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 회: 7> 플랜. -- >
***
마성의 군주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선물이지. 당연히.”
“진짜?”
“미안. 뻥이다.”
고대의 군주가 탄식했다.
“너 이 새끼, 진짜 쪼잔하다. 겨우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 퍼주는 걸로 그런 일을 벌이다니.”
고대의 군주가 하는 말은 그들이 내기했던 어떤 게임에 관해서였다.
탐닉의 군주위를 차지할 후계자, 세 명의 후계자에게 무장을 걸고 배팅했다.
탐닉의 군주가 게임에 초대한 군주는 셋. 고대의 군주, 광신의 군주, 마성의 군주였다.
승리한 자는 마성의 군주. 그는 덕분에 자신의 무장을 건네주어야 했고 게임을 해놓고도 자신의 것을 빼앗겨야 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탐닉의 군주가 배를 잡고 웃기에 내용을 들어보니, 마성의 군주가 무장과 함께 선물이랍시고 어딘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굴해서 넘겼다고.
평범한 사람으로 위장하고 있는데 그 치에게 다이아몬드 광산이 하나 넘어가니 당연히 이목이 안 쏠릴 리가 없다.
다이아몬드 광산 따위 어스 엠파이어의 귀족들에게는 별 거 아니다. 하지만 킬 더 킹, 후계자 선정을 벌이는 행성에서는 별 게 맞다.
“한 나라에 있는 채굴권, 아니 아예 권리를 줘버렸지? 그렇게 하는 거 쉬웠어?”
“당연히. 나에게는 앙리와 루이가 있잖아.”
마성의 군주를 섬기는 두 명의 장군.
앙리, 그리고 루이를 떠올린 고대가 아, 하고 탄식했다.
“그 측천과 같은 특기가 있었지.”
“측천보다는 딸리지만.”
음, 하고 두 명의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측천은 솔직히 괴물이지.”
“황제의 장군이었잖아.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 주인이 상또라이라 적을 워낙 많이 만들어서 군주 자리를 찬탈하지는 못했지만 그거 하나로도 일반적인 귀족들은 다 쓸어버릴 걸.”
예전 흑공자가 탐닉의 군주 휘하로 들어가기 전, 흑공자를 따르던 측천이 적에 맞서 싸우는 건 귀족과 군주들도 본 적이 있었다.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뭐, 그렇게 해서 엿을 먹이셨다 이 말이군.”
“엿은 무슨. 보상으로 다이아몬드 광산도 줬다니까.”
“그게 엿이라는 거잖아.”
“거기선 다이아몬드 광산 주면 엿이라고 부르냐?”
이시현.
그런 이름을 가진 후계자. 급히 만들어진 세 번째 게임 참가자는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는 엿을 먹었다.
그 엿을 먹은 결과로 이시현은 대번에 주목을 받을 것이고 다른 두 명의 참가자인 흑공자와 백공자도 귀와 눈이 있으니 그 소식을 들을 것이다.
개인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얻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그들의 주목을 산다. 뭐하는 놈일까 하고 살펴보면 분명히 그 남자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자식, 어스 엠파이어의 인간이다.’
‘우리가 모르는 놈이 이곳에 있다.’
‘제 3자? 암약하고 있었나?’
‘세 번째 참가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그놈이 대처하는 걸 보고 싶다고 탐닉이 배를 잡고 웃던데 너도 그런 건 아니지? 그냥 화가 난 거 아냐?”
“그야 당연하지. 겨우 머리 쓰는 걸로 다른 두 놈을 엿 먹였다고 내 껄 줘야하다니. 물론 너네들을 이겨서 좋고, 받을 것도 생겼기에 나쁘진 않아. 하지만 말이지 결국은 나도 뺏겼단 말이야. 그래서 손적을 주기는 했지만 열 받잖아. 오공은 내가 심혈을 다해 키운 여자라고.”
“그러셨어요? 하긴, 장군이었는데 일반 무장 됐더라. 그것도 의도한 바지?”
“그야 당연하지. 일부러 오공이라는 번호달린 이름(유니크)도 해방하고 손적이라고 붙여버렸는걸. 덕분에 기억도 날아가고, 장군이었을 때 사용했던 특기도 하나 빼고 다 날아가 버렸지. 게다가 부작용으로 에너지생성은 무장인데 소모가 장군급이라 맨날 뭘 처먹어야 하고…….”
투덜투덜거리면서 마성의 군주가 몸을 일으켰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이다.
“뭐 일단 레벨이 있다고 치면 한계레벨은 일반 무장보다 월등히 높은 걸로 치자고. 뭐 그건 그렇고, 뭐할 거야?”
“경매장.”
“또?”
“다른 거 할 거 있냐?”
어차피 마성의 군주나 고대의 군주가 너무 높은 지위에 있어 할 것이 없다. 어스 엠파이어의 기술력은 개인이 행성 수십, 수백 개를 관리하는 것도 나름의 최적화를 시켜 어렵지 않다. 남는 시간은 이렇게 노는 것뿐이다.
“없지.”
고대의 군주는 그렇게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성의 군주를 따라 경매장으로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
이시현은 냉정히 생각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가 머무르는 집, 강주희의 집은 온수를 틀면 10초 안에 온수가 나오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지만 일부러 냉수를 틀었다. 차갑긴 하지만 못 참을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뒷받침 되었던지 목표한 하나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우선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매스컴이고 지랄이고 얼굴이 나와서는 안 된다.
흑공자와 백공자가 아침마다 꼬박꼬박 일어나 TV를 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터다.
개인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진다는 건 21세기 사회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어떤 수작을 부려서 그런 걸 받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직 채굴이 안 된 다이아몬드 매장지가 있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손적의 말을 따르자면 없던 것을 생기게 하는 건 군주에게는 일도 아니라지만…….
세뇌, 혹은 최면 종류로 예상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여당 총재부터 시작해서 고위관계자, 외국 금융기업 등에서 전화가 열 차례도 넘게 날아왔다. 대통령 비서실에서도 날아온 게 타격이 컸다.
이 정도면 그의 신상명세는 다 떠돌아다닌다고 보면 된다.
뉴스에서는 희뿌옇게 처리가 되어 있지만 회색머리카락의 남자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뉴스가 아니라 신문 쪽으로 넘어가면 대번에 사진이 찍혀 나올 것이다. 모 국의 총리 따님과 사귀던 남자가 대번에 포털 사이트의 검색순위 1위에 등극하듯이.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나오는 돈이 엄청난 것은 좋다.
사치도 즐길 수 있고, 돈 가지고 별 지랄을 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황제처럼 살 수 있다.
몹시 까다로운 결혼알선회사 같은데 가서 컨설턴트가 “저금한 돈이 얼마 있어요?” 라고 물었을 때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 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미친 상황이 된 것이니 당연히 자랑해도 될 상황이다.
그렇긴 한데……이시현은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칠 수 없다.
정체를 들킬 수는 없다.
그는 어스 엠파이어의 군주를 차지하기 위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게임에서 그는 명백한 열세.
다른 두 명의 참가자인 흑공자와 백공자가 피튀기며 싸울 때 힘을 비축했다가 기습해야 한다. 애초에 흑공자와 백공자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승부를 거쳤다. 후계자는 많았는데 그 중에서 살아남은 이가 흑공자와 백공자인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건 스펙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이시현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무리였다. 시운을 보고,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이쪽의 힘을 잔뜩 늘리고, 정밀한 계략과, 충분한 자원과, 그리고 최후의 결단이 필요했다.
손적이 괜히 특기 <둔갑>을 사용한 게 아니다. 결사의 각오로, 들키면 어쩔 수 없이 싸우겠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아직은 아니지.’
그래, 아직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이아몬드 광산을 손에서 놔버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놓으면 ‘아니, 이런 미친놈이?’ 하면서 3차원인 인물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꼴은 아니겠지만 더욱 더 화제의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잠깐.’
음?
뭐라고 그랬지?
이시현은 곰곰이 고민했다.
‘아까 전화 중에 뭔가 기억할만한 것이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죄다 남자들 전화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굉장히 예쁜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흠.”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간다.
생각해두자. 1번 상황으로. 이시현은 냉수를 잠갔다.
그리고 온수를 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제 온수를 틀어도 상관없다.
샤워를 끝마친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대기하고 있던 강주희가 있었다. 강주희는 샤워 룸에서 섹스하자며 졸랐지만 이시현이 거부했던 터였다. 생각할 거리가 잔뜩이었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녀보고 씻고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었다.
“어딜 갈 건데?”
“영감님에게.”
“우리 관계 확약하러?”
“농담이겠지? 내가 혼자서 여당 총재를 어떻게 만나. 그 양반이라도 끼워서 가야 얕보이지 않지.”
정치인들이란 터무니없는 흡혈귀다.
그들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무섭다.
이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시민적 생각이 몸에 깃들어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필요이상으로 두렵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늙어빠진 영감이다 보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수단이 매우 줄어든다.
‘공부도 좀 해야 할테고. 아참, 학원도 있지.’
이시현은 학원을 떠올리고는 이내 곧 얼굴이 밝아졌다.
‘그 학원에 외국인 한 명 정도는 괜찮겠지?’
계획이 잡힌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조각들을 쉴 새 없이 모으고, 이윽고 괜찮은 구도를 완성했다.
‘그녀를 통해 다이아몬드 광산, 저 비싼 엿을 떠넘기고……더해서…….’
생각해보니 살아날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일반인에게 가능한 생각은 아니다.
무엇보다 어스 엠파이어의 남성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시현은 인간이다. 지구인이며, 지구인으로 살아왔다. 어스 엠파이어의 방식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상을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가 따라하라 해도 흑공자처럼 사람을 해치거나 백공자처럼 나락까지 떨어뜨릴 수 있을리 없다. 그의 방식은 다분히 이 시대의 사람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스 엠파이어의 방식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끝났어. 레베카 R. 레이널드. 좋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