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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101화 (101/141)

< -- 101 회: 8> 화려한 나날. -- >

“몸의 단 한 곳도 처녀인 곳이 없을 텐데, 거기다 쓸 만한 구석도 없을 테고, 여행지에서 쓰다가 버려두는 일회용품처럼 쓰레기처럼 만들지도 모를 텐데 그걸 가지고 싶은 거야? 으응?”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늘려 묻는 고대의 군주. 그의 말은 분명히 도발이다. 그러나 그 도발에 먹힐 때는 이미 지났다. 이시현은 불과 1년도 안 된 후계자에 불과하지만 거친 전장에서 암약하며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 되어버렸다. 아직 미묘한 부분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의 의도에 바로 낚이는 멍청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좀 쓸쓸하긴 하겠지. 귀한 장군의 셀을 빌려줬더니 더 이상 기울 것도 없는 누더기 걸레가 되어서 돌아오면. 그렇지만 내가 안기 좋은 여자는 어디에나 있어서 말이야. 굳이 뛰어난 무장에 안는 것도 좋은 여자를 바라는 건 아냐. 나는 그저…….”

“그저~?”

“그래. 그저……흑백 양쪽의 장군이 아닌 이들 중 최강 패를 밟을 수 있는 최강의 무기를 원할 뿐이야. 굳이 꼭 해달라는 건 아냐. 나는 그저 남는 장군의 셀을 건네 줄 뿐이니까.”

“그래. 그저 남는 장군의 셀이겠지. 하하.”

고대의 군주는 실소하고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비틀리고 어긋나던 그의 어조가 바른 목소리를 찾았다.

“믿어달라고 말하진 않지. 기대하라고 말하지도 않겠어. 그런 건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지. 난 그저 휴가를 즐길 뿐이니까. 그렇지만 혹여 모르지. 휴가 중에 대단한 발견을 할지. 아,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줘. 그리고 통장 하나 파주지 않겠어? 서민 한 달 생활비가 얼마더라? 그것보다는 좀 넉넉하게 담긴 통장이 있으면 좋겠군.”

“마련하지.”

이시현 또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이런 일을 주로 해주는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제 사람의 이름으로 통장이 개설되었지만 그 통장의 주인이 돈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대의 군주, 아니 정태우가 사는 집 앞에 내린 그들은 이미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에게서 3억이 들어있는 통장을 받았다. 이시현은 통장과 함께 장군의 셀을 건넸다. 정태우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내 집에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여럿이 들어가 살 만한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정태우의 집은 서울 내 많고 많은 아파트 중 하나였다. 물론 아파트 전체가 자기 거라는 건 아니고. 수억의 빚을 져서 들어왔다가 아파트 값이 내리고 사는 사람이 없어 전형적으로 하우스 푸어가 된 집이라고 소개했다. 정태우는 한 주 전 유채동산가압류, 그러니까 빨간 딱지가 붙었다며 상쾌하게 웃었다.

그게 웃을 일인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정태우의 현 상태를 보고는 내심 납득했다.

아버지는 죽었다. 면목이 없다는 이유였다.

정태우 또한 어떤 이유로 극한까지 치달은 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 또한 생을 포기하려 했을지 모른다. 아니, 이시현이 그랬던 것처럼 정태우의 의지는 무효화 되고 그가 끝내려 했던 삶을 고대의 군주가 이어서 했을 것이 확실했다. 이 세계에서 아무런 걱정 없는 부자의 인생을 이어하면 투덜거릴 수는 있어도 ‘무전여행’이라고 스스로의 처지를 비하하진 않았을 테니까.

정태우의 처지가 엉망이라고 해도 고대의 군주는 눈도 깜짝 안했을 것이다. 어차피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오래 있지 않을 시간이라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무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인식범위를 초월하는 존재가 보필하면 그의 삶은 ‘꽤 많이’ 풍족해질 수 있다. 재미없고 따분할지라도 ‘당장 벗어나고픈’ 생각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생활비 가지곤 안 되겠는데.”

정태우는 생활비보다 조금만 더 달라고 말해서 다소 풍족한 가정의 생활비에 열 배를 더해서 줬는데 그걸로는 빚도 못 갚을 지경이다.

돈을 수억 빌려서 집을 사놓으니 빚이 달 당 수백이다. 한 번이라도 밀리기 시작하면 원금에서 이자를 더한 값으로 빚이 불어나니 서너 달이면 차압딱지가 붙는 게 당연할 수 있다. 가장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상황. 이시현은 레베카에게 눈짓했다. 어떤 이유로 만든 건지 모를 통장이 네 장이나 나왔다. 물론 그 통장 마다 1억에서 3억씩 꽂혀 있었다.

“이거 써도 추적 안 당하는 거야?”

“전 회사의 남는 계좌거든요.”

“……그렇다면 문제없지.”

이시현은 정태우에게 통장을 모두 건넸다. 정태우는 씩 웃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고 레베카는 이시현의 곁에서 보지 못했던 남성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역시 집에 초대할게요. 와서 차라도 마시고 가십시오.”

“차는 있고?”

“티백뿐입니다만.”

고대의 군주는 차에서 내리면서 존댓말을 썼는데 둘의 외형을 보면 형 동생 뻘이니 그럴 법 하다. 문제는 정태우 속에 고대의 군주라는 늙은이가 살고 있기에 듣는 이시현이 대단히 껄끄러워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그가 고대의 군주가 아닌 정태우로서 살고자 한다면 그 또한 탐닉의 후계자가 아니라 이시현으로서 받아주어야 하니까.

“그럼 차만 마시고 가지.”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태우는 처음 봤을 때의 딱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시현과 레베카, 그리고 정태우가 움직였다. 미노는 차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태우가 의아해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일 센 것이 차를 지키는 분 아닙니까? 왜 그 분을 놔두고 온 거지요? 호군도 없으면서.”

“호군?”

“네. 호군(護軍) 말입니다. 군주 및 그의 피를 귀족, 그 외의 주인들을 지키는 존재 말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에게 닥칠 위협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가장 강한 이들이 대부분, 혹은 가장 강하지 않더라도 방어에 탁월한 재주를 갖춘 이들이 호군이 되지요. 물론 충성과 복종의 정도도 가장 탁월한 것이 분명한 이들입니다.”

이시현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호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무장과 장군들이 하나 같이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결국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존재는 있기 마련이다. 신임하지 않더라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주인을 지키는 것이 탁월한 이들. 그런 이들이 바로 호군이다.

“흑백공자의 곁에 있는 장군들이 모두 호군입니다. 반드시 장군일 필요는 없지만 장군이 하나라도 있으면 대개 호군으로 사용하죠.”

뭐 무지막지하게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혹은 세이브 포인트 같은 게 있다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정태우의 설명에 이시현은 호군의 존재를 완전히 납득했다.

확실히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남성들은 자기목숨의 보전에 대단한 집착을 지니고 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게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죽음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하며 죽음 후에 찾아올 적의 공세에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을 막으려 애쓴다.

호군이란 결국 트로피 와이프 같은 것이다. 자신을 섬기는 장군 및 무장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을 자신의 곁에 두고 그 누구도 손댈 수 없게끔 하는 존재.

‘나도 장군을 만들 수 있지.’

그에게는 퀘스트 보상으로 획득한 장군에게서 추출한 셀이 아니라 장군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

왕의 권력.

왕권을 사용하면 우주 멸망 때까지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지키고 자신의 모든 요청을 환히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을 만들 수 있다.

나만의 장군.

내가 처음으로 가질 수 있는 내 최강의 무기.

잭 더 리퍼와 같은, 하나만 가지면 지구 내 전체와 싸워도 두렵지 않을 특기를 가진 그녀는 과연…….

정태우가 고층에서 내렸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러 두 개의 문을 열자 알몸의 여성 둘이 남성들이 큰 절을 하듯 현관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정태우가 아무런 표정 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이시현과 레베카는 조금 반응이 늦었다.

“들어오십시오.”

이시현은 멍청하게 알몸의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두 명 모두 10대 후반, 아니 갓 20대가 된 성인여성으로 보였다. 그의 집이라는 곳에 엄한 사람이 있을 수는 없으니 가족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누이. 고교생인 그보다 나이를 먹어보이니 누나일 터였다. 그녀들의 등에 새겨진 문신 자국이 둘. 붉은색 문신은 거대한 지구와 그 주변을 도는 아홉 개의 별이었다.

“천동설(天動說)……?”

그녀들의 등에 새겨진 문신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고 하는 천동설을 형상화 한 것 같았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15, 6세기에 비로서 지동설(地動說)에게 자리를 내주고,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님을 알았던 때. 천동설이 모든 시대의 중심이자 세계의 근원이었던 때를 고대라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런 식의……고대였다고?’

마성의 군주, 탐닉의 군주, 광신의 군주……군주의 명칭만으로도 대충 어떤 성향이고 어느 것을 중심으로 하는지 알 수 있다. 마성의 군주야 마법 좀 쓰고 악마 비슷한 성격이고 어쩌고 할 테고 탐닉의 군주야 자위대왕쯤 될 것이고 광신의 군주야 종교 사이코 이런 부류임이 명백하니까. 그러나 고대의 군주는 고대(古代)라고 하는 포괄적인 단어 속에 무엇을 주로 하는지 몰랐다. 이시현은 어렴풋이 그의 성향과 능력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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