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1 회: 7> 플랜. -- >
***
‘검둥이.’
강의곤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섬뜩함이었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피부에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비틀린 미소와 가는 목소리는 인간이라는 개체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경각심을 돋우게 했다.
개성향우회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회장으로 나타났지만, 강의곤은 나름 그를 알고 있었다.
서울의 조직 90%이상을 와해하고 지배한 조직. 이름은 웃기지만 실력이나 행사하는 폭력의 수준이 가공할 지경이었다. 경찰들은 태양호텔의 테러에 이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역사상 최고의 경계령을 발휘했다.
그 정도 정보는 소유하고 있었다.
강의곤은 개성향우회의 회장, 조직의 보스가 17세 정도의 소년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게인이라고 한다.”
그는 대뜸 전화를 통해 강의곤을 만나러 가겠다고 연락했다. 폭력을 원치 않으면 자리를 비우라고도 말했다. SP정도는 허용하지만 경계를 세운다거나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무력제재를 가하겠다고도 했다. 협박, 혹은 테러. 그런 조짐.
강의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겠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흑공자 게인. 이시현의 적. 그리고 BP그룹이라고 하는 사상 초유의 기업 후계자로 등장해 놀람을 주었던 백공자 샤를의 라이벌.
가늘고 약한 인상이었다.
피부도 창백했다.
목소리도 가늘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는 짙은 피냄새가 났다.
죽음의 향취가 풍겼다.
고고하게 앉아있는 가운데 강의곤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신다는, 표현 그대로의 경험을 했다.
“화를 내지 않는군.”
게인이 반말로 지껄였다. 화를 내지 않는군, 그 말의 뜻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반말, 갑작스런 만남, 거만한 태도.
“호텔을 잃고 난 후 생각을 해 보았으니까.”
강의곤은 한 그룹의 회장이었다. 삶에 즐거움을 돈을 버는 것 외에 찾을 수는 없는 속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의 위에 있었고 한일 양국을 잇는 기업의 총수이기도 했다. 무게를 잡아야 할 때는 능숙하게 잡을 수 있다. 그것이 위에 앉은 이들이 살아가는 법이다.
“호텔을 잃고 여러 방면에서 조사를 했지. 그리고 한 명을 만났어. 뭔가 다르군, 그렇게 이해했다.”
“한 명을 만났다?”
“굽이치는 금발에 하얀 정장을 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두른 남자.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강의곤이 말하는 남자를 흑공자 게인은 잘 알고 있었다. 게인이 턱을 괴고 눈을 반쯤 감았다.
“양놈이군. 어째서 놈과 나를 엮을 생각을 하지?”
“그 눈.”
강의곤은 손가락을 내밀어 게인을 향했다. 게인의 뒤에 서 있던 붉은 머리칼을 길게 땋은 여성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 깔았다. 게인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눈을 보아야 한다고 들었지. 그리고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어. 눈에는 사람들의 감정이 섞여 들어가 있으니.”
강의곤이 지껄이는 말들은 변명이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강의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용하려는 자의 간교한 눈빛. 하나는 눈에 들고자 내리깐 흔들리는 눈빛.
백공자 샤를과 흑공자 게인의 시선은 그것들과는 달랐다.
아, 나를 보니 나도 한 번 내려봐주지. 라면서 거만을 떨며 오만한 시선을 내던지는 것이 백공자 샤를.
이걸 어떻게 찔러죽일까, 어떻게 요리할까 하고 먹잇감을 관찰하는 듯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는 것이 흑공자 게인.
둘 모두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그 시선은 둘을 공통점으로 만들었다.
“그 개자식을 봤다면 납득이 가긴 하는데. 그럼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고?”
“그의 적이겠지. 그리고 아마, 그와 맞먹을 어떤 힘을 지닌 이들이겠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을 사용하겠지. 그리고 대단한 권력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획득할 테고. 특히나.”
“특히나?”
“그 여자는 실로 놀랍군.”
강의곤이 소파에 앉은 게인의 옆자리에 비스듬이 서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그에게도 그런 여자가 있었지. 나의 호텔에서 여성들이 치고박고 싸우다 1층이 날아가고 건물이 붕괴했다더군. 처음엔 믿지 않았어. 그러나 두 번째 테러, 무너진 호텔에서 일어난 사태. 거기서도 여자들이 보였다고 하던데……그 여자들이 관련이 있는 거겠지.”
“재미없는걸. 생각보다 똘똘하잖아. 위에 있는 놈들은 원숭이 뿐인 줄 알았는데.”
게인은 재미없어졌다는 듯이 낙심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저항하고 분노하고 협박하고 위협하면 고스란히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반쯤 적이다 싶은 생각으로 찾아왔고. 하지만 먼저 흰둥이, 백공자 샤를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놀랄 일은 그때 다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백공자 샤를, 놈은 약자에게 지독하게 강하지만 강자에게는 약했다. 사회적인 지위도 물론이거니와 남들의 시선도 신경쓰는 나르시스트였다. 나름대로 예의바르게 대화가 끝났을 터.
이제 와서 협박을 하기엔 늦었다.
그나저나 백공자 샤를, 그 새끼가 왔다 갔다고?
게인이 고개를 돌려서 머리를 땋은 여성을 응시했다.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왔다간 것 같군요.”
“거짓말이 아닌 거군.”
게인이 피식 웃었다. 무장은 강의곤의 심장소리를 듣고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녀가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면 정말로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강의곤은 분명히 백공자 샤를을 만났다.
그들이 강의곤의 정체를 의심하기 전에.
BP그룹의 후계자로 한국에 왔고, 기업들의 회장들과 안면을 익힐 때 한 번.
‘이 모든 게 고려된 바는 아니겠지. 하지만……정말로 이런 식으로도 말이 맞춰지는군.’
강의곤은 확실히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있었던 일을 조합하는 것이니까. 만에 하나 상대가 거짓말을 눈치챌까봐 분신을 사용하는 여자를 데리고 온 녀석이 실제로 상황을 재현해서 있었던 일로 만들었으니까. 강의곤의 말을 거짓으로 판단할 수 없던 게인은 몸을 일으켰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더 이상 그쪽의 사업권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그리고 힘을 쓸 일이 있다거나, 죽음이 필요할 때는 부탁해도 좋아. 주제파악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협박이나 빈말은 하지 않아. 다만 이쪽에 방해가 되면 오래 살지 못할 거야.”
“그러도록 하지. 그런데 보상은 그것뿐인가?”
“보상?”
“호텔을 날려먹은 것 말이지.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았거든. 엄청나게 때려댔어. 자네의 적은 나름대로 보답을 해줄 것 같은데. 그쪽은 뭐가 없나?”
흑공자 게인이 눈매를 비틀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기이하게 목을 꺾은 채 강의곤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흠칫’할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한 순간 방을 채웠다. SP들이 경계를 취할 정도로. 시선 하나만으로 공기의 질을,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늙은 것. 적당히 까불어라.”
지옥. 가장 깊은 심연.
그렇게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무죽죽하게 죽은 눈으로, 햇살 아래 있어도 한없이 어두운 두 눈으로 강의곤을 노려보며 흑공자가 말했다.
“주제를 알아라.”
“……음.”
그래도 뭔가 대꾸를 하고 싶었던 강의곤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몇 번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끝이었다. 더 대꾸하면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인간이 가장 선연하게 느낄 수 있는 죽음의 공포가 강의곤의 의지를 짓눌렀다.
흑공자 게인이 십수 초 더 노려보더니 강의곤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검은 정장 바지에 두 손을 넣고 방을 나섰다. 붉은색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여성도, 그리고 꽃장식이니 폴로니 하는 옷을 입고 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조폭들도 뒤따라 나갔다.
강의곤이 신음했다.
패배.
인간으로서, 아니, 생물로서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패배하고 말았다.
말도, 권력도, 재능도, 재주도, 살아온 삶의 질곡이나 영혼의 무게, 격. 아무 것도 소용없었다.
그저 생물로서 눌렸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만들어낸 자와, 돈이라는 물건으로 군림해 온 자의 격차였다.
공포.
그리고 좌절.
저건 인간의 탈을 쓴 육식동물이다. 상식도 도리도 통하지 않는 인간해체기다. 저런 걸 어떻게 곁에 두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조폭들의 시선에서 강의곤은 두려움을 읽었다. 그의 행동에 맥없이 따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근래에 조폭들이 유래 없이 활개치고 있다.
수도의 조폭들이 통일되었다는 말도 돌았다.
나름대로 권력의 한 자투리를 잡고 있는 강의곤 정도나 되니 알 수 있는 사실. 그들, 조폭을 지배하는 것은 검은 소년이었다.
흑공자 게인.
그가 감탄했던 백공자 샤를과, 사위가 될지도 모를 이시현의 적.
한없이 어둡고 두려운 적 앞에서, 그에 맞서야 하는 이들이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패배.’
강의곤은 생물로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었거나 강의곤이 인격자라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졌기에 분하다는 감정이 들려면 다시 그와 대치했을 때 싸워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데, 강의곤은 그의 그런 시선을 ‘다시 목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패배를 인정하면 그런 시선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 검은 시선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런 게 적이란 말이지?”
백공자도, 이시현도 잊힐 정도로 완전한 칠흑. 말 그대로 흑공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무게였다.
사실은 동렬에 있다고 해도 격에도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강의곤이 생각할 즈음 방문전화가 울렸다.
백공자 샤를의 전화였다.
재차 깊은 한숨을 쉬면서 그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오만해진 백공자 샤를을 보며, 강의곤은 몇 번이고 그 무게에 짓눌리려는 것을 참았다.
‘네 녀석은.’
이시현의 자존심 강해 보이던 표정이 생각난다.
‘저들과 같은 반열에서 저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거냐? 정말로?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