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08화 (108/141)

< -- 108 회: 9> 마지막이 가깝다. -- >

***

심장마비, 자해, 신경쇠약으로 인한 병동생활.

느닷없이 유럽, 영국에 유령소동이 번졌다.

수천 명이 넘게 유령을 보고 공포에 빠지고 악몽에 시달려 절망하고 있었다. 죽은 이들은 여럿. 그 중에는 샤를을 고소한 이들도 있었다. 영국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실제로 촬영된 영상 속에는 금색 롤머리 미녀가 있었다. 수천이 넘는 유령 사이에서 창백한 피부를 빛내며 오만하게 미소 짓는 여왕. 십자가 모양을 한 가는 검을 들고, 허리춤에는 장미가시가 박힌 녹색 채찍을 들었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비견할 수 있는 영국 문화의 거리 웨스트엔드, 그곳에서 화려한 뮤지컬이 시작되는 가운데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난반사가 이뤄지더니 뮤지컬 배우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나타난 미모의 여성.

유령들이 귀곡성을 울리며 소름끼치는 노래를 하고, 배우들의 몸에 빙의되어 배우들을 대신해 뮤지컬을 그려나간다. 잔혹한 죽음, 실제 배우들이 뮤지컬의 연극에 따라 죽어나가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공포를 되찾고 도망치려 한다.

거듭되는 유령소동.

그리고 오만하게 미소 지으며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금발의 여성. 뮤지컬의 상영은 멈추었다. 뮤지컬 대부분의 특성상 죽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유령에 빙의당해 실제로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이 없어도 웨스트엔드를 점거한 유령들은 뮤지컬을 계속했다. 유령의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희뿌연 형체들이 인간으로 변하여 뮤지컬을 연극한다. 사흘이 넘도록 웨스트엔드를 차지한 유령들의 연극은, 이제는 다른 의미로 인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령들의 뮤지컬을 본 이들이 시름시름 앓고 공포가 영국을 지배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인간들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아, 죽음을 각오한 카메라맨이 유령들만의 뮤지컬을 촬영했고 유튜브에 전파했다. 유래 없이 많은 조회수와 함께 최장시간에 가까운 재생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홀린 듯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그 영상에 몰입한 이들은 정기를 빨린 듯 기력이 쇠하고 병실에 드러눕고, 일부는 죽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연극에 극찬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뮤지컬에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시현도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보았다. 예상대로 홀린다. 유령들이기에 반투명한 건 당연하고,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기괴하게 몸을 비트는 등으로 감정을 극대화한다. 비용을 아끼지 않고 터뜨리는 하이라이트. 울려 퍼지는 노래는 유령들이 혼을 쥐어짜는 듯한 고스트 송.

혼이 빨리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도 이 감동은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그렇게 보였다.

“저게 그 소문의 퀸인가? 흰둥이의 장군?”

이시현도 이제는 보는 눈이 있다.

무장과 장군의 격차는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유령들 사이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여성은 분명히 장군이었다. 아마도 퀸. 백공자 샤를의 곁을 지키고 최강의 힘을 가진 여성일 터였다.

“기억납니다.”

손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요. 저 얼굴. 이름까지는 잊어버렸지만 저 여자는 장군이 맞아요.”

“장군이 도대체 왜 저기서 저런 걸 하고 있는 거지?”

“흰둥이의 취향 아니겠어요?”

“흰둥이를 고소했던 이들은 죄다 심장마비니 뭐니 해서 죽었긴 하더라만…….”

이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페널티를 피해가는 방법도 간사하군. 검둥이는 아예 미친놈처럼 살더니 흰둥이는 쓰레기가 따로 없어.”

“현 시대의 행정으로 귀신에 놀라 죽었다는 이들을 타살로 인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손적은 백공자의 일처리에 감탄한 눈치였다.

흑공자 게인은 사건을 벌여놓고 모인 이들의 지도자들을 쓰러뜨려 와해시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적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괴팍하고 난폭하다. 신속하고 깔끔하다. 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적이 끌어 모은 세력은 일망타진됐다.

더욱이 이들을 잡아야 할 경찰지도자들은 외부의 공격에 암살당했다. 당분간 공권력은 무용지물. 깡패들 그 사이에 흑공자 게인은 인천을 잡아먹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이다. 뒤에 군대가 들어오거나 엄청난 제약이 닥칠 수도 있으나 그건 나중 문제다. 흑공자가 이런 행동을 통해 군주가 될 수 있다면 이 나라의 공권력과 무력 따윈 의미를 잃는다.

무식하게 행동하고 터무니없이 잔인하지만 그 단순명료함이 부럽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백공자는 반대였다.

무언가 다른 일로 세상의 주목을 이끌어두고 그 와중에 자신이 목표한 이들을 죽인다. 이시현은 그의 생각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퀸이라 불리는 장군의 특기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거물들을 다 죽여 놓고도 별다른 이야기가 돌지 않게 수를 쓰는 건 참 기가 막힌 일이었다. 감탄마저 나왔다.

“그런데 왜 퀸을 가지고 저런 일을 벌이지? 이제 목표한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까 끝난 일 아닌가?”

“취향인 모양이죠.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거나.”

이시현 정도 되는 사람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

퀸이 유령들과 함께 영국 땅을 밟은 것은 백공자 샤를을 괴롭히는 명사들을 죄다 죽여버리기 위함이었다. 외부에는 ‘많은 희생자 중 일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사람들. 그들은 모두 죽었다. 그렇다면 백공자 샤를은 일의 종료를 선언하고 다시 게임의 무대로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직도 유령소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령소동은 정점을 찍었다.

영국의 유령소동이 나흘 째 되는 날.

수백, 수천의 유령들은 한 명의 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열연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부터 웨스트엔드에서 탄생한 세계 4대 뮤지컬까지. 유튜브에서는 악마의 공연이다 귀신의 현혹이다 하는 요청으로 삭제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렇다고 꺼지지 않았다. 암암리에 전파되고 감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사람들은 많은 종교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스트엔드에 들어섰다.

연극을 하지 않는 유령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천정으로 날아올라 까르르 웃어대는 가운데, 사람들은 오만하게 황금의 옥좌에 앉아있는 여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밝은 금색의 롤머리를 늘어뜨린 데다, 작은 티아라까지 하고 있는 미녀. 젖가슴의 절반이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여성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뮤지컬을 상영하기 위해 분주한 유령들 사이에서 여성은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켰다.

“슬슬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아졌어.”

그녀의 목소리는 톤이 높으면서도 잘 울렸다.

바리톤 특유의 중후함과 소프라노의 맑은 울림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지루해하면서 불쾌해하자 한 명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뮤지컬계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작곡가이자 최고의 배우를 발굴하기도 하고,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 거대한 극장을 소유한 그룹의 대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가씨.”

“지껄여봐.”

여성은 대답했다.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여성은 쿡 하고 웃었다.

“여왕(Queen).”

“어떤 여왕이십니까?”

“눈앞에 여왕을 목도하고도 그리 되묻다니 예의가 없군. 이 넘치는 기품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그래보여도 제법 재주가 있는 남자인 줄 알았건만, 눈앞의 상대를 보고서도 정체를 묻는다는 말이냐? 무례한 놈. 닥쳐.”

질문한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쏘아댈 줄은 몰랐던 듯 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숙이면서도 맹렬히 여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떠오르는 이름이 몇 가지가 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여왕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해 보거라.”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연극을 보고 있지. 나의 충실한 시종들은 무료해하는 나를 위해 이런저런 놀이를 준비해주었노라. 나는 그런 걸 좋아하거든. 연극이며 뮤지컬을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의 무도회를 위해 혼신의 연기를 하고 있노라.”

“무도회입니까?”

쿡, 하고 여왕이 웃었다.

“그래. 무도회지. 나흘 째, 아직 즐길 거리는 제법 남아있지만 이제 사람들이 늘어나서 기분이 나빠졌거든.”

“그럼 이 연극과 뮤지컬은 그만둔다는 말인가요?”

“그래. 다행으로 생각하려무나. 더 이상 시종들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유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가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반응으로 여왕은 눈을 고혹적으로 감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머리가 나쁘지 않구나.”

“그런 겁니까?”

“그래. 그런 거야. 묻도록 하지. 나의 시종들인 유령들은 어디서 왔다고 보이는가. 시종들이 연기하는 무대에 홀려 이 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지. 현실을 잊고 이 나의 뒤를 따르며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들이야.”

“이 유령들은 결국……!”

“그래. 예상한 대로다. 나를 위한 연극에 홀려, 현실을 잊어버린 이들. 이 현실보다 나의 뒤를 따르며 이 한 여름밤의 꿈을 꾸고자 하는 이들인 것이다. 시종의 수를 조금 더 늘리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이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 그래서 오늘로 끝낼 생각이다.”

“그, 어, 저 잠시만요.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군. 딱 한 가지만 더 듣겠다. 말해봐라.”

“시종이 된 이는 되돌아올 수 있습니까?”

여왕이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 생각이지?”

남자는 말하지 못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로 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현실의 일부라면 깨어난 현실은 손상이 있겠지. 마지막 연극이다. 닥치고 앉아서 지켜보도록 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여왕은 말을 끊었다.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온 이들이다. 음악과 흘러나오는 분위기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동시에 남자 또한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황금의 옥좌에 앉아있던 여왕도 마침 고개를 돌렸다. 싱긋, 하고 미소 짓는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황홀경에 빠진 듯해 보였다. 목숨을 걸고 온 이들 중에는 카메라맨도 있었다. 의외로 이 영상을 막대한 돈을 주고 사서 공중파로 송출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BP그룹의 후계자로 샤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뮤지컬 <          >.

뮤지컬은 공중파로, 그리고 그것을 녹화하여 인터넷으로, 거의 동시간대에 생방송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절없이 가라앉는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며 의식을 잃고, 죽음으로 향한다.

뮤지컬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어떤 연극보다도 아름다웠다. 속속들이 사망하는 가운데, 뮤지컬계의 전설 또한 눈물을 흘리며 죽음에 이르렀다. 그들의 입에서, 머리 위에서, 희뿌연 형체가 나와 여왕의 주변에 맴돌았다. 남자가 예상한대로 연극을 보다 죽음에 이른 이들은 여왕의 곁에 떠도는 유령 시종이 된다.

우우우, 소리를 내며 여왕의 주변을 맴도는 유령은 죽음의 형상화. 시각의 증명.

뮤지컬이 끝났다.

여왕은 몸을 일으켰다.

목숨을 걸고 찾아왔던 관객들은 전원 죽어있었다. 백이 넘는 사람의 죽음. 하지만 그것이 공포스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여왕이 소리 높여 선언했다.

“연극은 끝났다. 나는 이제 돌아가리라. 그리고 다른 연극을 위해 움직이리라. 머지 않은 시간, 나는 다시 나타나리라. 즐거운 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남자가 한 명.

하얀 정장을 입고, 황금의 굽이치는 금발을 늘어뜨린 남자였다.

“마녀로군.”

이 영상을 공중파로 송출하겠다고 주장하여 BP그룹의 엄청난 비난과 돈을 사용한 샤를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걸어왔다.

“다시는 오지 마라.”

“오라고 해도 오지 않아. 그보다…….”

여왕이 흐릿하게 웃으며 유령들을 불러 모았다. 유령들이 여왕의 뒤를 쫓아 우울한 노래를 흘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샤를은 어느새 관객석을 지나 무대로 올라와 여왕을 내려다보았다. 여왕이 올려다보았다.

“미남이군. 내 취향인데.”

“그러는 당신도 아름다워, 아가씨. 아니, 엘리자벳.”

“이런. 내 이름을 알아냈나? 어떻게? 하긴, 이 넘치는 기품 때문에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여기에 없는 이들 중에도 다수 시종들이 생긴 것이 그대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언제고 한 차례 도움을 주도록 하지. 그럼, 잘 있거라. 미남.”

여왕이 손을 내밀어 샤를의 뺨을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샤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친 여왕은 쿡쿡 웃더니 유령들의 품에 휘감겨 나타났던 것처럼 휘릭 사라졌다. 수백, 수천의 유령이 유령의 울림을 토하며 사라졌다. 샤를은 짙은 립스틱 자국이 묻은 입가를 매만지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런, 도도한 여왕님도 내 얼굴엔 홀렸나보군?”

그것으로 공중파의 송출이 끝났다.

유령소동의 끝이었다.

이시현이 질린 표정이 되어 혀를 내둘렀다.

“저 개자식은 정말 저런 게 즐겁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흑공자도 TV를 보고 있었다. 그가 턱을 괴고 있다 미끄러뜨렸다.

“저 지랄을 하려고 저러고 있었던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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