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4 회: 8> 화려한 나날. -- >
“복싱이란 제법 재밌는 거군. 아, 즐거웠어.”
이시현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체육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미노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탈의실 밖에서 미노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탈의실에서 이시현이 옷을 갈아입을 때 미노가 물었다.
“너도 사내자식이긴 하네.”
“그야 당연하지. 나에게 꿰뚫려 처녀도 애널이고 다 잃은 여자가 내 성별을 의심해?”
“멍청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칭찬을 들으니 기뻐서 날뛰고 더욱 열심히 하고. 그런 모습이 다소 사내자식다웠어.”
트레이너고 관장이고 다들 경악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미노는 눈을 슬그머니 감았다.
“그들은 복서가 되라고 말하던데, 어쩔 거지?”
“어쩔 것 같아?”
“당연히 안 하겠지. 아깝긴 하겠군. 세계를 노릴 수 있는 주먹에 센스인데 노는 물이 맞지 않다니.”
이시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그런 걸 할 시간이 있을 리 없잖아. 세계 챔프고 뭐고 그보다 중요한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야.”
세계를 노릴 수 있다, 혹은 제패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던 이들은 이시현의 거부에 낙심했다. 이시현의 지위를 알고 있기에 그가 ‘고작’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그래도 낙심은 낙심. 이시현은 낙심한 그들에게 일과가 끝난 후 호텔의 레스토랑에 초대하기로 했다.
화끈한 신고식인 셈이다.
“게다가 내가 강해져봐야 완전 무기가 되어버린 너와는 비교할 수 없잖아.”
“그야……그렇지.”
이시현의 반박에 미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강해졌다. 얼마나 강해졌냐면 맨몸의 인간은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고 확신할 정도로. 일반 총탄에 맞아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중화기라면 자신이 다칠 수 있겠지만 그들의 공격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는 평균 그 이하라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미노는 더욱 더 강해질 요소가 충분하다. 이렇게 강해진 미노도 제국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제 막 무도의 길을 발견한 이시현과 시작점이 거의 같다.
“분명……생각보다 즐거웠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이시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뺨에 떠오른 홍조를 바라보며 미노는 눈매를 조금 구부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쾌락이란 결국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과 결과의 감정을 말하는 거니까. 자신을 완성시킨다는 건 최고의 쾌락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탐닉한 거겠지. 시간과 노력과 돈을 깃들여 변해가는 자신은 정말 깊은 만족을 주겠지.”
사람이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수많은 시련과 좌절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이루고 자신이 그 목표에 걸맞은 인간이 된 것은 지상 최고의 쾌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이래서는 안된다고 스스로가 자각해서, 혹은 일생에 한 번 뿐인 각오를 다졌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야 말로 삶이 아닐까.
미노는 그녀의 생애 전반을 바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제법 자신할 수 있는 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시현이 깨닫는 감정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과거는 모르지만 제국인이다보니 노력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탐닉이라고?”
“물론.”
단호하게 긍정한 미노를 바라보며 이시현은 입을 벌렸다.
그러고보니 이런 건 처음이지 않던가? 이시현은 리퍼를 만나기 전의 생을 떠올렸다.
그 또한 노력했다. 열심히 했다. 그러나 성공한 게 없었다. 생을 살아갈수록 인생은 막장이 되어가고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져갔다. 결국에는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실패한 인생, 낙오자, 패배자, 잉여인간. 그렇게 불려도 좋을 인간쓰레기가 되었다.
어째서였을까. 그 또한 노력했는데. 자신 또한 열심히 살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뺨을 타고 떨어졌다. 미노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무슨…….”
왜였을까. 삶의 태도가 바뀌긴 했으나 근본이 바뀐 것은 아닐 텐데. 인생을 살아가려는 자세가 달라진 것은 아닌데. 그런데 ‘이쪽’은 되고 왜 ‘저쪽’은 되지 않은 걸까. 왜 과거에는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행동이 실패하기만 한 걸까. 목표가 멀어지기만 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답은 알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만족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생이 고아였기에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납득이 가는 행동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비굴하게 살았기에.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몰랐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시현은…….
===
<킬 더 킹을 즐겨주시는 분들께>
안녕하십니까, 군주의 위를 누리는 후계자님.
이시현님은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이십니다.
그리고 킬 더 킹, 군주를 정하는 게임에 참여중인 후계자입니다.
당신은 이제 스스로의 만족을 깨달았습니다.
단 한 번 있었던 타인의 선택으로 인생의 시작점을 잘못 짚었고 탐닉의 후계자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허나 이제 당신은 탐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탐닉하세요. 이 세상 모든 쾌락을 탐닉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세요.
그러면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각성 보상: 육욕(肉慾) C등급(탐닉의 군주) and 자위(自慰) C등급(탐닉의 군주) and 우월(優越) C등급(탐닉의 군주).
* 육욕: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성적으로 흥분시킨다.
* 자위: 자신을 동정하고 강해지려 노력할수록 능력이 상승한다.
* 우월: 자신과 타인의 격차에 따른 압제를 실행한다.
===
이시현의 눈앞에 뜬 퀘스트 창.
아니, 퀘스트 창의 모습을 빌린 어떤 선언. 이시현은 그것을 바라보고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은 감정이 목울대를 넘어 포효로 토해질 것 같았지만 애써 억눌렀다. 탐닉의 군주가 지닌 특기, 아니 권능. 자신이 목표로 하는 군주의 권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도 C등급이나 되는 것을. 세 개의 권능은 모두 자신을 깊이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흑공자와 백공자가 여성들에게 행하는 행동과 비슷한 짓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하.”
이시현은 뺨을 타고 흘러 턱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서 웃음을 지었다.
“미노.”
미노는 그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쿵, 하고 가슴에 고동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미노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얼굴이 붉어지고 젖꼭지가 딱딱해지고 허벅지를 오므리게 된다.
“미노. 나의 노예. 나의 성노. 나의 무기. 나를 사랑해라.”
이시현의 말에 미노는 “네.” 하고 대답했다.
미노의 입가에는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선이 떠올라 있었다. 입꼬리가 쭉쭉 올라가서 평생 지어본 적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뺨에 홍조를 드리웠다. 열이 올라 땀이 흘러서 어느새 온 몸이 축축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시현은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열렬하게 혀를 섞고 타액을 교환한 미노는 입술을 떼었을 때 완전히 풀어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육욕]의 권능으로 인해 미노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무장이 되었음에도 약에 중독된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여기가 복싱 체육관이 아니었다면 뭔가 심각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우월]의 권능이 더해지자 주인인 이시현의 명령에 의해 미노는 그의 의도에 따른 행동을 수행했다. 미노를 성적으로 괴롭히고 또한 그녀를 눌러서 완벽히 우월해지고 싶다는 그 생각을 정확히 읽은 것이다. 미노는 모든 가면과 태도를 벗어던지고 육욕에 녹아내린 여성의 모습으로 흐물거렸다.
본래의 미노는 이시현을 주인이자 상관으로 인정해도 겉으로 티를 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매우 잘 훈련된 어스 엠파이어의 여성을 연상케 했다.
“흐.”
저도 모르게 흐린 웃음을 터뜨리고서 미노와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이제 미노의 모든 것을 가질 때였다. 물론 영원히 이렇게 녹아내린 미노를 보고 싶진 않으므로 나중에는 걸었던 권능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미노는 좀 깐깐하게 대하는 것이 미노 답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노는 자신이 이렇게 된 모습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흥미가 생겼다. 서둘러 나가려던 그는 여성과 몸이 부딪쳤다. 놀랍게도 이시현이 조금 밀렸다. 여자와 부딪쳤는데 밀렸다?
“어?”
이시현의 당황에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시현이 컸던 탓이다.
이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여자는……. 이시현에게 홀려 있던 미노가 멈칫했다. 그녀는 즉각 이시현을 모른 척 하고 슬며시 체육관의 사각지대로 들어갔다.
“음? 너 누구?”
이시현은 눈앞의 여자를 알고 있다.
이시현이 대답했다.
“오늘 들어온 사람.”
“잘생겼네. 물론 더 잘생긴 사람은 따로 있지만.”
여성이 싱긋 웃었다. 가볍게 웃었는데도 요염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시현은 이 여자를 안다.
오늘 봐서 안다는 농담 같은 말은 아니었다.
이시현은 그녀를 영상매체를 통해서 보았다. 그녀가 매우 잘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도, 복서라는 것도, 그리고…….
“여긴 작은 곳이지만 제법 괜찮아. 나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곳이니까. 열심히 돈을 물어 바치도록 해. 아, 가끔이라면 나도 가르쳐줄테니까.”
“너는 누구지?”
이시현의 물음에 여성이 답했다.
“이성아. 아마추어 복서.”
흑공자의 ‘졸’이라는 것도.
미노가 직감에 의해 모습을 감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성아. 아마추어 여자 복서.
그리고 흑공자의 졸.
이시현이 처음 보았던 흑공자와 백공자의 말이 벌이는 전투의 당사자. 사람을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주먹만으로 벽을 죄다 부수고 사람의 머리통을 으깨놓던 괴물. 당시 이시현이 느낀 충격은 실로 대단했었다.
그런 그녀를 이런 곳에서 대면할 줄이야.
복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복서를 하기엔…….”
이시현은 자신의 긴장을 읽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후 물었다.
“너무 예쁘지 않아?”
“그건 그렇지.”
이성아가 씩 웃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미소였다. 과연 무장이라고 할만 했다.
대화를 나누는 이시현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흑공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하를 만났다. 이렇게 대화만 하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뒤를 쫓아볼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하지만 유혹하지는 마. 난 벌써 사랑하는 님이 있거든.”
이성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흐음. 안타깝군. 뭐, 하긴 나도 도의는 지켜. 나 정도 되는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한다는 건 네 마음 속 그가 그만큼 잘난 사람이라는 거겠지.”
이시현은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워낙 바빠서 여기를 오래 다니지는 않을 테지만 가끔씩 인사나 하자.”
“미안. 난 곧 여기를 그만둘 거거든.”
이성아의 대답에 이시현이 잠시 숨을 멈췄다.
“무슨 이유? 더 큰 물을 찾아서? 하핫.”
“그렇다기 보단 조만간 큰 일이 하나 터질 것 같아서 말이지. 그 일에 참여해야 해서. 뭐,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이성아가 즐거운 듯 언성을 높였다.
나와 관계없기는.
이시현은 웃고 싶은 기분을 죽자고 억누른 후 입가를 손으로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그만둔다는 말을 전하려 한 거였군. 오늘 저녁엔 볼 수 있을까? 신고식으로 호텔의 레스토랑을 대여했는데. 거기서 한 번 쏘려고.”
“내가 먹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니 거절하지.”
이성아는 입술 밖으로 분홍색 설육을 꺼내어 입가를 핥았다.
뭐를 먹는지는 그 동작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성아가 자리를 지켜주었다. 문에서 몸을 슬쩍 비켜선 것이다. 이시현이 거절했다. 도리어 그가 문가에 기대서서 이성아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레이디 퍼스트.”
이성아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녀는 문가의 벽에 바짝 붙어있는 미노를 보지 못했다. 이시현이 그 몸을 가린 채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잠깐. 네 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이성아가 들어가기 전에 물었다.
이시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왕 얻은 힘인데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흑공자의 부하이지만 지금 얻은 권능을 사용한다면 또 어떻게 될지도 몰라. 이시현이 정체를 밝히려던 시점이었다. 그의 휴대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아, 이런. 미안.”
“됐어.”
이윽고 이성아가 사라졌다. 이시현은 휴대폰을 들었다. 미노의 전화번호가 떴다.
‘하지 말라는 거지.’
조금 아쉬운 기분은 있었지만 미노의 염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권능인 [육욕], 더하여 [우월]로 이성아를 흑공자의 영향력에서 빼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간첩 비슷하게 활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안 될 경우에는 이성아를 없애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시현은 자신이 조금 냉정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통화취소를 누른 이시현이 입을 열었다.
“미노. 나와.”
미노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젖힌 체육관의 문 뒤에서 그녀는 기척도 없었다. 이성아 수준의 ‘졸’은 인식도 못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