백과는 비교하기 어렵겠죠, 아무래도.”
“그런데?”
모자를 벗어 머리를 툭툭 흔든 후 리퍼가 말했다.
“불완전하니까 훌륭한 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건 무슨 말이지?”
“완전한 사람은, 완성된 사람은 무기 같은 거 필요 없잖아요. 50레벨이면 잡을 수 있는 최종보스를, 99레벨까지 키운 캐릭터라면 무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겠죠. 하지만 20레벨, 30레벨 밖에 안됐는데 최종보스를 잡아야 한다면, 틀림없이 뛰어난 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탐닉의 군주가 빙그레 웃었다. 교활하고 음침한 미소였다.
“너는 그런 무기냐?”
“민망하긴 하지만요.”
“하지만 흑과 백도 완벽하진 않아.”
“그리고 그만큼 절 덜 필요로 하겠죠. 그네들에게는 이미 최고급의 무기가 갖추어져 있으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제가 저 게임에 던져놨으니 책임질 거라면 제가 정리하는 게 좋겠죠.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된 요소도 있고요.”
리퍼의 말은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알아들었다. 탐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어머, 정말요? 놀랍네요.”
“뭐 가벼운 장난이었지. 그걸 네가 알아챌 줄은 몰랐다만…….”
리퍼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아그리피나와 루크레치아가 고개를 좌우로 갸웃했다. 마치 짜고 한 것처럼 동시에 좌우로 기울인다. 리퍼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 말했다.
“회색도 사실은 주인님의 자식이었다는 말이지요, 엣헴.”
“어머, 정말요?”
“그래서 바동바동 거렸던 거네요.”
놀랍다는 듯 두 명의 장군이 감탄했다.
“저는 영혼의 본질을 획인하고 색깔을 볼 수 있잖아요. 어쩜 주인님에는 못 미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로 영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 않겠어요? 외형이야 어쨌든 본질을 확인한 이상 이거다, 싶었던 거죠.”
리퍼가 우쭐대면서 회색을 선택한 본인의 탁월함을 자랑했다. 두 명의 장군은 마치 짠 것처럼 눈을 함초롬하게 뜨고 그녀를 먼눈으로 응시했다.
“아무튼 저는 회색 편이네요. 아그리피나와 루크레치아도 회색 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회색이 진정한 주인님의 적손이랍니다. 주인님이 후계자로 고려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고요.”
“별로 후계위로 고려하진 않아.”
탐닉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방금 말 취소!”
“뭐 후계자가 되었으면 제일 좋을 것 같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럼 방금 한 취소를 취소!”
“뭐 취소하든 안 하든 내겐 중요한 게 아니지. 너희 셋은 말이야. 너희들이 마음에 든다고 한 녀석들 밑으로 가라.”
“네?”
세 명의 목소리가 합쳐져 들렸다.
“이제 힘을 키우고 신경전을 벌이는 건 지겨워. 그런 건 싸우면서도 할 수 있잖아. 세력을 다지고, 확실한 한 방을 위해 아껴두고, 시간을 끌고, 이러는 건 재미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쪽으로 기어들어가. 그리고 싸워. 너희들끼리 죽여. 어차피 놈들은 페널티를 두려워하고 ‘자신이 저지른 듯한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막바지로 이르고 있잖아. 그걸 마무리짓게 해.”
세 여성의 눈이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탐닉을 버리고 유희로 향한다. 나의 직속상관이자 군주혈족의 우두머리인 유희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되겠지. 그런데 그때 군주로서 지녔던 장군 전부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더군.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최강의 패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갈 생각이야. 즉 너희를 버리겠다는 말이지.”
아그리피나가 물고 있던 손톱이 깨졌다. 리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루크레치아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는 없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 군주의 호군(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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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제목 그대로 끝이 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