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11화 (111/141)

< -- 111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결전태세>.

폰이 지니는 특권으로, 뛰어난 특기다.

폰의 룰을 지키는 한 결전을 대비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즉 신체능력이 향상된다. 폰은 체스에서 가장 약한 말이지만 범위에 있다면 누구라도 게임에서 제거할 수 있다. 결전태세는 그런 폰의 위치를 살렸다.

다른 고급의 말이 있더라도,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결전태세>. 폰과 같은 위치의 ‘졸’이 아닌 ‘상’의 자리를 맡을 수 있는 무장이라고 해도, 그리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이유다.

고유미는 생각이 길어진다고 느꼈다.

안미희 또한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건.’

‘도대체.’

‘뭐지?’

‘잠깐만.’

몇 초가 넘어갈 것 같은 의혹. 사고의 연속. 고유미와 안미희는 당혹감을 느꼈다. 생각이 너무 빠른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시간이 느려지고 있다. 고유미의 공격이, 안미희의 회피가 느려졌다. 고유미의 공격은 명중할 것이 분명하고, 안미희의 회피 또한 성공한 것은 분명했지만, 임정아의 주변 시간이 느려지는 것도 확실했다.

임정아는 방비를 갖췄다. 그녀만큼은 이런 느림 감각 속에서도 평소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고, 고유미의 너클을 칼로 내리찍어 궤도를 빗겨나게 만들고, 안미희의 눈꺼풀을 살짝 벨 정도로 휘두를 수 있었다.

-까앙!

쇠가 튀기는 소리.

그리고 극히 미세한 소리지만 살갗이 찢기는 소리도 들렸다.

고유미는 반격을 두려워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서 방비자세를 갖췄고, 안미희는 그 핏물로 시야가 덮이기 이전 몸을 튕겨 뒤로 힘껏 물러났다. 두 명의 폰이 거리를 벌렸다. 대비를 한다. 특기가 사용되었음을 느낀다. 특기가 아니라 말로서 지니는 특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임정아를 응시한다. 임정아는 두 자루의 비수를 가슴 앞에 세웠다.

“방금 뭐였지?”

시간이 느려졌다. 최소한 움직임은 느려졌다.

고유미의 물음에 임정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유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엔 고유미가 방어를 할 시간이었다. 고유미가 양 주먹을 움켜쥐고 버클의 압력을 느꼈다. 비수는 빛처럼 달려든다. 고유미가 비수를 후려쳤다. 임정아의 손이 크게 뒤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가슴의 상처가 벌어졌다. 너덜너덜 타버린 육체 안쪽, 피가 샘솟아 오른다.

-까앙!

-깡!

-꽈앙!

1초에도 열 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고유미의 약점을 파고든다. 두 자루의 비수를 역수로 쥔 임정아의 공격은, 부상 입은 것도 신경쓰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광전사의 일격처럼, 숨쉴 틈도 없이 휘둘러댄다.

고유미의 방어는 튼튼했다.

<결전태세>를 발동한 것은 임정아의 특기가 사용된 후. 그 덕분에 부상을 입은 임정아에 비해서 다소 밀리던 고유미의 반응은 호각에 가깝다. 이대로면 이기는 건 시간문제다. 고유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오감으로, 육감으로 임정아의 공격을 버클로 모조리 쳐낸다.

안미희는 생각에 잠겼다.

주변의 공간이 느려지는 특기. ‘상’으로서의 특권인지, 무장이 지닌 특기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언제라도 다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횟수제한 같은 것은 있을 터. 안미희와 고유미, 둘 다 영역 내에 들어가 있을 때 사용했으니까. 되도록 아끼면서 쓰고 싶을 터였다.

대책은 정해졌다.

원거리에서 공격한다.

안미희는 자신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튀었다. 피를 손바닥으로 받아내고 손바닥 전체로 벽에 문질러 마법진을 그린다.

특기 <피의 주법>.

마법진에서 떠오른 이글거리는 핏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임정아의 등을 노리고 날았다. 임정아는 그것을 모른 체 했다.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체 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임정아는 그대로 고유미에게 돌진했다는 점이다. 고유미를 향해, 일부러 고유미의 범위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비수로 고유미의 관자놀이와 쇄골을 향해 팔을 내리찍는다.

고유미는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티기로 했다. 물론 일격사할 정도의 상처는 입을 수 없으니 살짝 비수의 궤도에서 약점을 피하는 정도로 회피는 해야 했다. 같이 죽으면 이득이긴 하지만, 고유미는 겨우 이런 적과 같이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관자놀이를 노리고 닥쳐드는 비수는 이빨로 받아내고, 쇄골 안쪽을 노리는 비수는 일부러 쇄골 쪽으로 받아낸다.

고유미는 이빨을 악다물고 비수를 받아냈지만 반대편 볼을 비수의 날이 뚫었다. 그리고 쇄골을 가볍게 부수고 근육까지 베어내지만, 딱딱한 뼈마디에 걸려 비수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대신 고유미의 주먹은 임정아의 복부를 후려쳤다. 버클을 낀 주먹이 임정아의 몸을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느낀다.

살을 찢어야.

그리고 내장까지 파고들고, 등을 뚫어야……하는데…….

고유미의 주먹에 저항하지 않은 임정아는 공중으로 치솟았다. 임정아의 살은 찢기지 않는다. 내장까지 파고들지 못한다. 등을 뚫고 고유미의 주먹이 꿰뚫지 못한다. 대신 어마어마하게 질긴 가죽에 맞은 샌드백처럼, 임정아는 공중으로 몸을 띄웠고 등을 노리고 날아오는 피의 불덩어리를 패해냈다.

고유미의 눈이 아득해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임정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안미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의 특권. 흑공자가 택한 보드 게임은 장기였다. 그리고 장기의 말 중 하나인 상은, 일반 졸이나 심처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와는 달랐다. 그리고 측천이 맡고 있는 포병과도 달랐다.

임정아가 지닌 상의 특권은 <가죽방패>.

다단계에 빠진 임정아가 흑공자에게 사로잡혀, 그의 게임에 휘말려 살아남은 그녀는 당연하게도 육노예처럼 굴려졌다. 그리고 흑공자의 도구에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서 비로서 특기 비슷한 특권을 획득했다.

<가죽방패>.

상, 즉 코끼리가 지닌 두꺼운 가죽처럼, 그녀 또한 ‘무두질할 수 있는 도구’, 즉 날이 달린 무기가 아닌 한 상처입지 않는다. 주술과 마법은 또 다른 분야이기에 거기에까지 면역은 없지만, 버클은 범위의 안쪽. 상의 특권인 <가죽방패>는 버클을 낀 고유미의 공격을 완벽히 버텨내고, 충격을 해소했다. 대신 고유미가 휘두른 주먹의 운동량은 남아서 임정아는 허공으로 날 듯이 떠올랐다. 이 결과 또한 임정아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녀의 등뒤를 노리고 날아온 피로 만든 불덩어리가, 임정아를 지나 고유미를 향해 날아들었으니까.

-콰앙!

임정아가 미소 지었다.

잽싸게 회수한 비수 두 자루를 역수로 쥐며, 그녀는 허공에서 곡예하듯이 몸을 놀려 이동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여자가 한 명.

그리고 아연한 표정의 여자가 한 명.

고유미와 안미희는 완벽히 임정아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임정아가 안미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미희는 자신의 공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고유미를 보며 당혹해했지만, 임정아의 반응에 피의 주법을 펼쳤다.

고유미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자멸하듯이 돌진했던 임정아. 그녀에게 남은 피치못할 약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그 피를 안미희는 이용할 수 있었다. 안미희의 공격이 ‘물리적인 힘’이 아닌 상태에서 <가죽방패>는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다. 고유미가 무력화된 이상 임정아가 신경써야 할 대상은 안미희, 그녀. 안미희의 주법이 완성되고, 안 그래도 심한 부상을 입은 가슴이 갈가리 찢길 것처럼 터졌다. 고통을 무시할 수 있다고는 해도, 완벽하게 고통을 모르는 이가 아니기에 임정아는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악물고 공격을 버텼다.

대신 그녀 또한 상대방에게 욕설이 나오게 할 수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미희의 목과 눈을 베어 피거품이 섞인 비명을 지르게 만든 임정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를 악물고, 몸의 부상을 살핀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피로 만들어낸 폭발. 예전에는 없었던 반응이다. 안미희는 첫 전투 이후로 발전한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피의 주법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임정아는 살이 완전 파헤쳐져 뼈가 드러날 지경의 부상에 신음했다. 상체에 감각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임정아는 비명을 지르다 찢겨나간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는 안미희의 머리를 걷어찼다. 머리가 떨어져 벽에 세게 부딪쳐 쓰레기 뭉개지는 소리가 난다.

임정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의식이 흐려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고유미에게 향했다. 고유미는 피의 주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에 직격당해, 완전히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살갗이 죄다 사라지고 피와 근육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 무장으로서 지니는 생명력.

“흐.”

임정아가 웃으며 발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드러나는 더욱 짙은 그림자. 그녀의 발그림자는 고유미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내리 찍었다. 두 번째로 들리는 쓰레기 뭉개지는 소리.

임정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확실하게 시작된 전쟁.

성전의 서막.

킬 더 킹의 진정한 출발은.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겼어요! 주인님! 아, 저의 주님이시여! 이겼어요! 제가 이겼어요!”

임정아의 승리선언에서 열렸다.

***

흑과 백의 대리전은 흑의 승리로 끝난 모양이었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졌지만 생환하여 골목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는 임정아. ‘순진하고 멍청했던’ 여성에서 무장이자 말로서 완성된 이였다. 극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녀는 생환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조폭들이 급히 차량을 몰고 와서 그녀를 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골목에서 작은 소녀가 걸어 나왔다. 알몸에 긴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골목으로 들어갔었던 안미희가 반 이상 작아진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다. 피의 주법을 다루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생환기술인 <소생하는 생명>. ‘살아나는 수가 있다’는 생각에 임정아가 안미희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냈지만, 그러고도 <소생하는 생명>은 사용되었다. 5세 미만의 소녀로 돌아온 안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울 내 CCTV의 70%를 지배했기에 어두운 곳에서 일어난 전투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었어요. 자, 나의 주인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늘어뜨린 여성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회색의 머리칼을 눈을 덮을 정도로 기른 청년이 잠자코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걸 물어야 아나?”

“그렇진 않지만, 확인하고 싶어서. 죄송해요, 여자란 이렇게 약한 생물이랍니다.”

“그런가. 그럼 대답해주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날로부터 3개월.

3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변치 않는 미모를 자랑하는 회색머리의 청년, 이시현이 가늘게 웃었다.

“나의 시작은 저 둘의 두 번째 싸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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