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02화 (102/141)

< -- 102 회: 8> 화려한 나날. -- >

“이 땅에 온 지 며칠 됐다고?”

“사흘입니다.”

“호군이나 무장 아무 것도 없이?”

“네.”

“그럼 이 둘은 뭐지? 권능?”

흐, 하고 정태우가 웃었다. 그는 아직 발코너에 있는 이시현과 레베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든 것을 잃어도……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진다 하여도. 탐닉이 그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최악을 맞이하지 않듯이 고대 역시도 영혼과 존재에 새겨진 권한이 있습니다.”

탐닉의 군주.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 모든 종류의 행위와 종류를 즐기고 그 중에서 가장 즐거운 것을 탐닉하여 그 즐거움을 어스 엠파이어에게 전파한다. 문화의 첨병. 그리고 문화의 주관자. 동영상 사이트인 버서버섯을 운영하거나 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그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과도 다르고, 군주로서 지니는 권능과도 다르다. 마치 운명처럼, 자연스레 부모님에게 업혀 지내다, 바닥을 훑고 다니다 두 발로 서는 어린아이처럼, 탐닉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라면 가지고 있는 본능. 최악을 피하는 힘. 같은 탐닉이 아니고서야 탐닉은 최악의 상황에서 생환할 수 있다.

고대의 군주도 마찬가지.

이시현은 정확히 그의 권한이 무엇인지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대강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강만으로도 굉장히 공포스러운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이시현의 경악에 정태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떻게 가족을…….’

이시현은 정태우의 집 안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접었다.

이들이 ‘이런 성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잃고 귀향 비슷한 처지인 이 조차도 고작 사흘 만에 ‘이런 상황’을 만들고서 즐기고 있었다. 이시현은 가족이 없기에 가족을 범하고 그들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엄밀히 말하면 육체는 혈연일지 몰라도 정신과 영혼 자체는 생판 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냥 외계인이 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니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이시현은 이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족에 내가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이시현이 휴대폰을 꺼냈다. 그것을 확인하는 시늉을 하고서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연락이 와 있군. 차는 나중에 마시지. 그럼 먼저 실례하도록 할까.”

“그렇습니까. 다음에는 티백이 아닌 차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나름 빚을 전부 갚고도 남을 돈이 생겼으니. 아참, 그것을 물어보는 걸 깜빡했습니다. 뭐가 좋으십니까?”

이시현의 변명을 눈치 채지 못하고 정태우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시현은 서둘러 이곳을 나가려 했기에 그의 말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좋다니? 방금 예시를 들었나? 이시현이 반문하기도 전에 정태우가 말했다.

“둘, 고개 들도록.”

둘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이마와 뺨, 턱에는 문신은 아닌 저속한 그림이 매직으로 낙서되어 있었다.

“둘 중에 무장으로 만들 이는 뭐가 좋겠습니까? 취향이 있지 않습니까?”

……정태우는 무장을 만들려 한다. 이시현이 준 장군의 셀로. 여덟 번째 퀘스트를 통해서 획득한 도구는 이시현 본인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겠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고대의 군주에게는 이시현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일 터였다. 그는 무장을 만들 대상을 두 명……혈육으로 잡았다.

“둘 중에서 가슴 큰 여자로.”

“그거 좋은 취미군요. 갓즈 베인(Gods Bane)의 화신도 가슴 마니아라고 하던데.”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둘 중에 하나를 버리기 아깝다면 셀 정도는 구해줄 수 있어. 그걸 원한다면 뭐…….”

이시현은 휴대폰의 액정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전화 한통 하라고.”

***

“미노. 확인했나?”

“네. 도청장치는 없었습니다.”

“놈을 태웠을 때와 달라진 점은 역시 없고?”

“소파 위에 얹었던 쿠션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수단을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이시현은 만에 하나 위험할 경우를 대비하여 필요한 미노를 차량에 대기시켜 두었다. 물론 자신의 위험을 도외시해서는 아니다. 미노의 감각으로 정태우, 즉 고대의 군주가 어떤 수단을 차량에 사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시현은 차량에 올라탄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레베카는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시현을 끌어안았다.

이시현의 눈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감정을 눈치 챈 미노가 입을 다물고 차량을 운전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미친놈.”

차량 내 유일한 남성의 목소리가 그로울링처럼 들렸다.

“그게 저들에게는 상식이라서 그런 거겠죠.”

레베카가 그렇게 넘어가려 했다. 이시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에 눈을 감고 신음했다.

“가족이라.”

“찾아볼까요?”

“됐어. 이제와서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겠어.”

이시현은 긴 한숨을 토했다. 그는 고개를 털고서 문화충격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어, 잠깐. 내 프로필도 알고 있는 거야?”

“어머, 가족부터 공략하는 게 매너잖아요.”

그러고보니 레베카는 JP에서 이시현과의 사업 거래를 위해 찾아온 이다. 신상명세에 대한 거라면 이미 토씨 하나까지 확인하고 찾아왔을 터였다. 그런 거에 당혹해하는 것도 품위 없는 짓이리라. 이시현은 팔짱을 끼고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군주 하나와 안면을 텄군. 나름대로 합의를 이뤄냈고. 다행이라면 다행인데……역시 좀 상품이 아깝긴 하단 말이야. 장군의 셀이니까. 일반 무장의 셀도 아니고. 흠. 그래도 뭐 그 정도면 납득할 수 있지. 사용감이 있지만 괜찮은 무장으로 돌려받을 수도 있을 테고.”

레베카는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았기에 상대에 대한 정보도 모르고 상품이 뭔지, 무엇을 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도 몸으로 로비한 것을 시작으로 세뇌되었고 이제는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JP쪽과 이시현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거래를 트며 한국 정부를 안달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를 납치하려는 이도 실제로 존재하였으나 그녀는 예전에 인간을 그만두었다. 레베카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시현을 위해 그의 성욕을 풀어주기로 했다.

어떻게 쌓인 걸 좀 풀다보면 나아지겠지.

이시현은 태연하게 자신의 아랫도리를 휑하니 만드는 레베카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허공으로 손을 가져갔다. 허공에서 파문이 생기더니 이시현의 손을 잡아챈다. 퀘스트를 통해서 받은 상품을 사용할 때다.

“레베카. 시간 낼 수 있어?”

“얼마나 말인가요?”

“몇며칠.”

“어, 음. 지금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레베카가 탐스럽게 빗은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녀는 바빴다. 해외의 거대한 그룹과 이시현과 막대한 돈이 오가는 거래를 하고 거기에 발을 걸치는 기업과도 연계를 해야 하니까.

강주희는 태양그룹 회장의 여식으로 국내의 기업과 이시현을 엮어주는 관계. 재벌인 강의곤과의 연을 이어주는 존재로 이시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최소한의 무력을 갖춘 무장.

남민아 또한 무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상태. 충성심과 복종을 제외한 능력은 없다.

단미애는 이시현의 성노. 무장으로서의 재능은 톱 2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애초에 워낙 재능이 낮아서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걸 재미있어 한 이시현 때문에 자존심 같은 것이 깡그리 날아갔다.

미노는 이시현의 보디가드. 무장이 되기 전에도 태양그룹 회장의 SP였고 현재는 차량을 몰고 그의 집을 지키는 등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무장으로서의 솜씨는 낮지만 이시현의 진영에서는 실질적인 톱 2.

손적은 이시현의 직속 명령을 통해 흑, 백공자의 전장에 투입. 가장 위험한 선을 오고가지만 능력이 대단해서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진영의 톱 1. 한때 장군이었다는 말이 믿어질 정도.

여덟 번째 퀘스트를 무사히 마친 조건으로 획득한 것은 이름 모를 장군의 셀과 고문관(顧問館)티켓. 군대에서 사용하는 표현인 고문관(拷問官)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넝마로 만드는 고문(拷問)을 주관하는 업소, 아니면 건물 등을 말함이다.

“그래도 네가 레벨 업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돼.”

“제가 확실히 도움이 될까요? 이 세상의 부를 얻고 권력을 누리는 것 외에도 주인님의 싸움에 확실한 도움이?”

“물론. 티켓을 보면 확신할 수 있어.”

레베카는 이 애매한 진영에서 나름 경험을 쌓으면 강해질 수 있다. 무력으로서도, 그 외의 재능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인재다.

레베카는 무장이 된 후 한층 풍만해진 가슴과 혀로 이시현을 즐겁게 하였지만 그가 좀처럼 가지 않자 조급해졌다. 이시현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걸 통해서 레베카를 안달 나게 했고, 그녀는 결국 어떻게 해서든 시간 내보겠다는 말을 한 후에야 그의 정액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쾌락을 쏟아붓고서 이시현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사실은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야. 잘 다녀와.”

“네?”

“그리고 시간 낸 동안 나를 위해 일해줬으면 좋겠군.”

레베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

“이걸 계획하려고 한 말인가요?”

“방금 알았어. 진짜야.”

변명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레베카는 믿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의 이계 여행은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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