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3 회: 6> 승부. -- >
“진법이라. 제법이군.”
높은 빌딩의 한 층에서 앉아있던 흑공자가 기대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본래는 꽤 유명한 회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은 생존자 한 명 남기지 않았다. 경찰과 민간인 등으로 시체를 쌓아올린 말들이 하나둘씩 올라와 흑공자의 곁에 대기했다.
그를 찾아온 무장이 사용할 수 있는 특기 <아달월의 복수>. 108명의 시체를 각 방위에 놓고 만들어내는 강력한 진법을 그는 주저 없이 펼치고 있었다.
“개전은 내가 했으니 이제 비루먹은 개처럼 기어와 봐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군.”
강의곤이 신음했다. 그는 원거리에서 태양호텔의 폐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설프게나마 목격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대답해줄 이는 없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흑공자는 이미 태양호텔의 폐허에서 전장을 준비하고 있다. 시체로 진법을 그리며 그 안에 들어올 적의 무장을 처리하려고 한다.
<아달월의 복수>.
108명의 사람을 죽이고 여섯 방위에 각기의 수를 놓고 그 피로 육망성을 그리면 완성되는 진법 특기.
효율은 꽝이고 시간도 많이 들어가지만 돈이 들지 않고 무엇보다 목표가 불분명해도 그 목표가 진법 내부로 들어오면 자동 추적하여 죽음을 내린다. 아니면 죽음에 가까운 저주를 걸어서 몸을 건사하게 힘들게 한다. 강력한 장군이라고 해도 <아달월의 복수>에 들어와 목표가 되면 한없이 능력이 낮아지고 특기도 사용하기 어렵게 된다.
명백히 드러난 함정이지만 함정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건 큰 장점이 된다.
모르드개.
흑공자를 찾아온 광신의 군주가 내린 무장.
그녀의 특기를 흑공자는 마음껏 써먹고 있었다.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지 있는 무장들을 죄다 꺼내어 사람들을 죽여 댔다. 그리고 진법을 완성시켰다. 그걸 대비하여 조폭들을 조금 전에 날뛰게 했다. 걸리는 일이 있어도 조폭들이 저지른 짓으로 판단할 것이다. 이 무능한 세상은.
“어서 와라, 쓰레기.”
흑공자는 라이벌인 백공자 샤를을 떠올리며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된 듯 눈동자를 뒤집고 옅게 웃는다.
“네놈의 패배다.”
***
“난 여자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자는 많은 것을 남자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지.”
백공자 샤를은 와인글라스를 기울인다.
“물론 진짜로 가치가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말하겠지만 말이지. 이건 참 맛있군.”
잔에 들어있는 흰 액체는 그가 요즘 차지한 어떤 여성의 모유다.
3류 스토리를 급히 짰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좋았던 탓인지 젖먹이 애가 딸린 유부녀는 샤를에게 젖을 제공하고 있다. 젖을 먹지 않으면 죽어버린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짰는데도 불구하고 샤를이 짠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사실 샤를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믿게 될 것이 뻔하니 설정이야 아무래도 좋다. 스웨터를 올리고, 브래지어를 들춘 후 부푼 유방을 양손으로 모아서 젖을 짠다. 값비싼 와인글라스에 반쯤 담긴 젖을 바라보며 황홀한 미소를 짓는 유부녀를 향해 살짝 윙크하며 샤를은 한 번에 비웠다.
“맛있군. 그리고 달콤해. 한 잔 더 주겠어?”
유부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까만색 유두를 비틀어 젖을 짠다. 젖을 짤 때마다 옅은 신음을 흘리며, 가랑이를 꼬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샤를은 순진무구한 처녀를 괴롭히는 것보다는 삶에 찌들고 피로해하는 이들을 나락에 빠트리는 걸 좋아했다. 애인이 있는 여자를 애인 앞에서 강간하고 범하는 게 매우 즐거웠다. 유부녀는 하필 샤를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희소하게 젖먹이 아기가 있다는 이유로 악의 구렁텅이에 빨려 들어왔다.
남편은 샤를에게 세뇌에 걸려 환각제를 먹은 증상을 보이다 사람을 차로 밀어버렸고, 그 후 구속되었다. 샤를은 유부녀에게 위로의 말과 쾌락의 맛을 동시에 전하며 젖을 짜서 먹이도록 했다. 이제 유부녀는 샤를을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하며 젖을 주는 게 생애 최고의 즐거움이 되었다. 샤를은 열심히 젖을 짜며 몸을 비트는 유부녀의 모습을 즐거운 듯 바라보다가 이내 귓가에 손을 얹었다.
“적이 이미 자신의 전장을 만들었다. 100명도 넘게 죽인 모양이더군. 그 자식, 기껏 도발해놓은 것도 모자라 어디서 조폭들을 불러다가 깽판을 부린 모양이더군. 그래서 경찰들을 불러 모으고 거기에 끌린 머저리들을 죽여서 마법진을 만들었지.”
유부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이 끼고 있는 것은 보청기 비슷한 종류였다. 그걸 누르며 혼잣말을 하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샤를은 혼잣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서 3000m 떨어진 허공까지 올라간 무장을 향해서 말하고 있었다.
“마법진의 종류는 아마도 신을 원망하면서 만든 저주의 진법. 육망성이며 시전자가 중간에 있는 듯하군. 분명히 목숨과 관계된 저주 계통일 거야. 일격에 목표를 죽이거나 다수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을 쓴다니까.”
하긴 놈은 쓸데없는 고문이 취미였지.
“저주가 발동하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 하지만 1초, 2초 정도로 목표를 포착하고 저주를 거는 건 아닐 거야.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백공자 샤를을 찾아온 무장의 이름은 프로토아비스(Protoavis).
시조새보다 더 공룡 같은 새로 새인지 공룡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새라고 불리고 있었다.
화석도 제대로 남지 않아 원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
공룡인지 새인지 존재를 알아보기 어려운 개체.
과연 온갖 괴수나 짐승 같은 걸 장군으로 부리는 고대의 군주가 거느릴만한 무장이다.
그녀가 타고난 거짓말쟁이인 이유는 그녀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 애초에 존재 자체가 거짓말, 혹은 가설로 굳혀진 개체이니만큼 그녀는 거짓말을 통해서 더욱 더 자신의 존재를 흐린다.
상공 3km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는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녀는 흑공자가 하는 짓을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흑공자는 백공자의 무장 중에서 날아다닐 수 있는 개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 어스 엠파이어는 오직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며, 인간의 외형을 가지지 못한 무장은 혐오스러운 괴물에 불과하니까. 물론 날개니 기다랗고 뾰족한 귀를 가진 것들조차도 괴물 취급이다. 그런 괴물들 중에서 특기로서 신체를 변형, 혹은 생성할 수 있는 이들은 괴물의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 무기의 활용 정도로 이해한다.
프로토아비스는 그런 의미에서 괴물의 전투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 무장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통해 고스란히 전장을 내려다보는 백공자는 희열에 젖었다.
여러 의미로 게임을 좋아하는 백공자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결과가 나오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게 새로운 무장이군.”
마법진의 중앙에서 흐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여자가 한 명.
108명을 죽인 후 그것을 통해 저주를 거는 마법진을 만들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여성치고는 너무나도 순수해보였다. 저 무장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이만한 마법진을 특기로 사용할 수 있는 여성이다.
평범한 이는 아닐 터.
백공자가 3km 상공에 있을 프로토아비스에게 물었다.
“꽂아 넣을 수 있나?”
“네. 목표추적 OK예요.”
“그럼 꽂아 넣어. 그리고 저주에 걸리는 순간 퇴각해. 원호하지.”
“원호한다는 거 거짓말이죠?”
“진짜로 거짓말이라고 말해줄까 거짓말이지만 사실이라고 말해줄까. 아무튼 가.”
샤를은 인근에 모인 여성들에게 연락했다.
“프로토아비스가 고공에서 드랍 한다. 목표가 침묵하면 그것을 완전히 도륙해라.”
백공자의 보드 게임에서 말이 된 이들이 걸음을 옮긴다. 마법진이 새겨진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어둠 속에 녹아들어 대기한다. 흑공자의 말과 맞부딪치지는 않았다.
영문을 모르겠다.
흑공자는 백공자보다 폭력에 훨씬 더 익숙하다. 그리고 호전성이 높다. 한 번도 부딪치지 않는다는 건 일부러 무장들을 빼뒀다는 말. 무슨 생각에서일까.
108명을 해치우고 마법진, 결계를 새긴 후 흑공자의 말들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처음 보는 무장도 보였는데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어쩌면 새로 얻은 무장보다도 강해보였다.
머리칼이자 꼬리로 전갈꼬리를 달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백공자 샤를이 턱을 괴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걸까.”
모르드개를 중간에 놔둔 후 다른 무장들은 자리를 비웠다.
마치 모르드개를 목표로 공격하라는 듯이. 물론 저격수 같은 걸 생각하고 이런 수를 둔 것일 터였다. 놈은 무슨 생각인 걸까.
“아무튼 좋지. 쏴.”
프로토아비스가 날갯짓했다. 그녀는 머리칼을 날개처럼 만들더니 펄럭이면서 하늘 위로 솟구쳤다. 더 높이 날아올라 홰를 치더니 한 바퀴 회전하면서 더 높은 허공으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상공에서 멈춰선 프로토아비스는 옅게 숨을 내쉬며 머리털을 문질렀다. 머리칼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꽃. 불꽃은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그리고 흰색으로 변하여 프로토아비스 전체를 불태웠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토아비스는 불덩이를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여겼다.
그 상태로 프로토아비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유성처럼. 불꽃처럼.
10, 9, 8……4, 3, 2…….
소리는 없었을 테지만 타고난 감각 때문일까, 모르드개가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다.
불꽃을 머금고 공룡을 닮은 새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모르드개가 양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한다. 물론 그런 것으로 프로토아비스의 낙하를 막을 수는 없다. 작정하고 내리꽂는 공격을 제 아무리 터프한 육체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다.
둔중한 충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지면의 붕괴.
수백, 수천 톤의 압력이 한 점에 향한 듯 지면이 붕괴하고 폐허가 산산조각 분해된다.
불꽃의 길이 균열을 따라 솟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