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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82화 (82/141)

< -- 82 회: 7> 플랜. -- >

남자는 여자를 보살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약자며 육체적으로 불리하다.

머리를 쓰게 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 남자가 무기를 들면 더 강하고, 더 우월하다.

백공자 샤를은 기본적으로 여자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어스 엠파이어의 풍토가 그러했지만 그는 특히나 그랬다. 물론 여자를 쓰레기처럼 버리고 낭비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시간 쾌락을 얻겠다고 예쁘장한 여자를 해체하는 흑공자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인정할 뿐이었다.

‘어떤 여자든지 자신보다 저능한 놈에게 붙어있다면 떼어내서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우월한 자신이 해야 할 사명.

그래서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일을 나가고 있는 30대 주부를 사냥감으로 지목했다.

이름은 조미연. 지금 샤를의 아침에 나오는 우유를 채워주는 여자였다.

조미연은 임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는 못했다.

너무 큰 충격에 유산해버렸다.

한창 꿈 많고 미래를 그리던 그녀는 한 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관계했다. 순진한 여성이었던 조미연은 금방 그와의 쾌락에 빠져버렸고, 결국 인생이 뒤틀렸다. 그리고 나이 서른. 제대로 된 결혼식 없이 결혼하게 된 그녀는 일을 했다.

평생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주겠다는 프로포즈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언제나 많았다.

처음에는 남편도 의욕적이었다. 조금 성격이 급한 면은 있지만 조미연이 반하여 결혼하게 된 남자다. 하지만 그가 어딘가 어긋난 길로 빠지고, 그리고 사업 실패와 함께 빚을 지게 되자 그만 울화를 참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가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상대는 한 명 뿐이었다.

겨우 아기를 가졌다. 부부의 속궁합이 좋았던 것과는 반대로 아이가 좀처럼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조미연이 그동안 파정을 거부했다. 입으로 받아내준다거나 손으로 훑어주는 식으로 속에 싸는 걸 그만두게 했다. 아이를 낳게 되면 힘든 일이 더해질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폭력을 참아내고, 고통을 참아내고, 주야로 일을 나갔다.

그리고 목표한 돈에서 조금 부족하지만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돈이 부족해지고, 삶에 여유가 없어지자 남편이 각박해진 것이다. 그도 처음부터 나쁜 건 아니었다. 악당은 사기를 친 사람. 그리고 약자에게 잔혹한 세상인 탓이다.

돈을 모았고, 보여주었다. 이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남편 또한 깊이 사죄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를 갖기로 했다.

아이가 들어섰고, 3개월이 되었다.

많이 바뀐 남편은 더 이상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다. 집에서 술만 마시고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대신 일을 했다. 막노동판에서 일을 해서 녹초가 되어 들어왔을 때도 그는 아내의 아주 조금 부푼 배에 귓가를 가져다대고 웃는 사람이었다.

행복한 일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는 태양호텔의 일부 구간에서 공사를 했다. 성실함과 젊음으로 남편은 그만한 곳에서 일을 받아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붕괴가 일어났다. 남편은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지만 다리 한쪽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온몸의 관절이 부러지고 반 시체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미연은 그만 기절했고, 아이는 유산했다.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 잔혹한가.

어째서 하필 그때 호텔이 무너지는가.

도대체 어째서…….

그때 샤를이 길거리에서 섧게 우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차량에 타고 있지만 창문은 반쯤 열어둔 채로 세상의 썩은 매연을 즐기고 있던 이였다. 만약 게인이었다면 더럽다며 학을 떼겠지만 샤를은 반대였다. 더러움을 알아야 깨끗함을 안다. 약함을 알아야 강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믿었다.

자신이 잘난 이유도 잘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 않던가.

천천히 멈춰선 벤츠 안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던 샤를은 고개를 돌려 길거리 한복판을 응시했다.

조미연이 그곳에 있었다.

흥미를 돋우게 하는 여자였다. 애는 없지만 젖은 차 있었다.

인생이 증오스럽다는 듯, 세상이 원망스럽다는 듯 소리 높여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다 피한다. 재미있다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놈들도 있었다. 그 울음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한데도, 누구 하나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갑자기 터진 오열. 울분이 치솟아 만들어진 슬픔. 샤를은 타고 있던 벤츠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거하나만으로도 한화 200만 원에 이르는 손수건을 건넸다. 조미연이 새빨개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샤를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끼고있는 가죽장갑. 장갑위에 얹은 것은 곱게 접힌 아르마니 손수건.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도움?”

갑자기 이건 무슨 일일까.

너무 울어서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자신의 눈 앞에 왜 이런 남자가 미소 짓고 있는 걸까. 손수건에서 느껴지는 향기는 터무니없이 달콤하고, 그가 살며시 무릎을 굽히고 있는 모습은 무슨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울고 있는 걸 봤어요. 섧게 울고 계시더군요. 세상을 향한 통곡, 왜 이렇게 세상은 나에게 잔혹한가. 굳이 표현하자면 그와 같은 종류의 오열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잘 들어요. 그리고 지나치지 못하지요.”

“그, 어, 아……?”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말만 하는 걸까. 어떻게 그런 걸 전부 알고 있는 거지? 어째서, 갑자기, 세상은 나를 버리려고 하던 것이 아니었…….

“따라오세요. 나를 믿을 수 있다면. 부탁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거든요. 기도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겁니다.”

그 조각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은 자신감이 넘쳤다.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돈이 필요해요. 하지만……그 돈을……그 돈이 얼마나 되는데……!”

오열. 한 맺힌 분노와도 같은 고함이었다.

“그렇게 아픈데! 치료도 못하면서! 그래도 목숨만은 살릴 수 있는 값으로 1억이 든다는데!”

조미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감정을 애써 참아내며 소리쳤다.

“구해줄 수도 없잖아!”

다리 한쪽이 잘려나가고 전신불구가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치료를 하겠다고 한다.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사람이 그꼴이 되었는데, 완벽한 치료도 할 수 없으면서 수천 만원 돈이 나온다. 1억에 가깝다. 치료비가 1억. 1억을 모은다는 건……!

“1억이 필요한가요? 그게 부탁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도움이군요.”

샤를은 싱긋 웃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가죽장갑을 낀 손을 딱 하고 부딪치자 S클래스 벤츠에서 가공할 미녀가 나타났다. 007가방으로 불리는 가방을 든 채였다. 샤를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녀에게 넘겼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는 곳에 있는 은행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주목한다.

길 가던 사람들이, 방관하던 이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촬영하는 이들이 기대한다. 샤를은 느긋하게 서 있었다. 약 5분. 그 약간의 시간이 길어보였던 것은 그 후에 있을 일이 좀처럼 있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까.

1억. 만 원짜리 현금으로 일만 장.

007가방을 열자 나온 금액이다.

조미연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샤를을 올려다보았다.

샤를은 거두었던 손수건을 다시 내밀었다. 조미연이 양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얼굴을 덮었다.

환호가, 감탄이, 탄식이, 그리고 경쾌한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축복했다.

사람들의 입으로 화자되었다. 넘어갔다. 인터넷에 그 모습이 촬영되어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세계적인 기업인 BP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새삼스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을 떠올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만을 활용하는 한국의 정치인과 재벌들을 욕했다.

조미연은 구원 받았다. 틀림없이 세상이 버린 자신을, 샤를을 통해 구원 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도움이었을 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까칠하기 이를데없었던 병원에서, 현금으로 1억 원을 가져오자 대접이 바뀌었다. 샤를이 조미연의 뒤에 있었던 이유도 있다.

즉각 최고의 의료진이 조미연의 남편에게 붙어 치료했고,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치료도 서서히 가능해졌다.

“어떻게 은혜를 갚으면 될까요.”

조미연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남편의 의식이 깨어날 거라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샤를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너무 큰 은혜를 입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적지만, 하지만……무리한 것이 아니라면 꼭……도움이 되고 싶어요.”

샤를이 미소 지으며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마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남자가 여자를 향해 춤을 청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조미연은 수줍어하며 그 손바닥 위에 자신의 작은 손바닥을 얹었다.

“단 한 번만,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남편과 아내, 즉 그와 조미연 간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는 보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 조미연은 정말로 그에 대해 감사했다.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모든 생을 통틀어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그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네.”

조미연은 수줍게 대답했다.

샤를이 눈꼬리를 비틀었다.

“다행입니다.”

귀밑까지 찢어질 것처럼 솟구치는 입을 가리려 듯이 다른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샤를이 대꾸했다.

“그 큰 대가를 치루시겠다니.”

입을 가린 손 때문에 뒤의 말은 다소 뭉개져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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