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 회: 8> 화려한 나날. -- >
‘이건…….’
소년을 바라보는 이시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긴장. 당황. 위압감에 눌린 몸의 반발활동. 소년을 자세히 훑어본다. 다소 딱딱한 표정 속에 감추어진 어떤 모습이 연상된다. 무언가 ‘겉껍질’로 자신을 위장한 듯한……. 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훑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후계자?’
흑공자, 백공자를 정면에서 마주한 바는 없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고서 서로를 탐색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이시현은 상대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나 이외에도 후계자가 있던 건가? 내가 실수한 것들은 모두 이 후계자 때문이었던가? 내가 활약할 동안 놈은 무엇을 하고 있었지? 후계자라면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손적을 불러야 한다. 상대는 자신을 죽일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전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찾아온 것이 아닐까. 나의 방심. 이시현은 오늘 크나큰 낭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태우라고 합니다.”
그가 딱딱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 뒤로 잔향과 같은 울림이 들린 듯 했다.
‘그리고 신석기라고도 불리지.’
이시현이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며 힘을 세게 눌러보니 정태우라고 밝힌 소년의 안색이 조금 찌푸러졌다. ‘겉껍질’을 두른 게 아니군. 이시현은 악수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약간이나마 깨달았다. 위장이 아니라 반대로, 빙의 같은 형식이라고 해야 하리라. 정태우라는 소년의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남자.
신석기.
……성이 신 씨고 이름이 석기라고? 합쳐서 신석기(新石器)?
흠칫 해서 그를 다시 바라본다. 이제 완전히 그의 모습이 보인다. 외형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어떤 악의와 오랫동안 살아오며 쌓인 연륜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시현. 만나서 반갑군.”
내 미소를 본 탓일까. 그 또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선가 이야기할 곳이 있을까요?”
“마음 같아서야 손찌검에 대해 한 소리 하고 싶지만 여기서 그럴 수는 없지. 어디서 볼까. 커피는 좋아하나?”
“차가 좋겠군요. 커피는 입에 안 맞더라고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가지고 온 차를 타고서 생각했다. 지금 올리고 있는 빌딩에 카페를 하나 만드는 게 좋겠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경우 이야기를 나눌 창구가 필요할지 모르니까.
차에 올라탄 그는 깍지를 끼고 단정히 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량의 부드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재주가 뛰어난 탓인지 달리는 차량 안에서도 미동도 없었다. 그가 한쪽 눈을 뜨고 이시현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군.”
“……고대의 군주는 이름만 들었으니까.”
앞서 손적이 살해했던 두 명의 무장 중 하나가 고대의 군주 것이었다. 탐닉의 군주가 제안하여 세 후계자 중 한 명을 밀어주기로 한 군주이기도 했다. 고대의 군주, 광신의 군주, 그리고 마성의 군주. 마성의 군주는 이시현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이시현은 대가로 장군이 아닌 바에야 최강급이라 할 만한 무장인 손적을 얻었다. 승자의 보상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럽다.
“원한……은 아닌 것 같고.”
이시현은 마치 뜸을 들이듯 말을 끊으며 의미심장하게 옆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외유? 아니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한 자에 대해 응징하는 것과 함께 나를 만나러 온 건가?”
정태우, 혹은 신석기. 그리 불리는 소년은 후후 웃고는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는 이시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긴 숨을 토했다.
“너 보다 삼천 살은 더 살았다네. 존경을 표하는 게 좋을 텐데. 너 하나 정도는 없어도 후계자는 뽑을 수 있거든.”
“……건가요?”
이시현의 시의적절한 존대에 운전을 하던 미노가 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시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 존중을 표하니 대답해주지. 내 귀여운 종을 쓰레기처럼 버려버린 놈이 있지. 자신만만해 하더니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그만 죽이고 말았지 뭐야.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가벼운 항의를 하려고 한다네. 헌데 안타깝게도 내기의 패배로 인해 ‘원주민’의 생활을 하게 됐거든. 광신도 마찬가지지. 강제 여행을 하게 되어서 항의하기가 어려워. 뭐 마성이 알아서 멍청한 패배자들을엿 먹여 주겠지만 내가 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
“얼마동안……이지요?”
“한 달 정도일까. 두 달까진 아닐 테지. 그래도 긴 휴가인 셈이야. 크루즈 타고 호화 여행을 하고 다닐 내가 무전여행을 하게 된 셈이 되었어. 기쁜 휴가는 아니지만 뭐 이런 생활도 해볼 만은 해. 그렇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제국의 손길이 닿은 여아가 하나 있지 뭔가.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이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니 응징할 수밖에. 상태가 미숙한 것이 흰둥이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 그래서 죽이진 않았지.”
“사례를 표하지……요.”
“뭘. 너무 심려치 말게.”
고대의 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시현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본인의 어깨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고대의 군주가 눈을 기이하게 떴다. 후계자 주제에, 그리고 약점도 터무니 없이 많은 주제에, 수천 년을 더 살아온 군주를 향해, 그가 이런 태도를? 가늘게 뜬 고대의 군주 눈동자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시현은 어깨를 털어내고는 냉소하듯 말했다.
“무전여행을 하는 중에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났군. 모처럼 만난 동포인데 ‘여행에 도움을 주지’. 나중에 ‘고국에 돌아가서 정산하면 되니까’ 지금 이 여행지에 익숙한 동포에게 부탁할 게 있다면 하는 게 어때?”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제안을 평범한 말에 섞었다.
고대의 군주가 고개를 꺾으며 히죽 웃었다.
“오호라…….”
공범자의 표정을 지으며 고대의 군주와 이시현이 시선을 맞췄다.
“여행지에 익숙한 동포라. 과연, 무전여행을 떠났지만 여기에도 동포가 있었군? 뭐……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도움을 좀 받아볼까? 으응?”
“물론. 염려 말고 말해. 나는 내 여자와 동포에겐 따뜻하거든. 이자는 안 받을 테니 나중에 ‘이때의 어려움을 기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크키키키킥!”
“크흐흐흐흐.”
고대의 군주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도움을 좀 받을까? 으응?”
“얼마든지 환영하지. 이쪽에게 맡겨둬.”
이시현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악수한 손에 힘을 불어넣지는 않았다. 그는 적이 아니게 되었으므로. 동시에 그의 눈가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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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킹을 즐겨주시는 분들께>
여덟 번째 퀘스트를 무사히 마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시현님은 다른 수컷과의 타협을 결정하셨습니다.
죽이는 것은 쉽습니다. 죽이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기왕이면 수컷이라 해도 인재일 경우 아군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겠지요. 매우 뛰어난 수컷이라고 하면 굽히고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타협을 청해야겠지요.
다행히 이쪽 세계에서는 이시현님이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막 시작하게 된 ‘동포’의 무례함에 화를 내지 않고, 그와의 끈을 연결하고, 적이 되지 않으며, 아군으로서 맞이한 것에 대해 감탄을 표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는 다른 수컷이 특별하기 때문을 잊지 마십시오.
수컷은 언제든 동성을 깔아뭉개고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습니다.
지배하겠다면, 복종을 원한다면 그 대상자에게 강력한 제약을 걸어야 합니다.
제약이 아니라면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그 먹이는 권력욕, 물욕, 색욕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 장군의 셀 및 고문관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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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마친 이시현이 자연스레 물었다.
“곁에 있는 여성은 있어?”
“있지.”
“무장?”
“그건 아니고.”
이시현은 허공에 손을 밀어 넣었다. 허공이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이시현의 손이 팔뚝에서부터 슥 사라졌다. 고대의 군주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시현이 파문치는 허공에서 손을 빼냈을 때 비어있던 그의 손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덩이 같은 물체가 있었다.
“장군의 셀이야. 무장 하나쯤은 만들어두는 게 어떨까?”
“그건……네게도 필요한 것일 텐데?”
“필요하긴 하지.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아. 아니, 흠.”
이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어쩐지 여자에게 약해서 말이지. 거칠게 대하질 못하겠어. 네가 보았던 또래 아가씨를 봐서도 알다시피 무장이라고 하기엔 좀 그랬잖아?”
“오호라. 그 말은 곧…….”
“한 달, 혹은 두 달 동안 휴가를 멋지게 즐기고 가. 이 셀을 사용해서 무장 하나 키워서. 그리고 떠날 때 네가 키운 무장을 내게 반납하면 돼. 네가 ‘나의 무장을 깔 볼 정도니’ 네가 만든 무장은 얼마나 뛰어날지를 생각하게 되거든.”
“크큭. 잘 알잖아. 물론 내가 키우는 무장은 ‘강함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준일 테지. ‘유용하고 다양하고 특이한’ 성향일 것이 분명해.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지내야 이만한 물건이 탄생할까 하고 경악할 정도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괜찮겠어? 내 무장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내 품에 있을 건데도?”
언제 딱딱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태우의 얼굴이 비틀려 있었다. 비열하고 음습한 악의가 빚어낸 추악한 미소. 미소가 오물을 머금은 것 같은 표정은 미소가 아닌……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역겨운 표정이었다. 이시현 또한 그런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둘이 동포’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백미러로 뒷좌석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노가 역겨움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털어댈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정태우의 경우 캐릭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신작에서 응응한 부분을 넣기가 어려워 욕망의 노예가 된 저는 다시금 EE배경의 스토리를 잡고 써봤는데...
주인공이 사상 초유의 쓰레기.
...연재한다는 건 아니고 당분간은 써보면서 재미를 느껴보려 합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128군주 서열 1위, 세계 끝에 서는 자 종말왕.
2화만에 여신을 잡아서 조교해 돼지여신으로 바꿀 줄은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