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맞은편의 여성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긴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굉장히 이지적인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투피스 또한 요염하다기보다는 성숙하다는 느낌이 풍기는 복장.
“네년은?”
안경을 쓴 성숙한 미녀가 물었다. 임정아가 대답했다.
“임정아. 상(象).”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안경을 쓴 성숙한 미녀는 임정아를 바라보고, 그녀가 쥐고 있는, 두 자루의 비수를 보며 미소했다.
“과연. 나 또한 대답하지. 나는 폰. 이름은.”
“필요 없어.”
임정아가 말을 끊었다.
타인의 말에 쉽게 넘어가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임정아는 이제 없다.
“죽어 나자빠질 년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 없거든.”
껑충 하고 뛰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이 코앞까지 닥쳐든다. 안경을 쓴 성숙한 미녀는 겨우 두 번 뛰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껑충, 껑충, 두 번 도약해서 코앞까지 닥쳐든 임정아가 교차한 팔을 풀었다. 두 줄기의 긴 상흔이 안경을 쓴 성숙한 미녀의 가슴을 베었다.
살갗이 베어져나가고 옷이 뜯어지고, 피했다고는 하지만 살갗 안쪽 근육까지 도려져 피가 뿜어지는 가운데 미녀는 싱긋 웃었다.
“내 이름은 고유미.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날 못 죽일걸.”
미녀의 웃음이 도발임을 판단한 임정아가 재차 공격하려 할 때였다.
임정아의 뒤에 나타난 한 명의 여자가 임정아의 몸에 흩뿌려진 고유미의 피를 터뜨렸다. 임정아의 몸 일부가 터져나가며 그녀 자신의 피가 사방에 튀었다. 순식간에 반쯤 넝마가 된 임정아가 고개를 돌린다.
안경을 쓰고 있는 연갈색 머리칼의 여성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안미희. 같은 폰이고, 피를 조종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뒈져.”
***
3개월이 지났다.
이전까지는 흑공자와 백공자가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영역을 넓혀 가는가 싶더니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결국 파국은 결정.
전쟁이다.
팻감은 슬슬 만들어졌다.
게임을 다시 시작해도 문제가 없다.
고유미. 안미희. 둘 모두는 백공자의 폰으로 선정되었다.
사회에서 혁혁한 역량을 쌓고, 폰으로서의 재능에, 현 시대에선 두각을 드러낼 수 없던 재능을 백공자의 지원하에 마음껏 드러내는 자. 하지만 그녀들이 꿈꾸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적을 쓰러뜨려야 한다. 그녀들은 화려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백공자가 열어준 미래에 기뻐하고 있다. 나락까지 떨어진 과거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반면 흑공자에게 선택된 여성인 임정아는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다시 없을 고문 속에서 죽어버릴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주어진 말은 상. 일반 졸이 아니라 상이라는 상당한 지위다. 차와 포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졸과 같은 것보다는, 사처럼 심처를 사용하지 못하면 약화되는 여성들보다는 월등히 강력한 것이다.
이기면 찬란한 미래를 보여주는 것, 실패하면 죽음이 행복해질 미래를 보여주는 것.
둘 중에 뭐가 효율적일지는 가치판단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두 패거리 모두 승리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 싸움. 그 싸움은 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치열하다.
임정아는 큰 부상을 입었다.
안미희, 적 백공자가 선택한 게임의 말 중에서 가장 약한 말이 치명타를 먹였다. 폰 주제에 강력한 특기가 있다. 혈액조종. 혹은 혈액폭발. 잘은 모르지만 상대의 피를, 혹은 자신의 피를 터뜨리고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임정아는 안미희를 상대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흑공자의 말과 싸운 상대로서 안미희를 알고 있었다.
살갗이 찢겨나가고 근육의 일부가 함몰됐다. 자신의 작은 부상이 큰 부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임정아는 고통에 양미간에 주름을 그리면서 안미희와 고유미를 바라보았다.
고유미 또한 임정아가 휘두른 비수 때문에 가슴이 좀 베였지만 일부러 피를 내기 위해서 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임정아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고유미는 핏물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부푼 가슴에 침을 흘려서 문질렀다. 벌어진 옷 사이로 떨어진 타액이 고유미의 상처를 낫게 만든다.
두 명의 무장이, 말이 임정아를 상대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폰이기에 둘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안미희가 이미 상대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기 때문에 지원차 보낸 걸까.
아무래도 좋다. 임정아는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러고서도 두 명의 폰에게 질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상대해줄만 하네.”
폰과 상을 교환하는 거라면 당연히 상이 큰 손해다. 물론 임정아는 먹힐 생각 따위가 없다. 두 명의 폰을 쓰러뜨린다.
성대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첫 전투. 전투에서 임정아는 질 생각 없다.
임정아는 두 자루의 비수를 쥐었다. 상체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신경 줄까지 잡아서 늘어뜨리는 흑공자에게서 조교 받았다. 빚이라는 짐 때문에 흑공자에게 신변을 맡긴 그녀는 빚을 넘어선 고통에 이미 항체를 가지고 있었다.
임정아가 비수를 가슴 앞에 모았다. 핏물이 상처에서 흘러나오고, 폭발한 흔적이 죽을 것처럼 아팠지만 임정아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대신 앞뒤로 포위한 고유미와 안미희를 느끼고 대비했다.
“덤벼.”
고유미와 안미희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임정아와 마찬가지로 그녀들 또한 패배는 생각하지 않는다. 안미희는 무장치고는 육체적으로 상당히 약하다., 정확히는 무장이 아니라 주술사와 같은 위치에 있다. 물론 일반인보다는 강하다. 그것도 월등히. 그렇지만 무장과 전면전을 벌일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임정아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고유미였다.
고유미는 버클을 주먹에 꼈다. 원만한 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도구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고유미는 휙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임정아의 정면에 선 그녀는 몸을 낮춘 후 임정아의 품으로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임정아가 거리를 내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휙 하고 스웨이로 몸을 피하고 두 자루의 거꾸로 쥔 비수로 오히려 고유미를 내리찍었다. 고유미의 일격은 실패, 임정아의 반격은 고유미의 버클에 막혔다.
-까앙!
쇠가 울리는 소리.
쇠로 된 버클과 강철로 된 비수가 맞부딪쳐 불똥이 튄다. 불똥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공격을 이어간다. 둘 모두 무기의 길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임정아가 조금 더 길기는 하지만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 수준. 주먹에 낀 버클과 두 자루의 비수가 연신 부딪친다. 고유미는 아직 공격을 먹일 거리를 좁히지 못했고, 임정아는 잘 막아내고 무기가 되는 고유미의 주먹을 노리고 있었다.
일견 임정아가 유리한 상황.
하지만 점점 그녀의 반격은 느려지고 있었다. 당연히 핏덩어리가 터져 만들어진 부상 때문이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부상. 그 부상을 임정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고 있었다.
“지금!”
고유미가 외쳤다. 안미희가 뒤에 있다가 달려들었다.
임정아는 그녀까지 신경을 썼기 때문일까, 일순 틈이 보였다. 고유미는 그 틈을 향해 파고 들었다. 임정아의 비수가 튕겨낼 수 있는 거리, 그 안쪽까지 들어왔다. 고유미는 틈으로 파고 든 후 임정아의 옆구리를 향해 버클을 낀 주먹을 휘둘렀다. 동시에 안미희는 그녀의 눈을 노리고 수평으로 그어 온 비수를 피했다.
성능차이가 있더라고 해도 그 성능차이가 절대적이지 않는 한 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그것도 한 명보다는 둘. 고유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의 주먹에 꿰뚫릴 임정아의 최후를 기대했다.
안미희도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부상을 입혔고, 앞뒤로 포위했고, 그리 밀리지 않는 고유미가 상대하고, 한미희가 뒤를 급습하여 틈을 만든다. 매우 유리한 작전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무장으로서의 그녀들은, 게임의 말로서 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폰의 자리는 딱히 다른 것이 없다. 폰으로서 특권은 <결전태세>라고 하는 특기를 지니게 된다. 즉 승부에서 상대가 물러나지 않으면 그녀들 또한 물러날 수 없다.
백공자가 선택한 보드 게임, 체스의 룰.
폰의 경우 앞으로 한 칸씩 움직이고 뒤나 옆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단 상대편의 말을 잡을 때에는 대각선 방향으로만 잡을 수 있으며 정면의 말은 잡을 수 없다.
정면의 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은 제외된다. 옆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건 무시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상대가 죽거나 후퇴하지 않는 한, 전장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주박을 안고 있다. 다만, 그에 대한 특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