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 회: 8> 화려한 나날. -- >
“암퇘지에게 <메저키스트>라는 특기가 생겼네요. 역시 주인님 생각은 주효했어요. 나의 사랑 주인님. 주인님을 섬기는 걸 한결 더 행복하게 되었답니다.”
손적은 일정처럼 정해진 대련을 끝마치고서 경쾌하게 말했다.
미노와 단미애의 실력 향상을 위해 손적이 상대해주는 것이다.
손적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인지 한층 사이가 나빠진 미노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힘을 실어 훨씬 더 머리를 써가며 능률적으로 싸웠지만 손적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한때 장군이었다는 말을 실제로 믿어버릴 정도의 강자. 물론 장군이었던 존재에게 벌을 내린다고 무장으로 바꿔버렸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미노가 순진하진 않다.
핵미사일을 폐기하고 수류탄으로 바꿔 자신을 방어한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는 헛소리니까.
미노가 멍투성이가 되고 뼈마디가 시큰거린 채로 쓰러졌다. 미노가 손적을 적대하듯 손적도 미노를 고깝게 보는 터라 봐주는 게 없다. 아니,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도 한다. 이를테면 입은 옷을 강제로 찢는다거나, 다리를 걸어버리는 것으로도 충분한 걸 양 다리를 벌리게 하고 보이기 부끄러운 곳을 활짝 개방하게 한다던가.
미노는 언젠가부터 대련을 할 때는 대단히 가벼운 차림이 되었고, 그때마다 찢겨 알몸이 되어 나뒹굴었다. 단미애도 알몸이 되어서 훌쩍훌쩍 울었다.
두 명의 알몸 여성을 엎어놓고 그들을 깔고 앉은 손적은 이시현이 걸어나오자 손을 흔들었다.
“역시나 주인님의 말씀이 맞아요. 강해졌어요. 아주 조금이지만, 신체능력 전반이 뛰어나졌네요. <매저키스트>라는 특기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만들어지다니 놀랍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나요?”
“흠, 그냥 될 것 같았어.”
전 세계에 단미애의 알몸 사진이 유출되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단미애는 그야말로 기함했고 기절했으며 깨어났을 때 도저히 넘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녀는 좌절하고 포기했다. 이제는 끝이야,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여기가 막장이야. 극심한 좌절감에 스트레스로 사망할 것 같은 우울증을 앓았지만 무장의 육체는 뇌내에서 전해지는 스트레스 물질을 깔끔히 분해할 수 있다. 지독하게 근심걱정을 안고 있지만 정신은 지극히 말똥말똥한 단미애는 결국 심적 고통을 육체가 이겨낼 수 있다는 이 현실에 <매저키스트>라는 특기를 각성했다.
<매저키스트>는 단어 의미 그대로 맞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는 의미. 단미애는 마음은 몰라도 몸은 건강해진 것이다! 그런 단미애에게 이시현이 말했다. 그거 사실 인터넷에 공개 안 한 거야. 그녀는 마음마저 건강해졌고 <매저키스트>는 뛰어난 특기가 되어 단미애의 신체능력을 올려주었다! 물론 손적에게는 한 방에 기절할 사람이 두 방에 기절하는 정도로 변했지만 단미애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다면 이 특기가 매우 유용해질 수도 있었다.
“주인님 천재, 주인님 멋쟁이, 주인님 완전 사악해!”
“그렇지. 난 틀릴 리가 없다니까.”
손적의 환호에 이시현은 우쭐댔다.
“자, 그럼 보고를 들어볼까.”
이시현은 아마추어 복서이자 흑공자의 ‘졸’인 이성아가 큰 일을 위해 본래 하던 일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이후 손적에게 조사를 시켰다. 손적은 좀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몸으로 뛰는 것에 불만 가지지 않고 이성아의 흔적을 쫓았다. 겨우 보고할만한 내용을 들고 온 그녀는 이시현이 준비를 갖추고 찾아올 동안 두 사람의 단련을 끝마친 것이다.
“네. 흑공자는…….”
“검둥이.”
“아하. 검둥이가 휘하 조직원을 모으는 이유는 흰둥이를 치려고 하는 목적이 아니에요.”
“허? 그럼? 쿠데타 같은 거라도 하려고 그러나?”
알게 모르게 흑공자가 지배한 지하 쪽 세계, 조폭들이 술렁이고 있다는 소문은 이시현의 귀에도 들어왔다. 흑공자는 흑공자 나름대로 하는 일이 있기에 손적을 보내고, 조직폭력배와 관련된 사항은 미노에게 조사시켰더니 뜻밖의 내용을 물어왔다.
“그렇진 않아요. 단순히 그쪽 세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해요.”
“조폭세계에서 분쟁이 일어났다고?”
이시현이 놀라 물었다.
“흑공자, 그 검둥이가 반란 같은 걸 놔뒀대?”
“정확히는 검둥이 세력이 아니라 검둥이가 치려고 준비한 세력 쪽에서 일어난 모양이에요. 인천지역이요.”
“인천?”
흑공자는 서울 및 강원도의 폭력조직을 통합했다. 서울은 약 90%. 실질적으로 완전지배나 다름없다. 그리고 강원도도 70%에 이른다. 한국이 조직폭력배의 처지가 열악하고 힘이 부족하다곤 하지만 그만한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결집하는 건 거의 유래가 없다. 흑공자는 인천지역과 그에 근접한 군소지역을 통합하여 게임의 무대가 되는 서울 쪽에 병력을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 흑공자에게 저항하는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흑공자는 저항하는 세력을 반란세력으로 규정짓고 처형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들이 술렁이고 전투경찰들을 언제라도 출동시킬 수 있도록 정부에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어지간한 항쟁이 아닐 것임을, 경찰들 또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폭들이 얼마 전 저지른 일을 보면 전투준비는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백화점을 테러해버렸던 사고. 주모자들은 죄다 잡혀갔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열 명 내외.
그만한 소란을 일으키고도 열 명 내외인 것이다.
그에 따라 경찰들의 병력도 늘어나고 있고,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조직항쟁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시현은 그런 말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에게 적이 있다고? 조폭을 결집시킨 사람? 나 같은 사람인가?”
나 같은 사람. 그러니까 킬 더 킹에 참여하는 플레이어. 그리고 후계자.
미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6개월 전 쯤, 조직 간의 항쟁에서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한 달 전엔가 깨어났다고 해요. 깨어나서는 두목을 찌르고 조직을 지배했다고 하던데요.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하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미노의 대답에 이시현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검둥이가 서울을 휘하에 넣은 후 다음 목표로 삼았던 인천지역에서 급속도로 세를 모으는 녀석입니다. 돈을 불리는 재주도 남다르다고 하더군요. 주식 같은 것으로 돈을 엄청 버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뭐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짓 같은 걸 하면서도 불평을 무마하기 위해 돈을 뿌리고, 결속을 다지고…….”
미노는 피식 웃었다.
“경찰이니 뭐니 하고도 커넥션을 가지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급격하게 세를 불려서 인천지역을 지배했는데, 검둥이가 두려운 건 맞는 듯 합니다. 검둥이보다는 확실히 빠른 속도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놈이랑 싸움이 되나? 검둥이가 어지간해야지.”
“공포를 느끼고 조직에서 탈퇴한 놈의 이야기를 좀 들어봤습니다.”
미노는 조금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검둥이는 말 그대로 조직폭력배라던가 뭐 그런 세력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데 열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걸로 뭔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있으니 흡수하고 저항하니 밟아버린다, 그런 수준입니다. 검둥이는 상종 못할 미친놈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조직을 박살내고 하나로 모으는 건 그냥 시간 때우기 같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결속이 흐트러지지 않는 건 그의 성격이 너무 잔혹하기 때문에. 악마 그 자체라고, 그렇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달아나려는 이들도 많지만 이제는 달아날 수 있는 수단도 없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도 지금은 한국에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어떻게든 숨겨둔 돈으로 한국을 떴습니다.”
“그렇겠지.”
이시현이 봐도 흑공자라는 놈은 미친 자식이었다.
상종 못할 미친놈. 조직폭력배가 말하는 표현 그대로였다. 사람 목숨을 사람 목숨으로 생각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벌레를 붙잡고 재미삼아 다리를 뜯고 날개를 뜯어내 분해하듯이 그는 인간을 상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아이는 성장하고 동물과 삶과 그 외 여러 가지 상식을 얻으며 어릴 적 했던 일을 그만두게 되지만 흑공자는 더욱 발전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일까.
그냥 종이접기 하듯이 사람을 접고 껌 씹듯이 사람을 뭉갠다. 거기다 말도 못할 능력과 권력을 가진 만큼 막을 수도 없다. 살아있는 재앙. 성격과 사상이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감당할 수도 없다.
강의곤이 그를 만났을 때 했던 설명은 잊기 어렵다.
‘저런 놈이 내 상관이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자살하마.’
진심이 된 흑공자는 강의곤 같은 거물조차도 기세로 짓눌러버릴 만큼의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이시현이나 백공자 샤를과는 완전히 성향이 다르다. 그는 완전히 생물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능력을 지닌다. 그보다 잔혹하고 거만한 살인마는 없을 것이다. 그저 살인마라면 좋겠지만 머리도 좋다.
“그럼 인천은 금방 뺏기겠군.”
“네. 그렇게 보는 게 좋겠죠. 인천 쪽에서도 세력을 모으고 한판 뜰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개박살이 나면 남는 조직이 없을 거니까요. 검둥이는 그렇게 적을 일망타진 할 것 같아요.”
“희한한 일이군. 그렇게 일이 좌초되다니.”
흑공자는 그 때문에라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게임에서 빠져 번외편을 플레이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목표했던 흑공자와 백공자간의 전쟁을 성사시킬 수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