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1 회: 6> 승부. -- >
백공자는 재빨리 BP그룹의 후계자라는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에서 그보다 돈이 많은 이도 얼마 없을 것이다. 흑공자는 대한민국의 수도에 자리를 잡고 조폭들을 부리게 되었다. 지난 6개월. 전무후무한 암흑가 정복을 이루고, 이제 서울 인근의 도시에 싸움을 걸고 있다.
각기 재력과 세력을 획득한 그들에 비해 이시현이 가진 것은 매우 적었다.
“곤란하네요. 그래서 이길 수 있겠어요?”
이시현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과연 손적이라는 이름을 쓰는 그녀는 어떤 싸움을 하려할 것인가.
“내가 재력도 세력도 적다면 흑공자와 백공자를 이기기 어렵겠지. 그렇다면 너는 어떤 제안을 할 거지?”
“제안? 내가 제안을 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너는 최강급의 무기인 건 확실하지만 무기만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아이디어 하나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거 아냐?”
“이런. 결국 내게 묻는 건가요. 이런 상황을 빠져나갈 활로를.”
한심하다는 기색이 섞인 손적의 말에 이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존심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두었어. 흑공자 백공자를 상대하는 건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결국 너라는 말이 들어온 이상 둘의 충돌 사이에서 분명히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미 생각한 바가 있고 흑공자와 백공자는 그렇게 쓰러질 거야. 나는 너에게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이시현은 거만하게 웃으며 손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너의 생각을 묻고 있는 것뿐이야. 순수한 호기심으로 말이지. 너의 수준이 어떤가하고.”
“흠. 거짓말 같지는 않네요. 뭐 그럼 말해주죠. 세력을 늘리고 재력을 키워야죠.”
“고작 사흘 안에?”
“그야, 어렵긴 하겠지만 사흘 동안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있거든요.”
손적은 단미애를 가리켰다.
“저 여자를 팔아치워요. 아, 완전히 팔라는 건 아니고 창녀촌 같은 곳에 사흘 정도 맡겨놓으라고요. 그리고 서비스 등급을 높이세요. 저거 무장이죠? 그리고 명(이름)이 있는 무장. 아직 남자 냄새가 많이 안 나는 걸 보니 주인을 맞이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고, 이런 무장이라면 좋아하면서 안을 사람들이 있어요.”
“……내 여자를 팔라고? 창녀촌에?”
“대가로 무장을 빌려달라거나 무구를 빌려달라거나, 하다못해 그걸로 셀을 모아서 새로운 무장을 만들 수도 있죠. 남의 여자를 안는다는 건 이곳에서도 꽤 짜릿한 경험 아닌가요? 틀림없이 팔릴 거예요. 특히나 구멍 안에 사정하게 하는 서비스까지 곁들이면 말이에요.”
이시현은 손적이 하는 말이 자신의 그릇을 보기 위해서인지 고민했다. 이런 걸로 화를 내나 보자, 이런 생각인 걸까. 이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필요 없어. 그깟 걸로밖에 세력을 모으지 못한다면 이런 게임에 참여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하려 했다면 그것도 실패라고 말해두지.”
“그럴 생각 충분했지만요. 그럼 일반적인 여성으로라도 몸을 팔게 하세요. 그녀들의 보지에 저주를 걸고, 음충을 심고, 강력한 향을 품어서 성교를 나누는 이들을 지배하세요. 매력적인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어요. 그녀들을 지배하여 그녀들로 하여금 고위남자들을 지배케 하세요. 경찰청장, 국무총리, 군경의 대장, 야전사령관 등등. 오래 지배할 필요도 없어요. 겨우 사흘 정도면 충분해요. 그런 이들을 지배하여서 흑공자와 백공자가 맞붙는 시점에 쿠데타로 규정, 섬멸하는 작전을 사용하면 돼요. 어차피 그들은 이 세계를 마음대로 황폐화시키겠지만 그러면 손해 보는 건 그들이에요.”
“재미있는 생각이긴 한데, 그들을 어떻게 모으지? 여자는 또 얼마나 필요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녀석들도 있구나. 이시현은 새삼스레 어스 엠파이어의 사회성을 떠올렸다. 여자를 이용하여 사흘간만이라도 세력을 영입하라. 그런 말이 태연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여자는 몇 필요 없어요. 그저 좋은 자리를 하나 만드세요. 그리고 갱뱅(gang bang), 빵.”
갱뱅. 그러니까 집단 난교, 아니 돌림빵을 말한다.
“난 내가 안은 여자들은 다 소중한데.”
강주희도, 남민아도. 이용하기는 하겠으나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미애 또한 물론이다. 그녀들 셋은 이시현이 안고 지배하고 있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계획의 일환이라고 하나 다른 높으신 분들에게 돌림빵 용으로 제공한다는 건 이시현이 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 세뇌하고 이런 약이나 벌레는 없어.”
“그것 참. 아무런 도구도 없는 거군요.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소모용 여자를 만드는 거예요.”
“어?”
뜬금없는 소리에 이시현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반문했다.
“그 매력적인 미모와 건강한 몸, 그리고 적당히 쌓인 돈으로 여자들을 모아다가 성노로 만드는 거예요. 안을 여자가 아니라 써먹을 여자로. 돈도 벌고 필요할 때 사용도 하고. 괜찮잖아요.”
“왜 생각하는 게 죄다 그런 것뿐이야?”
“그야.”
손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스 엠파이어의 귀족 중에 그런 식의 공창을 안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5조에 이르는 어스 엠파이어의 국민들 위, 귀족들은 고작 1만 내외.
하지만 귀족인 군주와 피를 이은 이들은 반란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너무도 강력한 힘을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 말고도 국민들 또한 그리 큰 불만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스 엠파이어의 남성들은 소유욕이 많죠. 극심해요. 자신의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고 눈알을 뽑아버리려는 이들도 충분해요. 물론 비틀린 성욕을 가진 이들도 있어서 자신의 여자를 남의 여자와 바꿔서 각자의 주인 앞에서 여자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손적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도 자원 행성을 몇 개씩은 가지고 있어요. 놀기 위한 행성도, 지배하고 있는 행성도 여럿 있답니다. 당연히 공창도 존재하죠. 여자는 여러 가지로 이용가치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침략에서도 쓸모가 있고요.”
“침략?”
이시현은 낯선 용어에 반문했다.
손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침략이요. 어스 엠파이어의 침공방식이잖아요.”
“……잠깐만. 침공방식? 그게 무슨 소리지?”
“응? 왜 그런 뜬금없는 표정을. 어스 엠파이어의 침공이 아오이즌 벨트(AOIZEN BELT), 즉 거신의 경계선에 의해 막히자 하는 수 없이 옆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 위 아래로 퍼지자고 결정했잖아요. 그래서 죽음의 황제 진명님이 차원과 시간을 침식하는 기계형 생물병기를 만들어 어스 엠파이어의 침공로를 과거의 평행차원대로 넓혔고, 그곳을 열심히 침략하여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잖아요. 여기가 전쟁지역은 아니지만 세 후계자 중 승자가 가질 수 있는 자원행성인 거 아니었어요? 어, 음. 이거 지워진 지식이었던가?”
이시현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지?
아니, 아주 조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약한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어스 엠파이어는 외계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지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력을 지닌 외계문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문명이 지구를 무대로 자신들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거라고 판단했다. 인간을 한없이 닮은 외계인. 어쩌면 인간과 거의 유사한 배경을 겪었을 외계인. 하다못해 미래인이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잭 더 리퍼라던지, 기타 쟁쟁한 장군들의 이름이 지구의 그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어스 엠파이어라는 단어자체도 지구의 언어였다.
하지만…….
“제국인이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고?”
“네.”
손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수없이 많은 지구 중 하나, 중심이 되는 지구에서부터 약 2만년 후 단 한 번의 미적거림도 없이, 내부의 분쟁도 없이 세 명의 황제분에 의해 극도로 발전한, ‘지구에서 발생한 문명 중 가장 번성하고 메인이 될 문명’이 바로 어스 엠파이어니까요.”
하지만 미래의 인류가 단지 그들만의 재미를 위해 평행차원의 지구를 그것도 과거의 시간대로 찾아와서 ‘침략’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시현은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그럼 어스 엠파이어는 외계인이 아니잖아.
이계인. 그것도 미래인이었다.
나는 그럼 미래의 불량하기 짝이 없는 이계인이 내려준 은혜를 입고 이렇게 오만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 어떤 일에도 충격을 받을 것 같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제법 충격이었다.
“보통 자원행성을 넣으면 뭐를 하지? 귀족들은?”
“음. 그런 것도 몰랐나요. 첫 번째로 얻은 보상행성이니까 당연히 마음대로 하려 들겠죠. 흑공자는 고문과 살해를 좋아한다고 하죠? 아마 수십 명 정도의 선택받은 사람들 외의 전부는 잔혹하게 고문당해, 지옥을 가고 싶어 할 만큼 고통 받으며 억지로 살아있지 않을까요? 노예처럼, 아니 노예조차 아닌 실험쥐처럼. 죽기 위해 삶을 유지하는 삶을 살겠죠. 그에게는 아군조차 없어요. 자신의 노예종마저도 고문하고 아예 성벽을 바꾸는데요 뭘. 소문으로는 그의 고문과 가학행위와 처벌로 아예 무장들은 그와 관련된 특성마저 가진다고 하던가요? 유전자가 발현할 미래마저도 뒤틀어버리는 고문이란 도대체 어떤 걸까요? 배꼽에서 내장을 빼낸 뒤 그걸로 목이라도 조르나?”
극도로 잔혹한 미래.
흑공자가 이 ‘지구’에서 추구하는 것은 끝없는 고문과 그로 인해 즐거워할 흑공자 본인 뿐이었다.
“백공자는 그의 취미를 살리겠지요. 가족끼리, 애인끼리, 형제, 자매끼리 서로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게 만들겠죠. 한 명 한 명에게 구원을 베풀고 배신해서 죽도록 방치하겠죠. 인간은 누구의 말도 믿지 못하게 되겠죠. 희망은 하나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찌르고, 말 그대로 사회의 파탄이 찾아오겠군요. 가공할 정도의 쓰레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스스로조차도 거짓말과 곤욕을 위해서라면 똥통에 몸을 던진다고 하던가요? 어스 엠파이어의 인간들과는 좀 취향이 다르죠. 물론 자신이 굴욕을 당하고 존댓말을 쓰고 남의 격을 높여주는 건 모두 상대를 떨어뜨리고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지만요. 흑공자는 지랄맞은 기준이라도 선은 있지만 백공자는 타협했다고 생각한 선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오직 적 밖에 안 되는 개새끼죠. 흑공자는 똥이라서 더러워서 피하면 되지만 백공자는 똥인데 님 쪽으로 걸어 옴.”
극도로 회의적인 미래.
백공자가 이 지구에서 추구하는 것은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듣지 않는 얼어붙은 회색 미래였다.
그들에게서 이겨야한다.
킬 더 킹이라고 붙여진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자신의 미래라고 이시현은 굳게 믿고 있었다.
새롭게 찾아온 이 찬란한 인생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빛난다. 반드시 승리한다. 그런 결심 끝에 작정하고 킬 더 킹에 참여했던 그는.
“그렇지만.”
이시현 또한 지구를 이용할 방법으로 꽉 차 있지만.
누구에게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그러고도 남는 30억이 넘는 여자들을 죄다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고 마음껏 쾌락을 탐닉하고 싶지만.
“……큭.”
이시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침략.
어스 엠파이어의 침공방식에는 더 이상 혐오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또한 어스 엠파이어의 인간임은 확실하니까. 후계자 중 한 명인 귀족이니까.
이미 이런 세상을 누구보다도 즐기고 있으니까.
‘지구 따위’ 침략한다고 해서 그게 뭐 어쨌다고? 나에게 피해가 오는 건 아니잖아? 아니, 어차피 후계자 싸움에서 이기면 이 지구가 내건데 뭐가 어때서!
“……위해서.”
하지만 흑공자와 백공자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뜻대로 망가뜨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 세계는 나의 것이니까.
이시현이라는 인간의 것이니까.
세상이 버린 이시현이, 다시 돌아와 이번엔 자신이 세상을 쥐려고 하니까.
“그래.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이시현은 각오를 굳혔다.
그래. 각오했다.
“반드시 이긴다. 이번 싸움은. 아니, 너희들과 치루는 모든 싸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