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 회: 8> 화려한 나날. -- >
손적이 손을 흔들며 흑, 백공자가 돌아왔을 때 빡치게 만들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나간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현의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음? 미나?”
전화를 건 사람은 미나였다.
“흑, 오빠. 여기 좀 와줘요.”
“울어? 왜?”
“씨……. 별 생양아치가 시비를 걸어요. 맞았다고요. 뺨을 맞았어요.”
뺨 정도는 맞을 수도 있지. 난 맞고 사는 게 일이었는데. 뭐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이시현의 대응은 세련된 편이었다.
“뭐하는 자식인데?”
……그 혼자서만 그리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흑, 전화 바꿔줄게요.”
남민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 후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하나. 변성기는 지났지만 성인 특유의 톤은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남민아의 애인 되십니까.”
“애인 아냐. 그런데 넌 뭐냐.”
목소리가 꽤 묵직하면서도 듣기 좋았다. 이 자식 가수 같은 거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전학생입니다. 남민아에게 시달리는 애들이 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걔가 애들 괴롭히고 다닌다고?”
“네. 딱히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돈을 뜯는 일은 없지만 빵셔틀이라거나, 분위기 조성해서 놀리는 등, 갖은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남민아, 이 년. 양아치잖아.
이시현은 양미간에 주름을 넣었다. 잘 나가는 족속이라고 하고, 실제로 일진 같은 것도 불러서 사람을 조지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게 봐줬었다. 하지만 성격은 여전해서 그렇고 그런 쪽의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이시현은 그런 짓을 벌이는 사람을 대단히 싫어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동급생에게 빵 셔틀을 시킨다거나 분위기 조성하고 놀리는 식의 장난을 치는 놈은 죄다 나쁜 놈이라는 인상을 가진다. 그의 지우고 싶은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유형이 일진이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새삼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때려서 쓰나. 아프게 때린 거냐?”
“음? 아, 네. 남민아가 학급의 애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때리지는 마. 네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조사해보겠어. 아니.”
이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교로 가지. 거기서 상황을 좀 보겠어. 걱정하지 마, 네가 한 말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서 이쪽이 갚아주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남민아의 과거행적을 보면 놈이 했던 말과 완전히 다를 것 같지도 않다. 이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화를 대신해 받은 쪽에서 내뱉은 말이 이시현을 멈칫하게 했다.
“그건 우월감에서 오는 협박입니까?”
“음?”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을 억눌렀다
.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협박을 원하냐?”
“결국 당신은 남민아와 똑같은 사람이군요. 남을 괴롭히는 게 즐겁습니까?”
이시현은 씩 웃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의 말이 이시현을 즐겁게 했다.
“즐겁군.”
이시현은 대답했다.
“네놈의 자존심이 얼만큼 대단한지 한 번 보고 싶어졌어. 남민아와 관련한 건 잊어. 대신 너를 보러 가겠다.”
휴대폰에 쥐는 손의 힘이 조금 세진 듯 삐걱, 하고 휴대폰의 골조가 힘의 가중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기대를 충족시켜.”
아니면 죽인다.
“기대하지. 후…….”
이시현이 휴대폰을 껐다.
“미노. 차 대기시켜.”
미노가 다소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화를 귀에다 대고 있어도 무장의 탁월한 청각은 스며 나오는 소리도 듣는다. 그녀가 물었다.
“분쟁을 일으킬 생각이십니까?”
이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미노를 바라보다가 핫, 소리 내어 웃었다.
“설마. 아마도 미나의 행동이 맞겠지. 뭐 자기주장 잘 내는 녀석이잖아. 나쁘지 않아. 어차피 내가 굴욕을 겪는 일도 아니고. 미나야 그저 내가 그놈을 눌러주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미나가 잘못했으니 대가를 받아야지. 난 괜히 힘 있다고 남 타박하고 심부름 시키는 놈들 안 좋아하니까.”“마치 당해본 적이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아닙니다. 대답은 듣지 않도록 하지요.”
미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문을 무마했다. 이시현이 몸을 일으켰다.
“내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지껄일 수 있는지.”
이시현은 몸을 일으킨 후 자신의 눈앞에 다가온 퀘스트 창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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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킹을 즐겨주시는 분들께>
여덟 번째 퀘스트입니다.
이시현님은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십니다.
그리고 킬 더 킹, 군주를 정하는 게임에 참여중인 후계자입니다.
어스 엠파이어에서도 상위 0.1%에 속하는 특권충이시며, 이 게임에서 승리하시면 정진정명 군주가 되실 분이십니다. 암컷은 물론이고 수컷 중에서도 강대한 이입니다. 그런 수컷의 위용을 보여주세요.
다른 수컷과 상대하세요.
그리고 그 수컷에 대응하세요.
어떤 방식으로 이겨도 괜찮습니다. 폭력, 권력, 재화, 행운, 도박, 능력. 패배를 각인시키고 수컷을 압도하세요.
퀘스트 완료 보상: 장군의 셀 및 고문관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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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 번도 모교를 방문하지 않았다.
바쁘기도 했던 데다 갈 면목도 없고 가봐야 볼 사람도 없었으니까.
학창생활은 별로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완벽히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생활조차도 버거웠던 하루하루. 괴롭힘 당하긴 했지만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불쌍해 보이는 이’였기에 심하게 괴롭히면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를 괴롭힌 사람들이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그룹의 회장이 사용할 만큼의 고급 세단이 학교로 진입했다. 미노가 모는 세단은 부드럽게 운동장을 가로질렀고 다양하지만, 그렇게 가격대가 높지 않은 차들이 주차된 곳에 섰다. 미노가 먼저 차를 나와 문을 열었다. 이시현이 느긋하게 나왔다.
쉬는 시간이 겹쳤던 듯 사람들의, 대개 학생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노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단정한 인상에 사내놈들이 반하고, 이시현의 큰 키와 독특한 잿빛 머리칼, 그리고 우아하기까지 한 외모에 여자들이 반했다. 아직 미숙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고는 해도, 미디어에 길들여진 그들은 꽤나 정확히 이시현과 미노를 재단했다. 둘을 찾기 힘든 잘난 이들.
그들은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이시현이 타고 온 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차량 가격만 2억이 넘어가는 세단. 옵션에 따라 가치는 훨씬 더 올라간다. 그런 차량을 타고 온 게 배 나온 회장이 아니라 외국물 먹은 듯한 미남이다. 운전사는 여자고 온 몸을 타이트하게 정장으로 걸친 비서 같다. 보디가드처럼도 보인다.
대번에 주목이 쏠리고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시현이 휴대폰을 꺼내 귓가로 가져갔다.
“미나. 나와. 그놈 데리고.”
미나가 교문 옆에 붙은 수위실의 수위와 이야기를 나눈다. 차를 들이기 전에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늘어놓는 모양이다. 사색이 된 수위가 얼른 다른 이를 부른다.
동생이 맞고 전화를 해서 사정을 알아보려 왔다, 이런 식으로 대꾸한 모양이다. 즉각 교감이 왔다. 이시현과 미노의 모습에 잠깐 놀라고, 미노가 정중하게 내미는 명함을 양손으로 받고 두 번 놀란다.
재단의 이사장과 다이아몬드 펠리스의 명예이사.
그 지위가 상징하는 건 보통이 아니었다.
명함을 받아들고 이시현을 다시 바라본 50줄에 접어든 교감은 그제야 이 말도 안 되는 외양과 카리스마가 납득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재차 놀랐다. 그런 사람의 동생이 학교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 학교는 일진이 태양그룹 쪽의 높은 사람에게 폭력을 쓰려다 죄다 잡혀들어가 안 그래도 세간의 평이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안 좋은 추문이 더 들어온다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크, 큰일은 아닙니다. 아닐 거예요.”
더듬거리며 내뱉는 교감을 바라보며 이시현은 말없이 턱만 조금 당겼다.
“우선 교무실이나 안쪽으로 좀 들어오시는 게……?”
“조금 기다리죠. 저쪽에서 미나가 오고 있으니까.”
이시현은 쌩하니 달려와서 안기는 미나를 받쳐들었다.
“오빠, 바보! 으앙, 아팠단 말이야!”
“어이쿠, 울보가 다 됐군. 하긴, 우는 건 네 전매특허긴 하지.”
쾌락에 젖어 그만해달라고 엉엉 우는 남민아를 떠올리며 이시현이 쿡쿡 웃었다. 그녀를 떼어놓고 얼굴을 바라본다. 눈가가 젖어있고 조금 부었다. 눈물을 꽤 흘렸던 모양이다. 그리 억울했던 듯하다. 뺨을 조금 만져보자 윽, 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제법 볼이 부풀어 있었다. 입 안쪽이 터진 것도 같다.
“어지간하군. 좀 거친데?”
“그치? 그 개자식이……씨, 아파!”
“네가 잘못한 것도 있더만.”
“오빠!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이시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 과거를 생각하렴, 미나야.”
남민아가 움찔했다.
이시현에게 했던 과거.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자격을 비하했다고 남민아를 다굴을 놓으려 했었다. 일진을 불러다가 조지려고 했지만 오히려 남민아가 박살이 났다. 그러고도 모자라 사는 집까지 쳐들어왔다가 일진 대부분이 소년원으로 향했다. 일부는 소년원보다 더한 곳으로 가버렸다. 주제파악을 못한 탓이다.
“우이씨, 그때랑은 다르단 말이야!”
“그래.”
이시현은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준 후 손가락에 묻은 눈물을 입으로 훔쳤다. 별 것 아닌 행동인데도 분위기가 났다. 멍하니 지켜보던 여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남자들 사이에서 퉁명스러운 반응이 흘렀지만 대개는 씨발, 멋있잖아 같은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볼 생각이야. 저놈이냐?”
남민아처럼 뛰어오지 않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걸어오는 소년이 하나. 키는 크고, 체격도 제법 있다. 남민아와 같은 또래라고 하기에는 인상이 조금 완성된 듯한 소년. 이시현보다 키는 작았지만, 소년이 성장기임을 감안한다면 무시 못할 신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