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 회: 8> 화려한 나날. -- >
여성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이시현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길게 하품했다. 하품 같은 거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몸인데 그동안 해왔던 게 있는 터라 버릇처럼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해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졸린데.
이시현은 점원들이 한데 모여 자신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것들을 한귀로 흘려들었다.
자신이 잘난 것을 알고 있지만 돌아다닐 때마다 주목의 대상이 되는 건 조금 피곤하다. 조금만 결점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꾸벅꾸벅 조는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주희가 이시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웠다.
“자기, 자는 거야? 피곤해?”
“어, 음. 아……이제 풀렸어.”
잠에서 깬지 몇 초 지나지 않아 건강은 만전을 유지한다. 수면기도 한 번에 달아나버리고 피로도 사라진다. 이시현이 눈가를 조금 좁히고 남민아와 강주희를 바라보았다.
“오, 제법.”
두 명 다 치마를 구입했는데 제법 잘 어울린다. 5cm정도는 더 짧아도 좋을 것 같지만, 그래서야 이 매장을 찾는 이들이 입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방도 이렇게 구매 완료.”
“오빠, 여기 카드요.”
그새 카드로 계산까지 마친 듯 하다. 이시현은 남민아가 건네주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카드는 카드용 지갑에 들어가 있었다.
“이건 미나의 선물. 물론 오빠 돈으로 산거지만요.”
“어, 음. 그래.”
“오빠는 다 좋은데 패션이 좀 지루하다니까요. 이런 지갑 들고 다니세요. 알겠죠?”
“그러지.”
어쩔 수 없는 것이 잘 나가는 패션 같은 걸 익히기엔 한없이 부족했던 과거다. 어스 엠파이어 주민의 지식을 가졌어도 뭐가 멋있고 뭐가 유행하는 건지 모른다. 머리를 자른 것도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가 있는 미용실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다듬은 것뿐이고. 이시현은 정장만 걸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의는 받기로 했다.
“그럼 다음엔 어디로 갈까?”
“자기 구두 사러 가자.”
“구두, 남자구두는 역시 거기죠. 그치, 언니?”
“응. 거기지.”
해맑게 웃는 그녀들을 보며 이시현은 점차 다리의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결국 시작된 건가. 여자들의 쇼핑이. 어스 엠파이어의 주민 육체로도 점차 진이 빠질 것 같은 피곤함. 이건 차원과 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남성 유전자를 가진 이들을 약화시키는 마력과 같은 힘일 것이다. 틀림없이.
이시현은 그녀들의 손에 이끌려 졸래졸래 따라갔다.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은 것 아닐까.
기민한 감각은 그렇게 이시현에게 재촉했지만, 이시현은 애써 그런 감각을 억눌렀다.
모처럼 있는 호의야. 그녀들을 범하고 강간하듯 섹스를 나누고, 온갖 음탕한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있어야지 당연히!
“……졌다.”
자신의 몸을 보호해주는 직감을 무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앞으로는 지켜야지.
체력은 풀인데 정신력이 제로가 되어버린 기분을 느끼며 이시현은 비틀비틀 거리다 벤치에 반쯤 엎드리다시피 쓰러졌다.
“벌써 지친 거야? 정말, 정력은 엄청 좋으면서 안 되겠네 자기는.”
정력과 정신력은 다르단 말이야.
“그러게요. 오빠는 사람 수십 명은 때려잡을 수 있어도 열 군데 매장도 못 돌아다니네요. 실망이에요.”
실망해도 좋아. 그리고 열 군데에서 쓴 시간이 얼마야!
“하는 수 없죠. 기다리고 있어요.”
“자기도 허리만 놀리지 말고 체력 좀 키우고.”
이시현이 축 늘어졌다.
그로기 복서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쇼핑 구경 안 와.”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이 여자들 정말 체력 좋다고. 그리고 취향의 일을 하면 피로해도 그 피로감을 이겨낸다고.
“뭐 그래도 제법 돈 쓰는 재미는 있었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사업은 아니지만 자신에게서 출발한 회사의 카드. 카드를 내고 긁는데 한도액수를 보며 기겁하는 이들을 보면 역시 돈이 최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자, 그럼 슬슬.”
이시현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자식들을 쓸어버릴 방법을 연구해볼까.”
흑공자와 백공자.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말의 숫자를 맞춰서 한판에 결정낼 수 있는 승부.
하지만 둘 모두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터라 영역을 넓히고 싸움을 키워서 한 방에 끝내려 한다. 화려하고 우아하게, 잔혹하고 아름답게. 각자의 취향에 맞춰서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굴복시키는 그런 싸움을 원하고 있다.
덕분에 이시현은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들보다는 빠르게 세력을 늘리고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퀘스트라는 것 덕분에 자금도 얻고 준수한 무장도 얻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밀리는 편이다. 그러니 아직은 은신해서 정체를 감추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체를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시현은 한 달 약간 못 되게 잡고 있다.
그쯤 되면 그들은 명백히 3자의 행방을 알게 될 것이다.
둘 모두를 상대한다? 그건 당연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시현은 앞으로의 계획을 짜면서 둘 중 누구를 치고 누구에게 우호관계를 쌓을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다.
‘흑공자 게인. 사디스트.’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 가느다란 선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는 미소년. 눈매가 가늘고 눈동자가 썩어있으며, 목소리가 가늘지만 깊이 울린다.
외형으로는 15, 7세 사이의 남성. 몸의 선이 대단히 가늘지만 들고 있는 흉기는 지독하게 무겁고 날카로운 것을 쓰는 것으로 보아 무기를 사용하는 방식에 익숙하고, 생각 이상으로 힘이 뛰어날지도 모른다. 무장 수준은 안 될 테지만.
성격은 좀처럼 대단히 잔혹하고 잔인한 남자. 여자를 말 그대로 가축처럼 보고,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필요가 있어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 고문하고 죽인다. 그리고 생각보다 효율적이라, 고문하고 죽이는 것 외의 일은 굉장히 능률적이고 차분하게 처리한다. 그 때문인지 살해와 폭력의 사용에 거부감이 없고 가장 치명적인 곳만 골라 쳐대서 한 대라도 맞으면 상대는 빈사상태가 된다.
사람의 약점을 찾는데 천부적이고, 그 약점은 육체적인 약점 뿐만이 아니라 숨기고픈 과거, 트라우마 같은 것들조차 해당한다.
잔혹무비한 살인마. 하지만 머리는 매우 좋고 인간과 자신을 별개로 구분하는 인간이다.
권능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는 것. 그의 성향에 꼭 맞는 것으로, 그의 잔혹함을 본 이들은 차라리 죽는 것을 희망하며 그에게 공포로 억눌려 복종한다.
‘백공자 샤를. 나르시스트.’
이시현보다 큰 키에 굽이치는 금발. 파란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서구적인 미남. 목소리는 단아하고 우아하며, 부드러운 울림이 섞여 있다. 단정한 미소를 지을 때엔 말 그대로 왕자님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일이 돌아갈 경우 입꼬리가 째지고 눈동자가 아래로 향한다.
전체적으로 흰 복장을 갖추고 있으며, 흑공자 샤를이나 이시현보다 선이 제법 굵은 편이다. 체중도 물론 더 나갈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얀색 복장을 한 것에 비해 검은 장갑을 끼고 있으며 남을 멸시하는 듯한 그 시선이 매우 거슬린다.
성격은 귀축. 누군가를 나락으로 빠트린 후 건져 올리고 구원을 주는데 사실 나락으로 굴러떨어 뜨린 게 자신이라는 걸 숨기고 남의 웃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성격. 속이 터무니없이 검으나 그걸 우아한 태도와 스스로를 낮추는 행동으로서 감춘다. 필요할 때는 굽히는 척 하는 걸 아는 자. 그렇게 구원한 이를 몇 번이나 나락에 굴러 떨어뜨리고 구하면서 자신에게 영혼까지 종속시키는 짓을 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짜는 것이 대단히 능하고, 세부적인 내용 또한 계획을 짜는 때부터 준비하고 있는 터라 그가 짠 계획은 대개 이루어진다. 머리가 대단히 좋으며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굴복시킨 이에 한정 벗어날 수 없는 최면을 걸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에게 도덕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타인을 굴복시키고 구원하는 과정의 자신을 몹시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일부러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타인을 나락에 빠트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장난감이며 자신의 뜻대로 제어되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이시현은 두 명을 생각했다.
“그럼 나는 어떻지?”
두 명에게 정체가 들키기 전까지 자신의 장점을 만들어야 한다.
제일 선결과제는 자신을 완성하는 것.
이시현이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운이 한 번 트여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
과거에는 그 어떤 일을 해도 좋지 못한 결과를 이끌었지만 이번은 작정하고 자신의 매력에 취하고 자신의 욕심을 부리니 성공한다.
그리고 세 군주가 합의하여 만들어낸 함정을 누구보다 깨끗이 통과하여 상당한 능력의 무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초보이기에 여러 편의를 봐주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 퀘스트의 대가로 상당한 권리를 획득하고 있지만 본연의 실력을 높이지 않으면 결국 흑백의 적의를 피할 수 없다. 스스로도 강해지려고 생각은 해보지만 노력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사회는 아닌 터라 영민해진 두뇌만 굴리며 상황을 제어하는 정도.
근래에는 흑백의 위협에 빠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흑백을 쓰러뜨리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시현은 둘을 상대로 어떻게 대적할 수 있을까.
이시현이 이시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바라는 건 흑공자와 백공자가 자멸하는 게 아닌, 둘 모두를 굴복시키는 것.
”
죽이는 것도 터무니없이 어렵겠으나 굴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흑공자와 백공자 모두 누군가에게 굴복할 성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현은 그런 목표를 세웠다.
“나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
이시현은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허공에서 파문을 그리며 나타나는 왕권.
‘어떤 인간이든 장군으로 만들 수 있는 보석’이다.
이시현은 이 보석을 보는 순간 생각했다.
“흑공자 게인과 백공자 샤를도 결국 ‘인간’이잖아.”
어스 엠파이어는 다른 차원, 다른 시간대의 지구인이다. 지구인과는 아득히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아직 ‘인류’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이시현은 서늘하게 눈매를 좁히며 입 꼬리를 올렸다.
“왕권을 하나 더 구한다. 끝까지 아낀다. 그리고 놈들과 대치한다. 정면에서 대치하는 거야. 그리고 사용하는 거야.”
왕권을. 그들에게. 인간들에게.
흑공자 게인과 백공자 샤를에게. 두 후계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