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2 회: 6> 승부. -- >
그날 저녁 TV에서는 대단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는 듯 뉴스를 하는 모든 공중파 방송에서 하나의 사건을 다루었다.
모 단체의 폭탄테러로 일어난 대참사.
폐허가 된 태양호텔에 기이한 글자가 적힌 것이다.
어느새, 누가 적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도발이었다.
[사흘까지 기다릴 거 있냐?]
손적의 특기 <둔갑(遁甲)>을 통해 피해복구가 한창인 지역에다 써 갈긴 글자였다. 글자는 어스 엠파이어의 사어로서 귀족계층이라면 한 번씩은 익혀두는 언어였다. 쓰기가 너무 난해하다 뿐이지 겹치는 단어나 표현이 하나도 없고, 상당히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글자였으니까. 세 명의 황제 중 한 명이 만든 글자로 필수단어가 7만자 이상이나 돼서 일없는 귀족이 아니면 익히지 않는 표현이었다. 제국에 제국어라고 하는 만능에 가까운 언어가 있는 한 이 사어는 그저 취미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세계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둔갑 특기를 통해 투명해진 상태에서 썼기에 들키지도 않았다.
주어를 빼버리고 도발하듯이 써 갈긴 글자.
그것은 곧 흑공자와 백공자에게도 알려졌다.
“사흘이라는 유예를 걷어 차 버리는 거냐, 쓰레기가.”
흑공자 게인이 눈을 면도날처럽 접고서 살기 번뜩이는 실 웃음을 흘리며 되뇌었다.
“하긴, 깜둥이를 사흘까지 살려두긴 쌀이 아깝지.”
백공자 샤를은 새로 찾아온 무장을 강간하며 쾌락을 만끽했다.
3자를 모르는 이에게는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서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흑공자와 백공자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필요하다면 전화를 하기도 하지만 전면전을 앞둔 지금 전쟁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에 일치단결했다.
계획을 짠다.
어스 엠파이어의 최상급 귀족인 군주.
그 자리를 노리는 두 명의 후계자는 머리가 보통 기민한 것이 아니었다. 간교한 미소를 지으며,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서로를 죽이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계략을 세운다.
“어떻게 할까.”
“그래, 그게 좋겠군.”
판단은 빠르다. 하루 안에 이 승부를 끝내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을 불렀다.
“생각보다 제법 하잖아요.”
손적은 감탄했다.
“그런 식으로 교란작전을 세운단 말이죠? 그것도 당장 생각해낸 방법이 그거고요. 굉장하네요. 확실히 후계자가 될 재주가 있네요.”
더 칭찬해. 이시현이 으쓱으쓱 콧대를 세우며 잘난 체를 했다.
“하지만 말이에요, 그들끼리 대화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뭐 이를테면 ‘네놈의 도발 잘 받아들였다, 어디서 붙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요. 말이 꼬이는 거 아니에요?”
“그들이 그런 식으로 정정당당히 싸울 것 같아?”
“만약에 그런 수도 있단 말이죠.”
“확실히. if로 가정해본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정도는 걸고 하는 거야. 너와 내가 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언어로 도발한 녀석은 누구지? 그렇게. 하지만 말이야. 생각해보라고. 나는 철저한 3자이며 감추어진 사람이야. 그리고 이 승부는 겨우 사흘 안에 결착지어야 하지.”
이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면? 그들은 손해지. 나는 하루 만에 승부를 내지 않는 이들을 한 차례 더 도발할 거거든. 나의 존재, 그러니까 3자가 있다는 게 알려지는 건 확실히 큰 타격이야. 하지만 말이지, 그 3자가 존재하고 있다고 쳤을 때 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연합하지 않겠어요?”
이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 즉시 편지를 두 통 쓸 거야. 흑공자와 백공자에게.”
“뭐라고 쓸 건데요?”
“‘나와 연합하지 않겠나’ 하고.”
존재가 알려지면 이시현에게 좋지 않다. 최소한 장군이 한 명씩 있고 이미 6개월 전 자리를 잡은 흑공자와 백공자를 상대하는 건 너무 어렵다. 이시현 또한 재능은 있지만 그들에 비하면 경험도 미진하고 힘도 부족하다. 최대한 숨기는 편이 이롭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둘이 맞붙게 해서 병력을 소진케 하는 것.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3자의 존재가 들켰을 때에도 나름의 방법은 있다.
흑공자와 백공자, 둘은 절대로 합일되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3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잠시나마 공동전선을 펼 수 있다. 아니, 최소한 서로간의 분쟁을 억제하고 3자를 확실히 치운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3자가 그 둘이 합의를 이루기 전에 아군이 되어주겠다고 한다면?
“……어차피 이 싸움은 3자가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싸움이었어. 너를 비롯한 다른 무장들을 보낸 군주들은 이 싸움의 전개를 조금 빠르게 하고 싶은 거야. 3자가 드러날 수 있을 최소한의 도치를 취한 거지. 그렇다면 받아들일 거야. 3자, 즉 내가 드러나지 않는 편이 좋지만, 드러난다고 하면 최상의 이득을 취할 거라고. 저렇게 도발을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이시현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기 위해 손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전쟁에서 최고의 약자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 섹스만 하고 노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럼 자신만만해하는 결과물을 한 번 볼까요? 아, 그런데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봐. 아니, 내가 네 질문이 뭔지 맞춰볼까?”
“오, 과연 맞출 수 있을까나?”
손적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둘이 싸워서 이기는 쪽을 어떻게 처리할 거야. 그걸 물어보려는 거겠지?”
“정답. 그것까지 대책이 서 있어요?”
“물론이지. 그들이 싸움을 벌일 곳은 지금은 무너진 태양호텔이야. 그리고 나는 태양그룹과 꽤 관계가 있지. 복수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복수?”
“둘의 분쟁으로 특급호텔 하나가 날아갔으니 그 호텔 값은 받아야지.”
이시현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강주희를 향해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강주희를 향해, 이시현은 눈매를 구부려 웃으며 말했다.
“영감 좀 연결해줘.”
“우리 아빠? 왜?”
의아한 듯 묻는 강주희를 향해 이시현이 대답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알 거야.”
밤 열한 시.
폐허 주변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사람이 한두 명씩 살해되기 시작했다.
수상한 메시지, 덧붙여 정신이 나간 듯한 조폭들이 마구 날뛰던 바람에 경찰병력들이 밤을 샐 기세로 다수 모인 가운데 일어난 살인사건이었다. 저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바리케이트 너머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수상한 소리다. 경찰병력이 조를 짜서 움직였다. 그들이 본 것은 어스름한 골목. 골목 안에는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돌아가고, 팔다리가 찢어져 걸레처럼 변한 시체들이 보였다.
“이, 이 미친 광경은 뭐야.”
이렇게 참혹한 광경은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목 졸린 듯한 신음을 토하며 경찰들이 경악했다. 일반 시민. 그곳도 이런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샐러리맨이나 OL들이 잔혹하게 죽어있었다. 결국 토하는 사람도 나왔다.
참다못한 경찰이 결국 무전기를 든다.
“이곳은…….”
소속을 설명하고 암구호를 설명하고 그리고 본론을 꺼내려던 때였다.
“어머나. 경찰여러분. 여기서 뭐하시나?”
반대편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꽤 지저분한 소음 속에서도 굉장히 또렷하게 들렸다.
“빨리 꺼지지 않으면 다 죽어버릴 거예요?”
“너, 너는 누구냐.”
“음. 너희들이 말하는 표현으로는 테러리스트 쯤 되려나요.”
테러리스트. 너희들이 말하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에 경찰은 즉각 이 호텔을 무너뜨린 괴한들을 떠올렸다. 여자라고? 젊은 여자의 유쾌한 한국어에 잠시 혼동이 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음, 그냥저냥 싸울 건데요.”
“싸우다니 누구와?”
“당연히 적과 싸울 거죠. 아참, 그거 알아요? 살인자는 반드시 자신이 살인한 곳으로 되돌아와서 확인한다는 거. 그건 양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목적 때문일까요?”
무전기가 아닌, 생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경악하여 총을 뽑아들지만 총이 하늘로 날아올라간다. 총을 쥔 손가락들이 비산하는 것이 그의 눈에 너무도 잘 보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건 식사를 끝내고 남은 찌꺼기라도 주워 먹기 위해서 다시 찾아온 짐승의 야성일 거라고. 살인자가 다시 현장에 돌아오는 이유는 그때의 쾌감. 그 남은 찌꺼기를 주워 먹기 위해서예요.”
검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노란색 쭉 찢어진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는 키가 큰 여성이었다.
무엇인가가 휙 하고 날더니 심장이 있는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을 만들어놓는다. 휙 하고 휘두르더니 목이 180도로 돌아가 목뼈가 부러진다.
“나 참. 알지도 못하는 언어가 새겨져 있고 한 번 위험현장이 되었던 곳인 줄 안다면 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끼리끼리 모여 있는지. 야성을 키우라고요. 본성을 깨우라고요. 그러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이곳에 머물러 있다간 당신들이 죽어버릴 거라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었나요?”
여자는 대번에 열이 넘는 시체를 만든다. 너무도 간단하게 수십의 사람들을 살해한다.
“약한 생물이면서도 본성을 억누르니 자신들의 묘지가 될 곳으로 알아서 모여드는 거라고요. 참 나, 하필 모든 병력이 모여서 고지(front line)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서 개죽음을 당하나요.”
하의는 실종. 팬티도 입고 있지 않은 다리. 거기에 엉덩이에서부터 발치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꼬리가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전갈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꼬리가 아니라 발치까지 늘어뜨린 땋은 머리였다. 하지만 땋은 머리는 엉덩이 부분에서부터 각질화 되어 전갈의 꼬리를 연상케 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는 몇 개나 되는 심장을 꿰뚫었는지 피로 물들어있었다. 꼬리를 손으로 잡아 뾰족하게 돌출된 부분을 혀로 할짝이며 여자는 발끝으로 시체들을 늘여놓았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경찰병력이 시체가 되어 쌓이기 시작했다.
울려 퍼지는 굉음. 급히 무전을 시작하는 사람들. 경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안 이들의 늦은 대응. 경찰서장은 밤 열한 시가 넘어 이미 집에 가고 없고, 연락도 불통이다. 거듭해서 올라가는 직통전화는 수신음만 울린다. 피해가 확산된다.
경찰특공대가 결국 나타났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일정한 방위에 일정한 숫자로 모여 기괴한 오브제처럼 흩어진 시체들의 뭉치. 그리고 시체를 질질 끌어 그은 피로 만든 선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