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6 회: 8> 화려한 나날. -- >
손적은 남의 옷 속에 있던 손을 떼어냈다. 손가락에는 옅은 피가 엉겨 있었다. 마침내 살을 찢고 피를 본 것 같았다. 아니면 미노가 수련회를 다녀와서 얻은 유두의 피어싱을 건드렸거나. 손적은 미노의 피가 묻은 손가락을 요염하게 핥았다.
“꺼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꺼져. 기회가 있을 때. 아마 시간이 길지는 않을 거야. 너의 자유 말이지. 그 후에도 이런 소리를 한다면 나는 참지 않아. 내가 주인님의 버림을 받아 폐품……망실무장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같잖은 소리를 하는 너를 죽여버릴 거야.”
“마음대로 해. 난 내 마음대로 살 테니까.”
미노도 자신이 이렇게 뻗댈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존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제국의 방식이.
손적은 한숨을 쉬었다.
“아, 몰라. 지상 최고의 기쁨을 모르는 멍청한 년에게 할 말은 이제 없어.”
손적은 지겨워진 듯 그렇게 투덜거리고서는 허공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나 빠르게 사라졌는지 미노의 뛰어난 시각으로도 그저 순간이동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떠나간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미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제길…….”
손적이 없어지자 또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대형 세단 안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이시현의 명령에 따라 부렸던 치태가. 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젠장!
***
이시현은 컴퓨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부드러운 체향에 눈썹을 활처럼 휘었다.
“손적?”
“네. 주인님. 뭐하시나요?”
이시현의 뒤에서 포근히 끌어안은 손적이 그녀의 체향처럼 달콤하게 물었다.
“뭐하는 것처럼 보여?”
손적은 눈을 크게 뜨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묘해졌다.
“야한 사이트 들어가서 사진 보는 거예요? 싫어라. 제 휴대폰에 있는 사진이 더 멋지지 않아요? 사랑하라는 명령에 엉덩이를 벌리고 하트를 만들어대는 이상한 여자 사진이 잔뜩 있답니다.”
“하하. 그거 나중에 출력 좀 해 줘. 좀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은걸.”
만에 하나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양복 입은 미인 SP를 옆에 두고서. 그렇게 히죽거리던 이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일반 성인 사이트 아니야. 그건 다 막혔지.”
안타깝게도 컴맹인 이시현은 방통위가 막아놓은 성인 사이트를 헤치고 들어가는 방법을 모른다. 조금 분한 표정을 짓던 이시현은 하하 하고 웃었다.
“그래서 만들었지. 홈페이지를 무료로 만들 수 있는 사이트를.”
“어머. 어머. 그럼 제 사진은 왜 없나요?”
“이 사이트에 네 사진 올려도 돼?”
익살맞게 묻는 이시현의 질문에 손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죠. 주인님이 만든 사이트에 제가 찍혀 올라간다는 건 대단한 영광인걸요. 지금 당장 찍을까요? 조명은 필요 없어요. 제 피부가 워낙 백옥 같아서. 아니면 좀 태운 거 원하세요? 십분이면 되요. 가솔린 가스 채워놓고 방에 들어갔다 나오면 피부가 적당히 잘 타 있을 거예요.”
“흐음. 이 사진의 주인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이시현은 삐딱하게 앉아서 중얼거렸다. 이시현의 자세에 따라 손적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를 뒤에서 안았기 때문이다. 손적은 초보자가 만든 것이 가슴 아프도록 눈에 박히는 못난 사이트를 바라보다가 킥킥댔다.
“사진의 모델을 불러올까요?”
“좀 놀라지 않으려나?”
“오디션에서 스타 데뷔한 것처럼 기뻐할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이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뼛속부터 본가, 즉 어스 엠파이어의 여성인 손적의 행동은 한결 같다. 얼치기로 군주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이 된 이시현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굽히고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기서 살고 있는 듯한 태도다.
“이것도 그 계획의 일환인가요?”
“계획이라고 하니 좀 우습군.”
이시현은 자신이 탐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떠올렸다.
탐닉의 후계자로서 자신이 평생 즐기면서 해야 할 일. 며칠 전 흑공자의 ‘졸’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 이성아를 만났을 때 그는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확고히 했다. 그런 마음가짐에 따라 비로소 탐닉의 권능을 세 개나 획득할 수 있었다. 획득한 권능의 등급도 C등급. A가 가장 낮은 숫자이며 E가 최고점, F가 독보적인 수준이기에 최소한 중간은 된다.
손적의 조언에 따라 이시현은 자신이 탐닉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고 그 각오를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각오에 따라 이시현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홈페이지 제작을 하고 이는 것이다. 만드는 건 겨우 성인 사이트에 불과하지만.
“하지만 굉장히 멋진 계획이었는걸요. 언제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나의 사랑 주인님이지만 한결 더 좋아졌어요. 빛이 반짝반짝 났으니까요.”
“그런가?”
“그럼요. 주인님이 지난한 과거를 보냈다는 걸 저는 처음 알았는걸요. 주인님의 탐닉은 ‘실패만 하던 인생을 보상받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죠. 과거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고, 먹고 싶었던 것을 먹고, 여자를 안고, 싸움을 하고, 시비를 걸고, 자신을 위한 계획을 짜고. 어스 엠파이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에요. 전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을 주인님은 못했으니까요. 그런 것에 굶주렸으니까요. 갈망이란 그토록 대단한 거랍니다. 그래서 주인님은 다시금 권능을 획득하고 또 가진 권능의 등급도 상승했잖아요. 정말로 대단해요. 마치…….”
손적은 꿈보다 해몽처럼 말했다.
“마치 그럴 의도로 불우하게 자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요. 어머?”
이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에서 끌어안았던 손적이 그의 표정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녀는 금방 말수를 줄였다.
“난 고아야. 얼굴도 모르는 년놈들이 싸질러놓은 무책임의 결정판이지.”
“그런가요? 흠. 죄송해요. 제가 말 실수를 했나 보네요.”
“아냐. 뭐……짜증나긴 하지만 상쾌하게 잊을 수 있는 과거니까. 아니, 이것조차 집념이 되어서 내가 군주로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나를 낳은 부모를 만나면 불문곡직하고 턱을 날려버리겠어.”
“그거 멋진걸요. 제가 돕겠어요. 아주 그냥 명치를 확……! 아참참, 그런데 주인님은 어쩌다 후계자가 되신 거예요?”
말 돌리기에 성공한 손적이 두근두근하면서 물었다. 이시현은 건성으로 컴퓨터 홈페이지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대답했다.
“살아가는데 실패해서 죽으려 했었지. 그 죽음조차 실패했지만. 아쉽지는 않았어. 그건 내게 찾아온 기회였으니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한 거지. 나의 자살시도를 무마한 이는 현 탐닉의 장군인 리퍼야. 잭 더 리퍼. 들어본 적 있지?”
“어머나. 물론이죠.”
손적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어쩌면 적으로 맞이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대를 떠올리는 듯 하다. 하긴 후계자에게 아군은 없다. 오직 적 뿐. 혹은 이용하려는 이들 뿐이다. 주인과 휘하 부하를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상정하는 게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녀의 살해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죠. 일부 머리를 쓰는 이들을 제외하면 대처할 방법도 못 찾을 거예요. 솜씨도 뛰어나다고 들었는데요.”
“응. 굉장히 강하더라.”
“어머. 갖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여전히 이시현의 뒤에서 목을 감은 채 껴안은 터라 당사자의 표정을 볼 수도 없을 텐데 거기에 서린 감정을 느낀 손적이 물었다.
“뭐, 나를 이렇게 살게 하고 후계자 싸움까지 벌이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내게 있어서는 기회가 된 거지. 어차피 그녀가 없었다면 죽었을 게 분명하고. 게다가 동정 떼 준 여자이기도 하고.”
“음. 그렇군요. 아참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쭙고자 하는 게 있는데요.”
“뭐지?”
“잭 더 리퍼는 어째서 주인님을 후계자 싸움인 킬 더 킹에……?”
“무슨 영혼의 빛이 났다고 하던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색으로.”
이시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손적은 미소지었다.
“하하, 잭 더 리퍼는 영혼의 빛을 보는군요. 놀라운걸요.”
“그렇지?”
이시현은 탁 하고 엔터를 쳤다. 나름대로 홈페이지가 정리 된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글자 폰트는 이상하고 색도 이상하고 아마추어 티가 너무 나는 홈페이지지만 어떻게든 이용할 수는 있었다.
“암퇘지 불러올까요?”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나도 그러고 싶어지잖아. 음……불러.”
“네. 다녀올게요. 후후.”
손적이 정중하게 목에 감은 손을 풀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이시현의 방에서 나갔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싸늘하게 굳었다.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계획변경이 필수겠어. 여기까지……결국……손아귀에서 놀음판이군. 내가 알아챘다는 건……역시 부처님 손바닥인가? 흥……반면교사로서……내가 있는 한 그렇게는 안 되지.”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걷는 손적의 몸에서는 눈으로 보일만큼의 농밀한 전의(戰意)가 아우라쳤다.
단미애가 있는 방의 문을 열 때 미처 전의를 가라앉히지 못해 단미애가 기겁하고 방 구석으로 도망치는 사태가 있었지만 그건 손적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주인님께서 부르셔. 가서 한껏 기뻐하도록 해.”
“네, 네?”
손적은 이시현 앞에서 보이는 기쁘고 행복한 웃음이 아니라 싸늘한 조소를 피어냈다.
“묻지 말고 빨리 가. 찢어 죽이기 전에.”
“네, 네!”
잠시 후 이시현의 방에 들어간 단미애는 기절했다.
SSP, 즉 Sex Slave Pig라는 이름의 사이트를 단미애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실 가동은 하지 않음에도 방문자 태그를 글어 마치 인터넷에 유포중인 것으로 보이는 사이트에는 단미애의 헐벗은 사진이 잔뜩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