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9 회: 6> 승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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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의 군주에게 있어 쓸 만한 무기로 통하는 금발의 소녀가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듯 경쾌한 움직임. 옷은 천 하나로 몸을 휘감고 있는 매우 특이한 종류였다.
바로크 시대인지 르네상스 시대인지는 몰라도 물을 뿌린 모슬란을 걸쳐 입고 파리한 안색으로 파티에 나타난 영양 같이 단촐하면서도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조폭들은 그녀를 보며 신음했다.
멀쩡한 걸 넘어서 매우 매력적인 소녀였다.
그래서 두려웠다.
평소 같았으면 눈을 야리며 쫓아내거나 혹은 수작이라도 걸어볼까 다가갔을 테지만 이제 한국의 수도에 있는 조폭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를 손으로 잡아 토마토보다 쉽게 짜내는 여성들이 즐비했던 탓이다.
그들은 금발의 소녀가 처음 보는 여성이기에 막아섰지만 감히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장. 그리고 장군.
처음 보는 이 여성은 그들의 지배자가 된 흑공자를 수호하는 여성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잠깐. 멈춰.”
조폭, 현 시대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를 협박하고 폭력을 쓰는데는 따라갈 수 없는 이들은 지금 흑공자라 불리는 이에게 굴종했다. 죽음조차도 그를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안 이상 흑공자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 나타난 여성이 단숨에 그들을 죽이더라도 흑공자의 명령에 따라 정체를 물어볼 수 밖에 없다.
“멈추지 않으면 사살한다.”
“잉?”
“경고했다. 멈춰.”
여성이 멈춰 섰다. 그녀가 양손을 슬쩍 들고 장난스레 웃었다.
“너희들은 그의 부하?”
“……그렇다.”
부하 같은 포지션이기는 했다. 그래서 조폭들은 그렇게 말했다.
뜸을 들인 이유는 수치심이 든다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흑공자의 외형은 몹시 어려보였지만 고작 외형이 어리다고 두목으로 섬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들이 주저한 것은 흑공자가 자신들을 부하로 인정해줄까 하는 우려 때문.
부하 포지션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냥 인간 바리케이트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
흑공자는 자신을 지키고 전쟁에 나서는 무장들조차도 고문했다.
심심하면 온 몸을 난도질하고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댔다. 그러고도 좋다는 듯 여성들은 흑공자에게 달라붙고 더욱 더 큰 고통을 호소했다.
조폭들은 그러지 못했다. 너무 큰 고통에 의식을 끼무룩 놓고 보면 이미 시체가 되어있으니까. 그나마 시체가 되는 편은 나은 쪽이다. 끝끝내 버티거나 혹은 간악한 실험물로 사용되던 이들은 말 그대로 ‘시체인형’이 되어 이용당하고 있으니까.
여성이 생긋 웃었다.
“거짓말 같진 않은데 확신은 없나 보네. 흐음. 어떻게 할까. 너님들을 조지고 그의 반응을 볼까, 아니면 순순히 따를까. 어떤 것이든 재미가 있겠지만, 전자가 조금 끌리네.”
“……제발 자비를 배푸세요.”
조폭은 굴복했다.
이 악마들을 보고 있자면 사람의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었던 총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금발의 여성이 피식 웃었다.
“너님은 신을 믿어?”
“믿소. 지금은 좀……그렇지만.”
“그래? 흠. 응, 앞으로도 믿어. 그 신이 어떤 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 우주에는 말이야. 너보다 위대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 네가 얼마나 잘났든, 얼마나 대단하든지 간에 말이야. 그러니까 그를 신으로 섬겨. 그를 숭배해. 그에게 모든 걸 바쳐. 그러면 얻을 거야. 그의 위광을, 그의 위력을, 그의 일면을. 아하하하핫.”
여성이 소리 높여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다소 컸던 탓인지 조폭들이 지키고 있는 건물에서 한 명의 여성이 요염하게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당나라 시대의 궁복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허리 높이가 말도 못하게 위에 있는 장신에 몸매가 잘 짜인 여성. 나른한 듯 가라앉은 눈매 속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측천.
흑공자를 낳은 장군. 그리고 한때 황제의 곁에서 그를 지키던 제국 최강의 장군 중 하나.
녹색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장죽을 물고서 측천이 말했다.
“이년은 또 뭐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녀의 머리에 장식처럼 매달린 두 마리의 용비녀가 햇살 아래 반짝였다.
번호가 있는 여성. 그리고 세 황제의 휘하에서 어스 엠파이어를 지탱했던 장군이다.
측천이 홍체가 세로로 길게 찢어진 용안(龍眼)을 번뜩이며 금발의 소녀를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일반인은 심장이 멎을 것 같고 온 몸이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너 뭐하는 년이냐?”
존재감만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을 억누르고 소녀가 상냥한 웃음으로 인사했다.
“아, 그 유명한 측천이신가요? 이름만 들었지만 금방 알겠네요. 정말 압도적이네. 휴우. 안녕하세요, 모드카이(Mordecai)라고 합니다.”
“모드카이? 모르드개?”
나타난 여성은 장군은 아니지만 그만한 이름이 있는 무장이었다. 장군의 숫자가 1억에 하나 있을 정도로 희소하다보니 무장이 절대다수인 가운데 장군급을 노리는 무장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에 준하는 실력도 있다.
모드카이, 모르드개라고 스스로를 밝힌 여성은 측천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담담하게 고개 숙였다.
“네. 모르드개라고도 하죠. 광신께서 보내셨습니다.”
“광신께서? 어째서?”
“그건 흑공자님 앞에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아, 나만 이런 건 아닐 거예요. 다른 쪽에도 가 있을 거거든요.”
측천의 눈이 모르드개를 훑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소녀의 표정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바쁘게 소녀의 신체를 훑고 표정변화를 읽던 측천이 장죽을 입에서 떼어내고 녹색의 연기를 흘려보냈다.
“높으신 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들어와.”
“넵.”
경쾌하게 경례를 해보이며 모르드개가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보다 진짜 무섭네요. 이게 전 황제 장군의 힘인가요? 계신 장소가 성소(聖所)라서 힘이 팍 줄었다고는 해도 그 줄은 힘조차 압박이네요. 쳐다보기가 무서울 정도예요. 전 그래도 몇몇 부분은 장군급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아직도 한참 멀었네요.”
“내가 일반 장군이 아니니까.”
“장군에도 격이 있다는 말이죠? 하긴, 그거야 그렇겠죠. 제 아무리 군주들이 전원 반항하고 까불어도 황제 장군 한둘이면 다 정리 되겠죠. 장소가 성소인 지구만 아니라면 강제로 힘을 제한하고 있는 제약도 사라질 테고요.”
“어쩔 수 없지. 전력을 발휘했다간 발 구름 만으로도 지구가 함몰되는 경우도 일어나니까. 폐하께서 허락하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도 폐하께서 계신 곳을 황폐화할 수는 없으니 기쁜 마음으로 제약하고 있는 거지. 뭐 내가 전성기 때가 아닌 것도 있어서 굳이 제약 같은 게 필요없긴 하지만 그래도 여타 99%의 일반 장군과는…….”
측천은 피식 웃으며 말을 꺼내다 이내 상대의 화법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년과는 할 말 없어.”
“아이, 앞으로 오래 지내게 될 텐데 친하게 지내죠. 전 제가 소속된 조직 내에서 제일 센 사람 항문 빨아주면서 생명을 보존하는 특성이 있거든요. 좀 수치심이 생겨도 그런 짓 하다보면 살날이 편해지다 보니. 아, 스캇톨로지는 아니고요.”
“지랄 마.”
틱틱거리며 측천과 모르드개가 건물로 사라졌다.
그녀와 대화를 한 조폭은 목숨을 벌었다는 생각에 깊은 숨을 토했다.
외부에서 온 여자다.
흑공자의 소속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모르드개가 지나가고 난 공기 중에는 옅은 레몬 향이 났다. 조폭은 괜히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곧 스스로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두들겼지만.
“크, 큰일이다.”
“뭐가 그리 큰일이지 아가씨?”
상냥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민 천사 같은 인상의 남자를 향해서 소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가 섬겨야 할 분이 백공자님이라는 걸 몰랐어요. 난 망했어. 이런 인간쓰레기가 임시라고는 해도 주인이라니, 앙, 망했어. 으앙, 으앙. 난 이제 파탄왕의 부하처럼 인격이 파탄 나고 공양경의 것이 되어 공물로서 바쳐지고 매국노의 명령에 황제에게 반역하다 옷이 벗겨진 채 공공대로에 벽보지가 될 거야. 이 쓰레기 같은 사람을 주인으로 맞이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 받는데 말이지.”
백공자 샤를이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낙심한 듯 말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얼굴은 아름답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흐느적대면서 울고 있는 소녀를 보면 마치 하녀와 왕자님처럼 보일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다 해 본 짓이긴 하지만 말이야.”
반쯤 탄 피부에 팔다리를 천으로 감싸고 어쩐지 아랍풍의 모자를 쓰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처 받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상처 좀 받아요. 욕하잖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나를 위해 비난을 해주는 모습이 이리도 나의 가슴을 슬프게 만드는걸. 나의 단점을 지목해주는 널 보고 미워할 리 없잖아. 이런, 눈물이 나올 것 같은걸. 나를 울게 만들다니 넌 못된 아이로구나.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악악! 그런 의도 아니거든요!”
“그런 의도가 아니기에 하는 말이지. 어떤가. 나를 욕하면서 도리어 욕 먹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후후. 많이 싫어하는 것 같군. 그만둘까?”
소녀는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였다.
“그만두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요.”
“잘못했다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벌 받을 테니까 그렇게 사랑스러워하는 여자 쳐다보듯 하지 말라고요. 나는 걸레고 무기고 쓰레기고 창녀니까 그냥 가증스럽거나 천박한 것 쳐다보는 표정 해주세요! 당신 같은 쓰레기가 사랑스럽다고 쳐다보니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요!”
“네 말투 이상한 거 알고 있지?”
“내 앞의 사람이 이상하니까 나도 이상한 거죠!”
소녀의 외침에 백공자는 아쉽다는 듯 양 눈썹 사이에 살짝 주름을 그리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렸다. 어깨를 덮는 머리칼이 그림처럼 흔들렸다.